258화

258화 언젠가, 그런 말을 남긴 성좌가 있었다. 「“모든 설화에는 결함이 있다. 그 말은 곧, 모든 설화는 완전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전설급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 이 설화는, 그 말을 남긴 한 설화급 성좌가 만든 것이었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곡해의 대상을 물색합니다.] 나는 무너진 폐건물 더미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구름 사이로 나를 쫓아온 세 명의 성좌들이 보였다. 원래는 넷이었는데,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와아아아아······.] [설화, 핵, 을, 내, 놔, 라.] 사오미터쯤 되는 체고의 화신체들이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오로치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뱀 머리를 가진 거인이 하나, 거대한 들쥐가 하나.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켈베로스를 닮은 불타오르는 개였다. 미식협에 방문했을 당시, ‘양산형 제작자’는 그런 말을 했다. ―성좌라 해서 모두 격에 맞는 품성을 갖추고 있진 않네. 어떤 성좌는 나처럼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지만, 어떤 성좌는 다른 성좌의 ‘권위’를 빌려 성좌위에 오른다. 별 볼 일 없는 설화를 쌓았음에도 운이 좋게 유리한 지역에 떨어져 성좌가 되는 경우도 있다. “주기 싫다면?” 눈앞에 있는 녀석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대성좌들의 가호로, 혹은 정말 ‘운 좋게’ 성좌가 되어서 다른 초보 성좌나 화신들을 등쳐 먹고 다니는 놈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의 손톱을 탐합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주변 성좌들의 눈치를 봅니다.] 처음부터 내 눈앞에서 얼쩡대던 녀석들이었으니, 언젠가 한 번 부딪칠 줄은 알았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투를 기대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별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은 궁금할 것이다. 내가 설화급 성좌가 되고 나서,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으니까. 허공에서 독각이 물었다. [하하, 여전히 멍청하게도······ 정말 싸울 셈입니까?] 나는 독각의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쿠구구구구! 눈앞의 세 성좌는, 정확히 ‘나와 똑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각 놈의 패널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에 참가하는 모든 성좌들이 ‘같은 전투력’을 가지는 패널티. 콰아아아앙! 나는 [바람의 길]을 전력으로 운용해 ‘뱀 머리 졸부’의 입에서 토해지는 독액을 피해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손톱을 먹는 쥐’가 나를 향해 손톱을 그었다. 어설프게 바닥을 뒹굴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주변은 어느새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불꽃으로 가득했다. 화르르르륵! 나는 주변에 옮겨 붙은 불을 끄며 신형을 뒤로 뺐다. 역시, 단순히 화신체끼리 부딪친다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화신체만의 무력이라면 말이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아무리 동물들이라고 해도 ‘위인급’에 오른 성좌들. 본래 이 스킬로는 그들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설화, ‘심연을 들여다본 자’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스킬 숙련치가 증가했습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당신은 당신 보다 낮은 ‘격’의 성좌들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성좌, ‘뱀 머리 졸부’의 성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의 성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성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곧장 녀석들의 특성을 살폈다. 물론 ‘전투력’이 비등하게 맞춰진 시점에서 단순히 특성창의 능력치나 특성 정보들을 확인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등장인물 일람’의 효과로 해당 성좌들의 설화 목록을 무작위로 출력합니다.] 녀석들이 가진 설화들의 목록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갔다. [뱀을 잡아먹는 뱀] [사람으로 둔갑하는 쥐] [주인을 향한 충성심] [약자들의 약탈자] ······. 그 사이에도 무수한 공격들은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뱀 머리 졸부’의 주먹이 어깨를 스쳐갔다. ‘손톱을 먹는 쥐’의 육탄 공격에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으며,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소심하게 내뱉은 불길에 정강이의 피부가 그을렸다. [특성 효과로 인해 ‘읽기 속도’가 급상승합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녀석들의 설화 목록을 모두 읽었다. 꼴에 놈들도 성좌라고, 가진 설화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몇 개는 전설급이었고, 대부분은 역사급이었다. [밤말을 훔쳐듣는 쥐] [설치류의 공포]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플란다스를 향하여]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 한쪽 다리가 마비된 틈을 타, ‘뱀 머리 졸부’의 손아귀가 내 몸을 휘감았다. 시야가 그대로 반전되더니, 내 몸은 녀석에게 꼼짝없이 포박당했다. 으드드드득! [설, 화, 핵, 을, 내, 놔, 라.] 좌우로 몸을 짓누르는 강력한 악력에 뼈마디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츠츠츠츠츳! 화신체를 이루던 설화 파편 일부가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잔인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흥분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찢어지는 당신의 육신을 보고 싶어합니다.]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에, ‘뱀머리 졸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같은 ‘성좌’라는 이름을 가진다고 하여 정말로 ‘동급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차라리 화신에 가깝다. 여전히 다른 성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서 코인을 받는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흰 그렇게 살아 남아서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거냐?” 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손톱을 먹는 쥐’가 고개를 들었다. [구우우우우······?] 나는 쓰게 웃었다. 하긴,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이 녀석들도 살아남기 급급할 테니까. “너희들도 참 안쓰럽다. 그치? 보통 성좌쯤 되면, ‘왕의 설화’ 정도는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데······.”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당신의 말에 주목합니다.] 뱀이든, 쥐든, 개든, 인간이든. 꾸준히 설화를 쌓아 이름을 날리는 녀석들은 한 번 쯤은 ‘왕’의 설화를 갖게 된다. 하지만 눈앞의 녀석들에겐 그런 설화가 없었다. “······늘 자기보다 약한 존재들과 싸웠으니, 그런 설화가 있을 턱이 있나.” [무, 슨, 개, 소, 리······!] 