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254화
[‘제4의 벽’이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냅니다.]
허공에서 사나운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나는 마르크에게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괜히 여기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무슨 제안을 어떻게 해야 이 망할 벽 녀석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생각했다.
‘너 설화 좋아하잖아. 이번 일 잘 끝나면, 네가 먹고 싶은 것들 잔뜩 먹여줄게.’
[‘제4의 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으르렁거리던 기세가 조금 주춤했다.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군.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래. 계속 모르고 있다간 여기서 나 죽을 수도 있다고. 설마 네가 바라는 게 그거야?’
[제4의 벽]이 침묵했다.
다행히, 이 녀석도 지금 내가 죽는 건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제4의 벽]이 입을 열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김 독자」
‘응.’
「내 가 없으 면 위 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제4의 벽]의 기능 중에는 성좌들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기능을 상실했을 때 성좌들이 내게 해를 가하는 것이 걱정되기도 할 것이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꼭 봐야만 해.’
내 의지가 완강하자, 잠시 대답이 없던 [제4의 벽]이 입을 열었다.
「10 초 정 도라 면」
10초라.
그래,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
「대신 채 널이 모 두 차 단되 어야 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 채널에 광고 띄워줘.
도깨비 통신으로 명령을 내리는 순간, 비유가 송출하던 화면이 일제히 꺼졌다.
[다수의 성좌들이 갑작스런 광고 영상에 당황합니다.]
좋아, 이만하면 됐겠지.
그러나 [제4의 벽]은 만족스럽지 못한 투였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아직 충 분치 않 다」
‘충분치 않아? 뭐가?’
[제4의 벽]은 답이 없었다.
허공을 올려다 보자, 비유가 무구한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었다.
[······바앗?]
분명, 비유는 제대로 채널을 차단했다.
그런데도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것은······.
순간, 종전에 있었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증명’.
지금 이 [공단] 안에는, 그 시나리오를 진행하던 도깨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창 밖으로 시나리오의 폐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히든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것은 <스타 스트림>이지만, 그 시나리오의 방향을 인도하는 것은 도깨비다.
[다수의 성좌들이 불안정한 채널 상태에 항의합니다.]
돌이켜 보면, ‘김독자 증명’은 좀 특이한 시나리오였다.
마치 성좌들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시나리오 진행, 심지어 시나리오 이전의 ‘나’에 대한 정보까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짓을 벌일 녀석은 하나 뿐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형, 그만 나오지 그래?”
*
“아줌마! 어디 있어? 나 왔어!”
성남시에 마련된 <자애 구호소>.
정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 대피소는, 시나리오 침습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돌보는 민간 구호 단체 중 하나였다.
한수영은 곳곳에 쓰러져 있는 환자들을 툭툭 걷어차며 소리쳤다.
“김독자 엄마! 김독자 엄마 손 들어봐!”
그 서슴없는 발길질에 멀쩡히 누워 있던 환자들이 인상을 쓰며 비켜났다. 사색이 된 유상아가 재빨리 뒤쪽에서 다가와 환자들을 수습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이봐요, 한수영 씨!”
유상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한수영이 질색하며 말했다.
“아아아, 잔소리 할 거면 저리 가.”
“너무 막무가내잖아요. 이 사람들은 환자라고요!”
“나도 환자야.”
눈살을 찌푸린 유상아가 결국 화를 내려는 순간, 구호소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환자들이 들이닥쳤다. 이계의 괴수들에게 부상당한 화신들. 대형 병동에서조차 감당하지 못한 인파들이, 이쪽 구호소에 강제로 떠맡겨진 것이다.
주변을 일별하던 한수영의 눈에 낯익은 여인이 보였다.
“이설화도 여기 있었네.”
의선 이설화.
유중혁의 동료였던 그녀는 이곳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진창이네 진짜······. 그거 알아? 쟤 원래 엄청 나쁜 년이 될 운명이었다는 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냥 알아. 김독자도 아는 걸 내가 왜 몰라?”
김독자를 들먹이는 한수영의 모습에 유상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유상아를 흘끗 보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김독자가 너무 많은 걸 바꿨어. 죽어야 할 사람도 살리고, 살아야 할 사람도 살리고······.”
