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259화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불길에 몸을 던진 개’는 나를 태운 채 이틀밤을 내리 달렸다. 집요하게 뒤를 쫓는 성좌들이 잦은 위협을 가해왔으나, 그때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는 말 그대로 몸을 던져 나를 지켜냈다. [설화, ‘목숨 바친 충성’이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아났을까. 마침내 날이 밝기 시작했다. [서브 시나리오 ― ‘전초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은 제한 시간 동안 무사히 설화핵을 지켜냈습니다.] 뒤를 쫓아오던 성좌들도 하나둘 먼 곳에서 멈춰섰고, 허공에서는 온갖 종류의 간접 메시지들이 날아들었다. [당신을 쫓는데 실패한 몇몇 성좌들이 낙심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품을 하며 이제 끝났냐고 묻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졸린 눈을 부비며 기뻐합니다!] [성좌, ‘드러 누운 드래곤’이 당신의 책략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비겁함을 손가락질합니다.] 손가락질하든 말든, 여기서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다.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독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보상을 전송했다. [보상으로 2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장비 초월용 모루석’을 2개 획득하였습니다.] 슬슬 장비 강화용 아이템들이 풀리는 시기구나 싶었다. 초반 지역에서 SSS등급을 받은 아이템도, 중후반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거의 폐품에 가깝다. 하지만 제때 초월용 모루석을 사용해준다면, 장비의 품질 낙후를 막을 수 있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화, ‘십이지에게 맞선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역사급인 게 아쉽기는 해도, 설화는 많을수록 좋다. 결국 이런 작은 설화들이 모여 ‘전체의 격’을 이루는 것이니까. 특히 싸움을 통해 얻은 설화는, 앞으로 [제멋대로 곡해자]를 통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뒤쫓던 성좌들이 물러갑니다.] 성좌들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유중혁 공단’의 외양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탈출 시나리오’를 받은 공민들이 줄을 이어 공단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장하영과 한명오가 일을 잘 처리한 듯했다. 나는 ‘불길에 몸을 던진 개’를 향해 말했다. “이제 떠나도 돼. 나한테 충성할 필요 없어.” 어차피 진심으로 나를 따르려는 녀석도 아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헤어져 갈라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가 돌아선 후에도, 녀석은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계속해서 나를 쫓아왔다. 헥, 헥, 헥. 나는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가라니까?” 낑······. 커다란 개의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습기가 맺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불길에 몸을 던진 개’를 가엾게 바라봅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진명은 ‘오수의 개’다. 만취한 주인이 불에 타죽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적셔 잔디밭의 불을 끈 개. 불행하게도 이 성좌는 진명조차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따라올 거야?” 끼잉! 나는 잠시 망설였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은 나와 갈라진다고 해도 자유로워지긴 힘들었다. [일부 성좌들이 ‘불길에 몸을 던진 개’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봅니다.] 세상에는 화신들을 노리는 성좌들만큼이나, 같은 성좌들을 노리는 성좌들도 많다. ‘들개 사냥꾼’이라든가 ‘멜베르크의 개장수’ 따위의 수식언을 가진 놈들을 만나게 된다면, 이 녀석은 꼼짝없이 설화를 빼앗긴 채 죽게 되겠지. 그나마 지금까지 무사했던 것은, 십이지 패거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같이 가든가.” 헥헥헥! “근데 덩치는 좀 줄여. 너무 커서 방해되니까.” 끼잉! 말과 함께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화신체의 크기를 줄였다. 작아진 녀석은 골든 리트리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김독자!” 나를 발견한 장하영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야! 괜찮아? 그 개는 뭐야?” “오다 주웠어. 다른 사람들은?” “공민들 인도하느라 바빠.”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장하영의 손등을 핥았다. 장하영이 물었다. “얜 이름이 뭐야?” 나는 솔직하게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오수.” [당신은 ‘불길에 몸을 던진 개’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크게 감동합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충성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줄 걸 그랬다. 