다음 순간, 내 몸속에서 환한 빛살이 타올랐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곡해할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 이 설화는 딱히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힘은 없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설화 곡해를 시작합니다.] 대신 이 설화는, 아직 본연의 힘을 찾지 못한 설화들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말이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곡해되었습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쿠구구구구구! 몸 속 깊은 곳에서 가공할 설화의 힘이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양쪽 팔에서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내 몸을 옥죄고 있던 ‘뱀 머리 졸부’의 손아귀를 간단히 쥐어뜯었다. 부우우우욱! 내 손아귀에 비늘이 찢어진 뱀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이곳은 ‘왕’이 없는 세계.」 막대한 마력이 빠져나가며 설화가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성좌들의 설화 목록을 확인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이 힘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의 검은 세상의 모든 왕좌를 거부하며 태어나.」 품속에 넣어 두었던 검 한 자루가, 휘황한 빛살을 내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절대왕좌]를 부술 때 사용했던 검이자,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을 얻을 때 사용했던 무기. 그 무기가, 나의 설화에 반응해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왕이 아닌 모든 존재 위에 군림한다.」 [자, 잠깐만! 그 힘은······!] ‘전투력’이 같다는 것이, 설화의 ‘격’까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설화의 밀도가 낮고, 그 수가 적다고 해도. 나 역시, 설화급 성좌. 독각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했어야 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 응용력에 감탄합니다!] [북두성군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주목합니다.] 뒤늦게 당황한 독각이 시나리오 조작을 시도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서브 시나리오’를 바꾸기엔 늦었다. 이미 녀석은 과도한 ‘서브 시나리오’ 강행으로 개연성의 상당 부분을 소진했을 테니까.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꽁무니를 뺄 준비를 합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챈 쥐 녀석이 제일 먼저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한 녀석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멈춰라.”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츳! [당신의 위엄 앞에 왕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모든 존재가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와아아아아!] [찍, 찌이익!] 강력한 스파크와 함께, ‘뱀 머리 졸부’와 ‘손톱을 먹는 쥐’의 몸이 빳빳이 굳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는 이미 내 설화를 목도한 순간부터 바닥에 납죽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르륵. 오··· 오, 지, 마.] 다가서는 나를 보며, 바닥에 너부러진 ‘뱀 머리 졸부’가 몸을 꿈틀거렸다. 이 ‘설화’ 앞에 온전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왕’의 설화를 가진 존재들 뿐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즐거워합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돌원숭이의 왕과 32번째 마계의 왕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사인참사검이 움직였다. [카아아아아아악!] 한 번. 두 번. 나는 몇 번이고 ‘뱀 머리 졸부’의 머리를 내리쳤다. 단단한 ‘뱀 머리 졸부’의 비늘은 쉽사리 파괴되지 않았다. 퍼거걱! 퍼거거걱! 백청강기에 잘려 나간 ‘뱀 머리 졸부’의 살점이 튀고, 파충류의 피가 번지며 주변의 땅덩이가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뱀 머리 졸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몇 번이고 내지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잔인함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나는 ‘뱀 머리 졸부’의 머리통에 박힌 사인참사검을 뽑아들었다. [마왕, ‘은색 발톱의 올빼미’가 당신의 살행에 즐거워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성좌들은 진짜 잔인한 게 뭔지 모른다. “내 자리가 탐난다면, 그만한 각오를 했어야지.” 이것은 성좌들에 대한 경고다. 어설픈 마음으로 이 [거대 설화]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인참사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각! [당신은 ‘뱀 머리 졸부’의 화신체를 격살하였습니다.] [‘뱀 머리 졸부’가 보유하고 있던 설화의 일부를 습득하였습니다.] 별자리와 화신체 사이의 간격마저 베어버리는 ‘사인참사검’의 힘.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비명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아마, ‘뱀 머리 졸부’는 다시는 화신체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어서 ‘손톱을 먹는 쥐’를 바라보았다. 퍼걱! 퍼거걱! 얼마 지나지 않아, ‘손톱을 먹는 쥐’도 똑같은 꼴이 되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광기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안타까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뺨에 튄 피를 닦으며, 마지막 남은 성좌를 바라보았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머리를 납죽 숙인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녀석의 몸을 덮고 있던 불길은 이미 온데 간데 없었다. 개의 몸에 남은 것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뒹굴었던 새카만 화상 얼룩들 뿐. 나는 녀석의 설화 목록을 떠올렸다. 이 개는, 십이지의 다른 두 놈들과는 다르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헥헥대는 개를 보며,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이 개를 죽이지 않으면 어떤 성좌들은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쿠구구구구! 멀리서 나를 노리는 다른 성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의 효력이 다했습니다.] 과도한 마력의 사용으로 인해 나 또한 체력 회복이 필요한 상태. 나는 검을 집어 넣고, 곧바로 개의 등에 올라탔다. “‘유중혁 공단’으로 가자.” 기다렸다는 듯, 개가 힘찬 발돋움을 시작했다. 빠르게 지나치는 전경 속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제각기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방관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참전을 선택했다.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따라 이야기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진짜 ‘마왕 선발전’이, 이제 곧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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