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257화 “대충 정리된 느낌이네.” 나는 채널 화면을 통해 유중혁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관리국] 녀석들이 더 빨리 도착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유중혁이 더 빨랐다. 장하영을 통해 우리엘에게 메시지를 전한 게 잘한 선택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생글생글 웃습니다.] 유중혁을 저 자리에 데려간 것은 우리엘이었다. 어차피 유중혁은 ‘파천검성’ 사건으로 내게 단단히 삐져 있을 터, 나보다 우리엘의 말이 유중혁에게 더 영향력이 있으리라는 판단이 주효했다. 화면 속에서 축 늘어진 비형을 들여다 보던 장하영이 말했다. “도깨비가 저렇게 무력한 건 처음 봐.” “종족 설화가 얽혀 있어서 그래. 혹부리를 상대하려면 최소한 대도깨비 이상의 도깨비가 나타나거나, 네 명 이상의 도깨비가 덤벼야 해.” “······너 되게 잘 안다? 도깨비나 혹부리들에 관해서는 모든 게 베일에 덮여 있다고 아일렌이 그랬는데.” “성좌 쯤 되면 이 정도야 기본이지.” 내 말에 장하영이 묘하게 존경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성좌라고 해도 모두가 이런 걸 알지는 않는다. 화면 속에서 울부짖는 비유와, 그런 비유를 감싸는 유중혁의 모습이 짧게 클로즈업 되었다. 「복수해 주마.」 「잘 있어, 대장.」 「고생했다.」 「뒤는 맡길게.」 「쉬어라.」 오직 나만이 볼 수 있었던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제 그 말들은 가야 할 장소에 도착했을까. 나는 그것에 관해 잘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저들은, 이제 그런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독자인 내가 읽을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분명히 닿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김독자?” 나를 빤히 보는 장하영의 눈빛.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쪽은 유중혁이 어떻게든 할 테니 이쪽도 준비를······.” 쿠구구구구! ······제기랄. 벌써? 장하영과 나는 동시에 집무실의 창밖을 내다봤다. [공단]의 장벽 너머로, 자욱한 모래구름이 몰려 오고 있었다. 웅성대는 공민들. 의원들을 동원해 그들을 진정시키는 마르크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또 성질 급한 성좌분들이 계시는군요. ‘마왕 선발전’은 아직 48시간이나 남았는데 말이죠.] 허공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도깨비의 목소리. 공단의 드높은 상공에서 ‘독각’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본래는 좀 더 뜸을 들일 생각이었습니다만······.]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나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찬 녀석. 하지만 아무리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거대 설화]가 걸린 ‘마왕 선발전’을 제놈 멋대로 시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일찍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뭐?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전초전’이 시작됩니다!] 떠오른 창을 보고,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챘다. 서브 시나리오. 하필 비형도 비유도 없을 때 저 자식이······. + <서브 시나리오 ― 전초전>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제한 시간 동안 [공단]의 ‘설화핵’을 지켜낼 것. 또는 빼앗을 것. 제한시간 : 48시간 보상 : 공격측 ― ‘마왕 선발전’ 출전 자격 획득 / 수비측 ― 200,000코인, ??? 실패시 : ― +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츠츠츠츠츳! 아무리 서브 시나리오라도, 이런 시기에 이런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여는 것은 명백히 개연성에 어긋난다. [일부 성좌들이 ‘독각’의 불공정한 진행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개연성 적합 심사’를 요구합니다!] 다행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아아, 성좌님들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확실히 불공정한 데가 있기는 하지요. 수비측과 공격측의 숫자도, 격도 맞지 않습니다.] 나를 비웃듯, 독각이 웃는다. 네놈이 이런 시나리오를 감당이나 할 수 있겠냐는 듯한 미소. 누가봐도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래서 난이도를 살짝 조절했습니다. 이번 ‘서브 시나리오’에 한해서, ‘공격측’과 ‘수비측’의 개별 성좌님들은 동등한 수준의 격을 보유하시게 됩니다.] 독각의 말과 동시에, 내 화신체를 중심으로 희미한 아우라가 일렁였다. [해당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모든 성좌들의 능력치가 고정됩니다.]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펼쳐 보았다. 아마 공격측의 성좌들도 똑같은 패널티를 받았을 것이다. 아직까진 내 능력치가 떨어진 것인지, 증가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일부 성좌들이 여전히 이 시나리오는 ‘개연성’에 어긋난다고 항의합니다!] 독각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아, 그런 말씀들 마십시오. 정말이지······ 그간 다들 나약해지셨군요. 시나리오는 어려워야 재밌다는 걸, 벌써들 잊으신 겁니까?] 