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253화 키리오스는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제자를 들였다. 처음 초월좌에 오른 후 한 번, 50년이 지난 후 또 한 번. 그리고 그는, 한동안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들였던 제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천마신교의 후계자에게. 그리고 또 한 번은, 혈마교의 최고호법에게.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유명해진 것도 바로 그 두 죽음으로 촉발된 사건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죽음에 분노한 키리오스는 곧장 천마신교와 혈마교의 본거지로 쳐들어갔다. 그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무림사에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천마신교의 본거지인 ‘십만 대산’의 절반이 민둥산이 되었고. 혈마교는 <제1 무림>에서 세력을 철수했다는 것뿐. 그리고 100년이 지나, 키리오스는 다시 한 번 제자를 들였다. 키리오스는 모처럼 만난 제자를 향해 물었다. [······그게 무슨 꼴이냐?] “불민한 제자가 인사드립니다.” 키리오스는 인상을 쓴 채 그런 제자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받은 제자였다. [ 물었다. 어째서 그런 꼴이냐.] 딱히 재능이 있는 녀석도 아니었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지도 않았다. 단지, 녀석을 보는 순간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친근했다. ‘역설의 백청’에게 ‘친근함’이라니. 그 역설이 너무나 기이했기에, 조금 알아보고 싶었던 게 전부다. “<제1 무림>에 다녀왔습니다.” 키리오스는 몸 곳곳에 피칠갑을 한 자신의 제자를 노려보았다. [피스 랜드]에서도 꿍꿍이로 가득하던 녀석이었다. 무공을 훔쳐 달아난 죄를 묻지 않은 것은, 어쨌거나 자신의 행성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다렸던 것이다. 언젠가 제놈이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그런데, 모처럼 나타난 제자가 저런 꼴이라니······. 키리오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그것은 ‘파천검도’의 흔적이다.] “······.” [파천검성의 제자와 부딪쳤던 것이냐? 아니면 파천검성 본인이냐?] 제자는 답하지 않았다. 키리오스의 기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답하라.] 쿵, 하고 내리찍은 진각에 [공단] 전체가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진각에 담긴 존재감이 퍼지며 [공단] 일대의 김독자 지망생들이 고통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단지 마력파만으로, 마치 ‘격’을 현현하기라도 한듯한 효과. 이것이 바로 ‘역설의 백청’의 존재감이었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단 한사람, 그의 제자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백청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 말에, 키리오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곳에 올 때, 그가 받은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키리오스의 작은 잇몸 사이에서 으드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을 벌하러 온 것은 맞다. 하지만······.] 자신의 제자가 애먼 곳에서 두들겨 맞고 왔다. 게다가 제자 스스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해 죽여달라 말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대체 어떤 스승이 제자를 벌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런 스승도 있긴 하겠지만, 적어도 키리오스는 아니었다. [······죽여달라는 놈이 어째서 그렇게 당당한 것이냐?] “······.” [못난 놈.] 키리오스는 그 말과 함께 제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 자존심 강한 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뭐든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 무림>이라고 했느냐?] 제자는 답하지 않았지만, 키리오스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세상은 ‘파천’ 위에 ‘역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키리오스가 사라지자, [공단]에 흐르던 전운도 씻은 듯 사라졌다. 키리오스가 몰고 지나간 흔적 속에, ‘김독자 지망생’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으, 으으······ 으아아아!” 나를 지망한다는 녀석들이 저 꼴로 있는 걸 보자니, 나로서도 기분이 몹시 복잡했다. 장하영이 물었다. “······너무 과했던 거 아니야?” 그것은 ‘김독자 지망생’들을 향한 물음은 아니었다. 나는 키리오스가 사라진 포탈 쪽을 보며 말했다. “그래야 움직일 사람이었어.” 키리오스는 이미 무림에서 두 명의 제자를 잃었다. 그런 그를 <제1 무림>으로 보내려면, 비겁한 구실을 만드는 수밖엔 없었다. “저 사람이 파천검성을 죽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걱정 마.” 나는 장하영이 입힌 상처 위에 설화 파편을 치덕치덕 문지르며 답했다. 지금이야 내 복수를 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갈 지는 두고봐야 알 것이다. 키리오스 급의 초월좌라면, 슬슬 <제1 무림>의 변고 정도는 눈치챘을 테니까. [당신으로 인해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촉발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키리오스는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를 받아 <제1 무림>에 개입할 개연성을 얻었겠지. 키리오스 또한 ‘이계의 신격’에게 불만이 있는 존재. 전후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파천검성을 돕는 쪽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지금은 우리 쪽이 더 걱정이야.” “뭐? 왜?” “원래 키리오스는 여기서 쓸 카드가 아니었어.” 그동안 무수한 위기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장하영’을 통해 키리오스를 부르지 않았다. 본래 나는 키리오스를 ‘마왕 선발전’의 격전 속에서 부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카드를 ‘파천검성’을 살리는 데 사용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떳떳한 선택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걱정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떤 별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고. [몇몇 성좌들이 당신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어떤 별은, 나의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별들을 향해 씁쓸히 웃었다. “충분히 봤으면 이제 결정들 하지 그래.”