“······예언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넌 어차피 말해도 몰라.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한수영이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품 속에서 꺼낸 다크 초콜릿을 하나 까먹었다. 초콜릿의 쓴맛이 입안에 한가득 퍼지자, 어쩐지 한수영의 말끝에도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녀석 때문에 미래가 너무 많이 망가졌어. 이야기는 마땅히 흐름대로 흘러가야 하는 법인데.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너도 독자도 ‘등장인물’과 별다를 바가 없었겠지.”
유상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수영아.”
김독자의 엄마, 이수경이 어느새 그들의 뒤쪽에 와 있었다.
“남이사 건강하든 말든.”
“우리 독자는 병약한 애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김독자가 뭘 좋아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빽 소리를 지르는 한수영의 반응에 이수경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군요 유상아 씨. 여긴 무슨 일이죠?”
유상아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한수영이 다시 끼어들었다.
“[길흉화복]을 좀 봐줘.”
[길흉화복(吉凶禍福)].
그것은 이수경이 배후성인 ‘시조의 어머니’를 통해 받은 [성흔] 중 하나였다.
“길흉화복이라······ 늘 자신만만한 것 같더니, 왜 갑자기 그런 잡기에 기대려는 거지?”
“나도 자신감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좋겠네.”
“아는 정보가 떨어졌구나. 그렇지?”
한수영과 이수경은 김독자와 다르다.
한수영은 원전과 ‘초반’이 흡사한 텍본을 가진 게 전부였고, 이수경은 김독자에게 들은 원전의 정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결국, 두 사람 다 불확실한 미래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상황.
이수경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꼭 나한테 올 필요가 있었니? 상아 씨도 <올림포스>를 통하면 비슷한 걸 할 수 있을 텐데?”
“농담이지? 김독자가 <올림포스>한테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잊었어?”
두 사람이 투닥대는 사이, 유상아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저는 당장은 도움이······.”
“신경 쓰지 말아요. 나도 <올림포스> 상황이 복잡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지금 한창 내분 중이죠?”
“······네.”
유상아가 자신 없는 눈치로 고개를 숙이자, 한수영이 말했다.
“얜 그냥 냅둬. 안 그래도 성흔 남발하는 바람에 수명 엄청 깎이는 중이니까. 것보다 빨리―”
뜻밖의 비호에 유상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런 둘을 보며 이수경이 빙긋 웃었다.
“좋아, 아가씨들. 알고 싶은 정보가 뭐지? 참고로 [길흉화복]으로는 구체적인 미래 전망은 알 수 없어. 오직 길과 흉에 대해서만 점칠 수 있을 뿐이야.”
알고 있다는 듯,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독자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고 싶어.”
“흐음······.”
이수경이 미묘한 눈빛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한수영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거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한반도가 개박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요즘 성좌들 통해서 자꾸 이상한 얘기가 들려와서······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빨리 점이나 쳐봐.”
“이미 오래전부터 쳐보고 있었어.”
“그래?······ 그래서 어느 쪽인데?”
이수경이 능글맞게 웃었다.
“글쎄, 어느쪽일까. 일주일 전에는 중(中)이었는데, 또 사흘 전에는 흉(凶)이었다가······.”
“뭐? 흉?”
“어제 잠깐 길(吉)이기도 했다가······.”
“지금은 뭐야 그래서!”
이수경은 말없이 자신의 품속에서 청동경(靑銅鏡)을 꺼냈다.
그것은 한반도 설화의 천부삼인 중 하나인 ‘천경(天鏡)’의 파편이었다.
“직접 보려무나.”
목소리에 담긴 심상치 않은 뉘앙스에,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시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초록빛 청동경 위에 희미한 글씨가 떠올랐다.
―대흉(大凶).
한수영은 순간 자신이 한자를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의심했다.
“이거 진짜야?”
“나도 모르겠어. 정 궁금하면 성운 <홍익> 한테 물어보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수경도 그리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천경의 표면이 일렁이며, 글씨가 변한 것은 그때였다.
“앗······? 조(助) 라고 뜨는데요?”
유상아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천경을 들여다보았다.
도울 조助.
너무나 명백한 의미였기에, 구태여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수경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둘 중 누가 갈 거야?”
