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252화 [히든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게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나를 보던 한명오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건 또 무슨 일인가?” 나는 비유를 올려다보았다. [바앗, 바아앗······.] 억울하다는 듯 도리질을 반복하는 비유. 비유의 짓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히든 시나리오’는 ‘메인 시나리오’처럼 <스타 스트림>의 의지에 따라 발동하니까. 하지만 왜 이런 시점에?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가 힌트를 주었다. [현재 ‘공단’의 주인이 부재 중입니다.] [비상 승격 시나리오가 발동 중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스타 스트림>이 제가 공작위를 계승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은데요.” “이제라도 왔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내가 공단에 진입한 후에도, 시나리오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중혁과 내가 저지른 사칭 행위 때문에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가 꼬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도 오류가 발생했다는 메시지가 떴었으니······. “······뭐야, 김독자 게임? 자유 참가 시나리오네?” 뒷좌석에서 부스스 눈을 뜬 장하영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현재 ‘공단’의 ‘진짜 김독자’를 선출 중입니다.] 자칫하면, 이대로 내 이름을 빼앗기게 생겼다. 나는 한명오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참가하실 겁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나?” “장하영 너는?” “난 김독자 되기 싫어.” 홱 돌린 얼굴이, 왜인지 뾰로통히 토라져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나와 ‘구원의 마왕’을 분리해 생각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파천신군이었다. 왕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만 참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저기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뭔 일이 있든 가야죠. 제 공단인데.” 시나리오 참가 신청을 하자마자, 곧바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김독자 공단’ 인근 채널의 성좌들에게 자신이 ‘김독자’임을 증명하시오. 제한시간 : 3시간 보상 : ‘김독자 공단’의 공작위 계승, 200,000 코인. 실패시 : ??? * 해당 시나리오의 ‘김독자 지망생’들은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모두 ‘똑같은 외형’으로 보이게 됩니다. * 제한시간 내에 성좌들에게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김독자 지망생’이 ‘김독자’를 계승하게 됩니다. + ······살다살다 이런 시나리오는 또 처음 받아본다. 당연하지만 이딴 시나리오는 원작에도 나온 적이 없었다. [새로운 ‘김독자 지망생’이 입장했습니다.] [시나리오 제한 시간이 3시간 남았습니다.] [당신은 가장 많은 성좌에게 ‘김독자’임을 인정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1131번째 ‘김독자 지망생’입니다.] 시나리오 시작과 동시에 나는 [김독자 공단]의 광장 외곽에 소환되었다. 이미 곳곳에서는 자신이 김독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하하, 여러분! 그래서야 성좌님들께 인정 받을 수 있겠어요? 제대로 된 김독자를 보여달라고요!] 허공에서 들려오는 도깨비의 목소리.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관리국]은 무사히 마계로 진출을 끝낸 모양이었다. 혹부리 녀석들의 방해가 심했을 텐데······ 하여간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에는 귀신같이 찾아오는 녀석들이다. [바아앗!] 비유도 분발하겠다는 듯, 채널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추가로 입장했습니다.] 나는 일단 차분히 주변을 둘러 보며 다른 ‘김독자 지망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가 김독자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바로 김독자다!” 얼굴 부분에 모자이크가 된 채 ‘김독자’를 외쳐대는 김독자 지망생들. 아마 지금쯤 나도 다른 성좌들에게 저렇게 보이고 있겠지. ······젠장,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대부분의 ‘김독자 지망생’은 그저 내 이름만을 반복해서 연호할 뿐, 딱히 특이한 제스처를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위’에 눈이 멀어 일단 참가만 하고 본 녀석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모든 녀석들이 그런 허당은 아니었다. “내가 예언자 김독자다!” “내가 바로 ‘구원의 마왕’이다!” [몇몇 성좌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986번 지망생이 1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그럴듯한 코스튬을 한 채 ‘김독자’를 외쳐대는 몇몇 지망생들을 보며 잠깐 멈춰섰다. “내가 바로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지망생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986번 지망생이 2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제법인데? 공단의 중심으로 진입할수록, 그럴듯한 말을 하는 녀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투를 벌이는 김독자들도 보였다. 유독 이 지역만 왜 이렇게 피바람이 몰아치는가 싶었는데, 허공에서 익숙한 성좌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진짜 김독자’는 용맹한 녀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천대성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싶었는데, 이미 한탕 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피바람이 몰아쳤고, 습격을 당한 김독자 지망생들이 짚단처럼 자리에 쓰러졌다. “끄아아아악!” 날카로운 마력의 강기가 다른 김독자 지망생의 허리를 양단했다. 몇몇 지망생들이 달아나는 사이, 살인자 김독자 지망생이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김독자’라는 증거다.” 푸르스름하게 솟아 오르는 마력의 칼날.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해당 지망생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312번 지망생이 1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312번 지망생의 강기는 [백청강기]는 아니었지만, 꽤 모양새가 비슷했다. 내쪽을 흘끗 바라본 ‘312번 지망생’이 다시 다른 지망생들을 격살하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이었지만,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일렌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공작님들 떠나신 이후로 다른 공단의 끄나풀들이 나타나서 고생을 좀 했는데······.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 이곳의 ‘김독자 지망생’ 중에는, 다른 [공단] 출신의 끄나풀들이 있다. 즉, 나에 대한 정보를 후원 받아 ‘김독자 행세’를 하는 놈들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만약 내가 이 게임에서 패배한다면, 엉뚱한 녀석이 ‘마왕 선발전’에 김독자로 참가하게 될 것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김독자 증명’을 요구합니다.]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곳에는 나를 증명할 주민등록이나 신분증 따윈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진짜 김독자’는 전우애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엘? 