채널은 찬성파와 반대파의 간접 메시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틈타, 독각은 시나리오를 강행했다. [당신은 현재 ‘김독자 공단’의 주인입니다.] [당신은 ‘전초전’의 ‘수비’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신은 공격대의 성좌들로부터 공장의 ‘설화핵’을 보호해야 합니다.] 나는 허공의 독각을 마주보며 쓰게 웃었다. 오냐,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김독자, 어떡······.” 나는 장하영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공민 여러분. 직접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나의 진언이, [공단]을 한가득 메웠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켜며 외쳤다. [모두 진정하시고, 제 말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으로 들려오는 ‘공작’의 목소리에, 모든 공민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곳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다!” “저 사람이 공작이야!” 고마운 환대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기대에 어울려 줄 수가 없었다. [저는 여러분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아마 지금껏 마계에 이런 공작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마시고,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중혁 공단’을 추천합니다!] 내 어처구니 없는 선언에 공민들의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공민들을 진정시키던 마르크조차, 어이없다는 듯 이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이들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니까. 이 ‘시나리오’에, 불필요한 희생은 없어야 한다. [공민들을 당신의 ‘공단’에서 해방시키시겠습니까?] “해방한다.” [공단의 모든 ‘공민’들이 당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김독자 공단’의 공민들이 ‘탈출 시나리오’를 획득했습니다.] [‘김독자 공단’의 공민들이 ‘공단’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전설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공단의 해방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마지막 진언을 남겼다. [떠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떠날 때까지, 내가 저들을 막겠습니다.] 비형이 있었다면 다분히 연출된 이 대사에 시비를 걸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비형은 먼 곳에 누워 있었다. [공단의 공민들이 당신의 고결한 희생을 기립니다.] 고맙지만, 고결한 희생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단]의 장벽 건너편에서 몰려오는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거대한 기운이 넷. 최소 네 명의 성좌가, 나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장하영. 한명오랑 파천신군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 절대로 싸울 생각하지 마.” “뭐? 싫어!” “싫어도 해! 곧바로 유중혁이 있는 곳으로 가. 빨리!” 지금 오는 녀석들은 ‘넷’이지만, 그 뒤에 있는 녀석들은 더 많을 것이다. 초월급의 개와 성별이 모호한 인간 하나, 임신 경험이 있는 중년인만으로 당해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어차피 놈들이 노리는 건 나 하나야.” 나는 곧장 집무실 아래층으로 달려가, 공장의 ‘설화핵’을 뽑았다. [‘공장’이 가동을 중지합니다.] 중요한 건 이 ‘설화핵’을 지키는 것. 그걸 지키기 위해, 굳이 [공단] 안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나는 책갈피를 열고 [바람의 길]을 사용해 곧장 공단의 장벽 위로 올라갔다. [니들이 원하는 게 이거냐?] 멀리서 다가오던 네 명의 성좌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갖고 싶으면, 빼앗아 보든가.] * 그와아아아아아아! 뒤쪽에서 따라붙는 무시무시한 괴성들. 능력치의 평균이 동등해진 것이 그나마 내가 달아날 수 있는 이유였다. 저쪽은 넷이고, 나는 하나. 저쪽 성좌들의 격이 높든 낮든, 지금의 내게 승산은 많지 않았다.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장벽을 넘어 달렸다. 내가 ‘설화핵’을 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성좌들도 죽자살자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를 쓰러트리면 무려 ‘마왕 선발전’의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저렇듯 날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꽁무니를 빼는 나를 향해 독각이 비웃듯 지껄였다. [하하하, 도망치는 꼴이 아주 가관이군요! 성좌님들, 정말 저런 녀석을 구경하겠다고 비형의 채널에 머무르신 겁니까?] 저 개자식······. 만약 비형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이딴 서브 시나리오로 고통받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으로, 비형이 이곳에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도깨비 보따리’의 멤버 등급 상승을 요청한다.” 