오수의 몸을 유심히 살피던 장하영이 반색했다. “잘 됐다. 사저가 좋아하겠네.” 순간 ‘사저’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싶었다. “······파천신군 말하는 거냐? 걔 암컷이었어?” “파천검도는 여자만 배울 수 있는 거 잊었어?” 생각해 보니 그렇다. 파천검도는 그런 무공이었지. 예외가 너무 많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령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만 해도······. “······뭘 그렇게 봐?” “아냐, 아무것도.”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장하영의 성정체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왕 선발전’의 시작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마왕 선발전’이 시작될 테니까. 쿠구구구구! “······온다.” 내 말에, 장하영도 긴장한 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73번째 마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 하늘에 낯선 빛깔의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무려 [거대 설화]가 걸린 대형 이벤트를 관람하기 위해, <스타 스트림> 곳곳의 성좌들이 이 마계에 찾아온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상당수의 마왕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단지 응시만으로도 그 격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 채널에 입장하고 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지금껏 나와 만났던 성좌들도 드높은 하늘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역시 긴장을 삭이며 하늘 위의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여전히 남은 시나리오는 많고, 그들이 있는 곳은 멀다. 하지만 이제 요원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저 고고한 성좌들이 이 산맥의 어디쯤에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리까진 왔다. [스물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츠츠츠츠츳! [과도한 메인 시나리오 스킵으로 인해 격의 일부가 손상됩니다.] 나는 20번대 시나리오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곧장 ‘25번 시나리오’를 시작했으니, 그만큼 개연성의 손해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메인 시나리오 ― ‘마왕 선발전’이 시작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25 ― 마왕 선발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조력자’들과 팀을 이뤄 ‘신화의 전장’에서 승리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마왕위의 정식 계승, ??? 실패시 : 사망 * 해당 시나리오는 ‘조력자’를 모집할 수 있습니다. * 시나리오의 진행과 관련해 도깨비의 추가 설명이 있을 예정입니다. + 모처럼, 실패 항목에 ‘사망’이 표기된 시나리오였다. 여기서 지면, 나는 죽는다. 지금까지도 종종 있었던 일이니 낯설지는 않았다. [해당 시나리오는 전용 무대에서 개최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주요 참가자는 총 넷입니다.] [주요 참가자들은 상호 간의 합의 하에 ‘조력자’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주요 참가자입니다.] 북쪽과 서쪽에서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멜레돈 공단’ 소속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베르칸 공단’ 소속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하늘의 성좌들이 빛을 깜빡이는 가운데, 허공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성좌님들.] 나타난 것은 독각과 비형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마왕 선발전’이 시작됩니다!] 비형의 말과 함께, 허공의 스크린에 거대한 ‘무대’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먼저, 이 시나리오를 위해 손수 게임을 제작해주신 ‘양산형 제작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과장 섞인 박수 소리가 허공을 메우며, 홀로그램 위에 ‘양산형 제작자’가 만든 맵이 나타났다. [게임, ‘신화의 전장’이 로드됩니다!] 맵은 가장자리가 거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광활한 숲지대였다. 숲지대의 내부에는 동서남북으로 [공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각 [공단]의 출발 지역을 의미하는 듯했다. [예상하셨겠지만, 이번 ‘선발전’은 단순히 치고 박고 싸우는 형태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 ‘선발전’은 공단별로 각각 팀을 이룬 ‘팀전’의 형태로 진행될 것입니다.] 도깨비의 말에 놀란 몇몇 성좌들이 간접 메시지를 쏟았다. 물론, 나는 놀라지 않았다. 원작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합니다. 모든 참가자들은 자신을 포함해 총 일곱 명의 인원으로 ‘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각 팀원들은 제각기 다른 ‘포지션’을 부여 받으며, 그 포지션을 통해 시나리오 안에서 역할을 담당합니다.] 게임은 한때 지구에서 유행했던 소위 AOS 게임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한 명의 탱커와 두 명의 근접 딜러, 다시 두 명의 원거리 딜러와 한 명의 서포터. 