내가 반가움에 소리치려는 순간, 광장의 중심에서 한 지망생이 무릎을 털썩 꿇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유중혁! 유중혀어어어억! 일어나! 제발 일어나!” 가상의 유중혁을 품에 안은 채 절규하는 ‘김독자 지망생’의 모습.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저런 짓따위 하지 않는다. 저딴 연기로 우리엘이 속을 리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 다음도 보여달라고 간청합니다.] [32번 지망생이 3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엘은 믿지 말아야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32번 지망생을 지나치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수식언이 들려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진짜 김독자’는 중2병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연의 흑염룡? 여기엔 언제 온······.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진짜 김독자’라면 진정한 중2병을 알고 있을 거라 주장합니다.] 진정한 중2병? 내가 그딴 걸 알 턱이······ 라고 생각하는데, 놀랍게도 그 말과 동시에 헛소리를 시작한 지망생이 있었다. “어이어이, 유상아 씨. 그거 알고 있나? 큭큭. 독자에겐 말이야. 독자의 삶이 있다고.” 순간 머릿속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시나리오가 터지기 전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저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아니, 그보다 나는 저런 식으로 말한 적 없다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만족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97번 지망생에게 300점을 부여하였습니다.] 정신이 황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다간, 진짜 말도 안 되는 놈들에게 내 이름을 빼앗기게 생겼다. 침착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김독자임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나와 성좌들만 공유하고 있는 사건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32번 지망생이 2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랑 성좌들만 알고 있는······. “나는 씩 웃는 것을 좋아하지!” [97번 지망생이 25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랑 성좌들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차이나 드레스와 가터벨트다!” [312번 지망생이 4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젠장, 그런 일이 대체 뭐가 있지?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쉽게 가기로 했다. 그냥, ‘구원의 마왕’의 간접 메시지를 통해 내가 김독자임을 직접 알리면 되는 것이다. [해당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동안 성좌 ‘구원의 마왕’은 발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제한 시간이 1시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이제 얼마 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조용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쥐었다. 어차피 ‘김독자 지망생’들의 숫자는 한계가 있다. 모든 ‘김독자 지망생’을 죽인다면, 최후의 지망생이 진짜 김독자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다들 권좌에 눈이 멀어 저러고 있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내 [공단]의 공민들일 테니까······. 말없이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길 몇 번,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 답지 않은 행동이다.」 빌어먹게도 유중혁의 말이 맞다. 김독자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나라면 나를 어떻게 증명할까. 아니, 애초에 ‘나’를 증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변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이것이 바로 [전인화]다! ‘백청의 역설’이 가르친 궁극의 기술······!” 어설프게 전격이 흐르는 검을 쥔 312번 지망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백청의 역설이 아니라 역설의 백청이라고 지적하려는 순간. 하늘에서, 까마득한 번개가 내리쳤다. 콰르르르릉! “으아아아아악!” 내리친 푸른 빛의 번개는, 그대로 지망생의 칼날 위에 꽂혀 그의 몸을 산산이 찢어버렸다. 일부 지망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성좌들이 좋아하며 마구잡이로 점수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혼란의 도가니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하늘에서, 작은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쿠우우우웅! 고도의 압력이 느껴지는 작은 점 같은 것이 무지막지한 굉음을 내며 [공단]의 광장에 상륙했다. 백청의 전격이 광장을 한바탕 휘몰아쳤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그 전격의 중심에 서 있는 작은 사내. 츠츠츳,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희뿌연 먼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제자는 어디 있지?]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수의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성좌들이야 경악하건 말건, 작은 사내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몇몇 지망생들이 있었다. “저 체구는······.” “잠깐, 설마?”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후다닥 달려가 사내 앞에 엎드렸다. “저, 접니다!” “제가 김독자입니다! 스승님······!” 작은 사내의 앞에, 무수히 많은 김독자들이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눈치가 빠른 것은 좋았다. 번쩍! 콰르르릉! 그만큼, 몸놀림도 빨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 “으아아악!” “끄어어어억!” 백청의 전격을 맞은 김독자들이 하나둘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제자들을 하나씩 족치며 이쪽으로 다가오시는 스승님을 보며, 나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그런가. 애초에 ‘나’라는 것은 내가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신의 고유 설화가 발동합니다.] [설화, ‘귀환자의 제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국 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달아나는 무수한 ‘김독자’들의 건너편에, ‘진짜 김독자’를 아는 사내가 있었다. [진짜 내 제자는 어디에 있느냐?] 만약 여기서 순순히 앞으로 나간다면, 나는 다른 가짜 녀석들처럼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겠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뭐야? 죄다 자기가 김독자래?” 언제 뒤따라왔는지, 장하영이 뒤쪽에서 투덜대고 있었다. 나는 장하영을 향해 말했다. “장하영.”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란 녀석이 움찔 물러서더니 되물었다. “······김독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파천검도’ 배웠지?” “······당연히 배웠지. 왜?” 나는 씩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지금 나한테 사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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