나는 이미 두 번의 등급 상승으로 ‘플래티넘 멤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플래티넘’은 멤버의 최고 등급이 아니었다. [현재 담당 도깨비가 부재 중입니다.] [도깨비 부재로 인해 등급 업데이트가 자동 실행됩니다.] [5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도깨비 보따리’의 다이아몬드 멤버가 되었습니다!] [회원 등급 상승으로 ‘도깨비 보따리’의 아이템 내역이 업데이트 됩니다.] 다이아몬드 멤버부터는 VIP 전용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지금쯤 ‘그 아이템’들이 출시되었을 것이다. [VIP 전용 아이템 목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비형이 있었다면 죽어도 이 목록을 못 보게 숨겼겠지. 왜냐하면, 이 목록의 아이템들 중에는 비형의 흑역사도 끼어 있으니까. + * 랜덤 설화 박스 (ver.1.3) ― 20,000 C * 설화 융합 박스 (ver.1.3) ― 200,000 C + ······역시나. 미쳐버린 이 코인 아이템들, 당연히 팔고 있을 줄 알았다. 다행히 리뉴얼 된 박스의 버전도, 내가 찾던 그것이었다. 「“시발, 이거 확률 정한 새끼 누구야······ 확률 공개는 왜 안 해!”」 아마······ 71회차에서 김남운이 이걸 잘못 샀다가 망한 적이 있었지. [아이템, ‘랜덤 설화 박스’를 10개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설화 융합 박스’를 1개 구매하였습니다.] [총 400,000 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이 [랜덤 설화 박스]는 오직 코인만을 소모해 ‘설화’를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박성 아이템이었다. 최고 ‘준신화급 설화’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설명 때문에, 훗날 이 아이템이 시중에 풀렸을 때 화신들은 물론이고 성좌들까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 박스를 까댔었다. 물론, 모두 파산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한 말로였다. 이 [랜덤 박스]에서 상급 이상의 ‘역사급 설화’가 나올 확률은 0.001%도 채 되지 않고, 준신화급 설화가 나올 확률은 0.00001%도 되지 않으니까. 그럼 나머지 99.99%는 뭐냐고? 「“미친! 역사급 설화 50개? 그것도 최하급? 지금 장난해?”」 나는 추락하는 박스를 낚아 채 입으로 포장을 뜯었다. [아이템, ‘랜덤 설화 박스’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이 박스에서 ‘좋은 설화’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이 박스를 까냐고? 내가 원하는 설화는, ‘안 좋은 설화’이기 때문이다. . . [설화, ‘머리 어깨 무릎 발’을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제 머리 못 깎는 중’을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코에 걸면 코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귀에 걸면 귀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 . 과연, ‘멸살법’에서 본 그대로였다. 1.3 버전의 ‘설화 박스’에서는 80% 이상의 확률로 ‘신체’와 관련된 설화가 나온다. 그중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설화가 바로 [코에 걸면 코걸이]와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푸슈슈슈슈슛! 뒤쪽에서 뱀의 송곳니 같은 것이 쏘아져, 내 옆구리와 허벅지를 스쳐갔다. 설화의 힘이 담긴 공격. 나는 이를 악물고 진각을 밟아 [바람의 길]을 극성으로 발동한 뒤, 주변에 보이는 폐건물 뒤쪽으로 숨었다. 아직, 내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어······ 디······ 에······ 있, 느, 냐!] 나는 어눌한 진언을 무시하고, 방금 획득한 설화를 확인했다. + [역사급 설화 : 코에 걸면 코걸이] 설명 : 무엇이든 코에 걸면 액세서리처럼 보일 수 있는 효과를 발동한다. 정말로 무엇이든 상관없다. + [역사급 설화 : 귀에 걸면 귀걸이] 설명 : 무엇이든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보이는 효과를 발동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와 한쌍으로 제작된 설화다. +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설화들은 지금 당장 상황을 타개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이템과 함께라면 다르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설화 융합 박스 ver. 1.3 등급 : ― 설명 : 각기 다른 종류의 설화들을 융합할 수 있다. 매우 낮은 확률로 상위 등급의 설화를 랜덤하게 생성한다. + 특정한 조합의 설화를 섞을 시, 매우 낮은 확률로 상위 등급의 설화를 생성하는 아이템. 본래였다면 이 아이템도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같은 설화들을 넣어도 결과값이 매번 다르고, 좋은 설화가 나올 확률도 터무니 없이 낮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 1.3 버전의 융합 박스에는 버그가 하나 있었다. 「“그때 그 박스 그것 때문에 판매 중단 됐었잖아. 시발, 내가 안나 크로프트 녀석보다 먼저 그걸 해봤어야―”」 1.3 버전의 ‘설화 융합 박스’가 가진 버그. 그것은 특정한 설화들을 섞을 시, 최초 융합자에게 반드시 ‘정해진 설화’가 나온다는 것. 망설이지 않고 두 설화를 박스 안에 털어 넣는 순간, 섬광이 왈칵 쏟아졌다. 폭연 속에서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내 귓가에 한줄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전설급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를 획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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