*
[······역시 김독자는 김독자네. 어떻게 알았어?]
허공에 나타난 비형의 모습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잘 다듬어진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빼 입은 거적도 제법 질 좋은 천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깨비들은 꼬질꼬질한 호랑이 팬티만 입는다더니, 그 설화도 이젠 전부 옛말인 모양이다.
“한반도 채널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냐?”
[좌천된거지 뭐. 보면 모르겠어?]
“내가 없으니까 잘 안 되는 모양이네.”
[알면 빨리 돌아오든가.]
비형은 예전처럼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나와 녀석의 관계가 변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상 녀석과 나의 계약은 내 죽음을 통해 종료되었으니까.
비형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비형을 바라보았다.
[잘 지냈냐?]
“보다시피.”
[네 이야기 많이 들리더라.]
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내 채널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대우 잘 해줄 수 있는데.]
아마도, 비형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진심이기에 더욱 위험한 제안이었다.
“글쎄······.”
나는 이제 비형을 증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형과 손을 잡을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비형은 관리국과 끈이 닿은 도깨비고, 관리국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 중 하나이니까.
[하긴, 넌 원래 그런 녀석이었지.]
비형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도깨비들은 자신의 채널을 떠난 존재에게는 냉담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형이 적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시점이 빨리 올 것 같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럼 이건 어때? 나랑 공동 채널을 구축하자. 여기 ‘마계’에서 만이라도 좋으니까.]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진심이냐?”
[한 번 생각이나 해봐.]
사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비형과 공동 채널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비유도 비형의 곁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 그보다 지금은······.”
순간, 비형이 ‘도깨비 통신’으로 말해왔다.
―채널 꺼달라는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형은 척하면 척이다.
―뭘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잘 되길 빈다. 지금은 나도 일이 좀 있어서······ 나머지 회포는 나중에 풀자고.
왜 비형이 저렇게까지 호의적인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질 않았다. 어찌됐든 나로서는 다행이었지만.
비형이 설정을 바꿨는지, 다음 순간 채널에서 성좌들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채널 내의 모든 성좌들이 채널의 연결 상태에 불만을 품습니다!]
나는 곧바로 [제4의 벽]을 바라보았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오 래 보 지는 마」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해제되었습니다.]
내 세계를 둘러싸고 있던 장막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특성창’을 켰다.
[‘특성창’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막대한 양의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다.
+
<인물 정보>
이름 : 김독자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수식언(修飾言) : 구원의 마왕 (설화급)
전용 특성 : 라마르크의 기린 (전설), 마계 공작 (전설), 시나리오의 해석자 (???), ■■의 사도 (???)······.
.
.
+
지난 번에 제대로 확인 못했던 내 특성이, 이제야 정확히 보였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내 특성은 당연히 ‘독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나리오의 해석자’라고?
게다가 ‘■■의 사도’는 또 뭐야?
특성 등급은 왜 표기가 안 되는 건데?
[당신은 최초로 당신의 특성창을 확인하였습니다.]
[‘시나리오의 해석자’의 특성 효과가 발동합니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정보를 확인해 나갔다.
내가 제일 주의깊게 본 것은, ‘전용 스킬’이 있는 부분이었다.
+
전용 스킬 : [전지적 독자 시점 Lv.?], [책갈피 Lv.?], [등장인물 일람 Lv.?], [제4의 벽 Lv.?], [독해력 Lv.?]······.
+
본래는 ■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스킬들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독해력(讀解力).
얼핏 보기엔 단순히 뭔가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같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일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얻은 스킬들도 대부분 그랬으니까.
나는 무심결에 특성창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허공에서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특성창이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벌써 10초가 다 지난 건가?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으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귓가에 희미한 이명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머릿속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특성창을 건드린 손끝이 저려오고, 세상이 어지러워졌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넘을 수 없던 ‘벽’의 너머에서, 뭔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발동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뒤섞이고 있었다. 합쳐지지 않던 것들이 합쳐지는 광경. 그 끔찍한 기분 속에서, 잠깐이지만 나는 기묘한 합일감을 느꼈다. 마치, 그것만이 내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인 듯한 기분.
츠츠츠츠츳!
그리고 희한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김독자’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뭐······?
의식이 깜빡이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게, 오래 보지 말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