그리고 한 명의 ‘올라운더’까지. 총 일곱 명이 팀을 이뤄 대결을 펼치는 것이 바로 이 게임― ‘신화의 전장’이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습니다.] 과연, 수식언답게 게임도 어디서 적당히 훔쳐온 요소들로 만드셨구만······. 도깨비의 말은 계속되었다. [게임에 이기는 방법은 총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팀을 제외한 다른 팀의 참가자를 전멸시키는 것. 그리고 둘은 상대방 팀의 ‘문장’을 빼앗는 것입니다. 뭐, 자세한 건 직접 게임에 참가해보시면 아실 테니 생략하기로 하고······ 그보다, 중요한 공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한참 말을 늘어놓던 비형이 내쪽을 흘끗 보았다. [본래 이 ‘선발전’에는 총 네 개의 팀이 참전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보아하니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공단’ 하나가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더군요.]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비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저희 <관리국>은 게임의 형평성을 심사숙고한 끝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두 개의 공단’을 ‘한 팀’으로 묶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어서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재 당신은 ‘유중혁―김독자 공단’의 참가자입니다.] 뜻밖의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유중혁과 팀이 다른 것 때문에 걱정이었는데, 고민을 덜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비형이 손을 써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왜 ‘유중혁―김독자 공단’인 거지? ㅇ보다는 ㄱ가 순서상 빠르니, 당연히 공단 이름은 ‘김독자―유중혁 공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장하영, 유중혁은 어디 있어?” 나는 두리번거리며 유중혁을 찾았다. 그런데 유중혁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장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채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못 만났어?” “······못 만나다니?” “걔 너 찾으러 갔는데?” “뭐?”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했다. [현재 대상과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이 자식을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는데,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다행히, 지금은 한낮이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한낮의 밀회’. 언젠가 이 녀석과 연결시켜 둔 일대일 채팅 아이템이었다. 거리가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믿을 건 이것뿐이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39통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미 녀석에게서 수십여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급히 창을 열어 보았다. 첫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김독자, 비유는 ‘내가’ 구했다 / 발신인 유중혁, 47시간 39분전 메시지들은 약간의 사이를 두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진 거지? / 발신인 유중혁, 46시간 54분전 네 유치한 장난에 어울려 줄 여유는 없다 / 발신인 유중혁, 46시간 39분전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이겠다 / 발신인 유중혁, 45시간 18분전 농담이 아니다 / 발신인 유중혁, 44시간 39분전 ······. 김독자 / 발신인 유중혁, 41시간 38분전 그 뒤로도 무려 수십 통의 메시지가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가겠다 / 발신인 유중혁, 23시간 14분전 아니, 내가 어디있는 줄 알고 오겠다는 거야 이 자식?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멍청아, 빨리 돌아와! 지금 니 공단에 있어! 그러나 유중혁은 답변이 없었다. 확인했다는 표시도 뜨지 않았다. 대신 돌아온 것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내려진 시나리오 메시지였다. [10분 안에 ‘조력자’를 모집해 주십시오.] [총 6명의 ‘조력자’를 모집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건 두 마리의 개와 성별이 모호한 인간 하나, 그리고 혹시나 자길 지목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산후우울증을 앓는······ 빌어먹을. 전력 구상은 고사하고 7명을 채우기에도 급급한 멤버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조력자를 뽑겠습니다.” 개 두 마리와 장하영, 백 번 양보해서 한명오까지 포함시킨다 해도, 여전히 두 명이 더 필요한 상황. 혹시나 유중혁이 올 한 자리를 비워둔다고 해도, 결국 한 명은 따로 충원해야만 한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채널 내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제 내 인맥을 시험해 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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