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하늘을 향해 공언했다. “내가 진짜 ‘김독자’다.” 이미 키리오스와의 대화마저 모두 공개된 상황에, 더 이상의 증명은 필요 없었다. 아득한 밤하늘의 별들이 동시에 반짝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 . [극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결과에 불복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놈들은 또 뭔가 싶었지만, 어차피 이건 다수결이었다. [대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당신은 ‘진짜 김독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히든 시나리오가 완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보상으로 20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주변에 있던 ‘김독자 지망생’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모자이크가 흩어진 곳에, 사람들의 진짜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공단]의 주인을 확인한 공민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김독자다! 진짜 김독자야!” “고, 공단의 주인이 돌아왔다······!” 이어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당신은 ‘구 길로바트 공단’을 정식으로 계승하였습니다.] [구 길로바트 공단이 ‘김독자 공단’으로 정식 공언되었습니다.] [마계에 당신의 위명이 널리 퍼집니다!] [당신의 유명세가 당신이 가진 설화들을 강화합니다.] 전신을 감싸는 환한 빛살과 함께, 한층 더 강화된 설화가 충만하게 차올랐다. [당신은 마계 공단의 ‘공작’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외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 사태가 진정된 후, 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공단]의 중심지에 위치한 마르크의 집무실이었다. “······면목이 없네.” “아냐, 이만하면 잘 해줬어.” ‘김독자 게임’이 시작되며 일어난 폭동에, 마르크를 비롯한 [공단]의 간부들은 모두 구금되어 있었다. 나는 마르크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아니까.” 마르크가 아니라 누구였더라도, ‘김독자 게임’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건 내가 자리를 비워서 발생한 이벤트니까. 그나마 [공단]이 이만큼 유지가 되었던 것도 마르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르크는 고향 행성에서 용병 단장을 역임한 적이 있었고, 때문에 굉장히 높은 [군중 지휘]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마르크에게 주변의 동향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들었다. “곳곳에서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있네.” 집무실의 창밖으로 한무리의 인파가 [공단]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시나리오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은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알고 있지 않은가?”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애써 붙잡는 것도 미련한 짓이야.” 저들 중 대부분은 ‘시나리오 지역 이탈’로 패널티를 받아 사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주를 결심했다. 그만큼이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뜻이겠지. [공단의 인구가 줄어 ‘공장’의 가동력이 감소합니다.] 설화 병기인 [공장]은 공민들의 노동을 통해 유지된다. 그러니, 노동력이 줄어드는 만큼 파워가 낮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공단]의 전력만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어. 어차피 적들의 주력도 [공단]은 아니야.” 내가 상대해야 할 [공단]은 멜레돈과 베르칸. 멜레돈은 성운 <베다>와, 베르칸은 성운 <파피루스>와 손을 잡았다. 동맹의 규모로 봐서 성운과 직접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 해당 성운의 일부 성좌들과 계약을 한 것일테지. 그렇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마왕 선발전’에서 나는 최소 열 명 이상의 성좌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뭔가 방책이 있는 겐가?” 솔직히 말해서, 승산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이제 막 애송이 성좌가 된 내가, 아무리 유중혁의 도움이 있다 해도 그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방법이야 있지.” 하지만 지금은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한다. 보고 있는 눈들이 있으니까.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패기에 감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 방법이 뭔지 궁금해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생각해 둔 것들이 몇 가지 있기는 했다. 전이라면 불가능 했겠지만, 지금은 가능해진 방법들. 그런데 그 방법들을 쓰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제4의 벽’이 꿈틀거립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녀석은 곧장 반응해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내 마음을 줄줄이 꿰는 녀석이니, 내가 굳이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내 특성창을 보게 해줘.’ 지금까지는 내 정보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로도 어떻게든 싸워 왔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제4의 벽’이 불안하게 요동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런 식이어서는 곤란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도 이기기 힘든 싸움. 이미 적에 관한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이니, 지금부터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나’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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