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251화
우리는 곧 유중혁 공단(구 세이스비츠)에 도착했다.
가는 내내 유중혁은 말이 없었고, 공단에 도착한 후에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X급 페라르기니]의 시동이 꺼지자마자, 유중혁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따로 행동하겠다.”
“······선발전 때는 올 거지?”
유중혁은 그저 짧게 고개만을 끄덕인 뒤, 간단히 발을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녀석이 뭘 하러 갔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확실한 건 당분간 녀석의 시야에 걸리는 모든 것이 부서질 것이란 사실이다.
“······안 잡아도 돼?”
장하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중혁이 내 말을 들을 걸 전제하고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었다.
유중혁은 ‘마왕 선발전’까지 무사히 살아 돌아와주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나는 자잘한 절차들을 무시하고 곧장 아일렌의 의회실로 향했다.
“오래도 걸리셨네요.”
간만에 만난 아일렌은, 바쁜 공단 업무에 수척해진 모양새였다.
안경을 밀어 올린 아일렌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 자료로 제출했다.
“공작님들 떠나신 이후로 다른 공단의 끄나풀들이 나타나서 고생을 좀 했는데······ 당원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어요.”
“당원?”
“유중혁 당. 몰라요? 아침마다 ‘나는 유중혁이다’를 외치고 돌아다니는 애들 있어요. 떠나시기 얼마 전에 창설된 건데······ 못 보셨나 보군요.”
그게 그놈들이었나? 젠장.
나는 가끔 그날의 환청이 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일렌도 자기가 한 말이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근에는 ‘징벌자’를 추종하는 무리도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 여자 정체는 밝혀졌어?”
“못 밝혔어요. 공작님들 떠난 직후에 그 여자도 갑자기 없어졌거든요.”
“없어져?”
순간 가슴 속에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스쳐갔다.
설마, 싶었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성립할 턱이 없다.
아일렌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난 왜 계속 당신한테 보고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이 공단 주인은 유중혁 공작인데.”
“누구한테 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공작께서는 이제 자기 공단으로 가셔야죠?”
그러고 보니 여긴 내 [공단]이 아니었다.
다시 마계로 돌아왔으니 김독자 공단(구 길로바트)의 현황을 살피러 가야 한다.
마르크한테 맡기고 떠났었는데,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나는 창 밖으로 비치는 [공단]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오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일렌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공작님.”
돌아보자, 나를 들여다보는 아일렌의 표정이 묘했다.
뭔가 시원섭섭한 것 같기도 했고,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천천히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멸살법’을 통해 아일렌을 학습한 나는, 그녀가 언제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아일렌은 잠시 품을 뒤적이더니 이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전에 부탁하셨던 거예요.”
상자 속에는 작은 시계가 들어 있었다.
아주 미세한 회로 작업을 통해 설계된 작은 회중시계.
손을 가져다 대자, 시계 위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시간의 감각 속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야기의 지평선, 혁명가 게임······.
닿지 않은 곳으로 물러난 모든 기억들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다시 아일렌을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양쪽 손목을 겹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중혁’ 공작님.”
양쪽 손목을 십자로 교차하며 겹치는 동작.
그것은 아일렌이 살았던 고향, [린드버그]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할 때 취하는 인사법이었다.
두 개의 맥박을 교차해, 상대방에게 그 진동을 전하는 것.
마치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아일렌의 맥박이 공기를 통해 내게 전해졌다.
“이 공단은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유중혁 공단]을 떠난 후, 나는 곧장 [김독자 공단]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리였지만, [X급 페라르기니]의 도약 엔진을 사용한다면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차의 조수석에 앉아 지나가는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아일렌이 남긴 말에 관해 생각했다.
―도깨비가 하나, 혹달린 불길한 족속이 하나, 성좌들도 몇몇 왔었어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를 찾아왔다는 이들의 목록이었다.
도깨비라면 아마 [관리국] 쪽의 녀석일 가능성이 높았고, 혹달린 족속이라면 당연히 혹부리를 말하는 걸일 테지. 성좌들 쪽은 수식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조심하세요, ‘마계’의 많은 강자들이 당신을 보고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채널에 흐르는 기류만 봐도 심상치가 않으니까.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 사이에 당신의 수식언이 퍼지고 있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이제 ‘마왕 선발전’까지는 사흘 남았다.
문득 뒷좌석을 보니, 장하영과 파천신군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파천신군도, 장하영도 그간 피곤했을 것이다.
특히 장하영은 나 때문에 무리하게 ‘정체불명의 벽’을 운용하기까지 했으니······.
그래도 저 녀석들이 있기에, 뭐라도 해볼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는 운전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명오 부장.”
“음?”
한창 [X급 페라르기니]의 기능을 이것저것 실험해보던 한명오가, 흠칫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한명오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인생이 쉽지 않지?”
······솔직히 타이밍이 좀 묘한 얘기였다. 자기도 말해놓고 뭔가 민망했는지, 한명오가 잽싸게 덧붙였다.
“내가 살면서 느낀 건데······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 딱히 아무것도 안해도 잘 풀릴 때도 있고, 뭘해도 더럽게 안 풀릴 때도 있는 법이지.”
뻔한 말이었지만, 한명오의 표정에는 제법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명오도 마계에 와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명오는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한명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든 물어보게.”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아이를 낳은 남자는 제법 믿음직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스마트 폰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할 말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한명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끙······ 많이 고통스러웠네.”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묻고 싶은 것 말일세. 남자든 여자든 견디기 힘든 고통이야.”
나는 한명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고 일순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딱히 그런 걸 물으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굳이 말을 한다니 궁금해지긴 했다.
“어디로 나온 거죠?”
“마음으로 낳았네.”
“아팠습니까?”
어느새 담배를 한 대 꺼내문 한명오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죽일 생각이었네.”
씁쓸하게 뱉어진 담배 연기가, 호를 그리며 창 밖으로 날아갔다.
“수치스러웠고, 치욕스러웠네. 어이가 없기도 했고,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
“······.”
“드라마에서 나오던 방법도 써봤네. 그 왜 있잖은가. 간장을 많이 먹는다든가 하는. 때가 때인지라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
한명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분명,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충이었을 것이다.
“무서웠네. 내가 낳은 녀석이 괴물이면 어떡하나. 이 녀석이 나를 잡아먹으면 어떡하나. 어느 날 갑자기 배를 찢고 튀어나와서, 나를 죽인다면······.”
“······.”
“홀로 무수한 밤을 지새고, 도망다니고, 괴수들을 피해 다니며 내겐 줄곧 그 고민뿐이었네. 이 녀석을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나,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낳아야 하나, 아니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았는데도, 한명오가 도망치고 또 도망쳤을 무수한 시나리오의 밤들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한명오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거 아나? 우습게도, 그걸 고민하는 동안 수 개월이 지났다네. 그걸 고민하는 동안, 나는 살아남았던 거야.”
한명오가, 이 장대한 시나리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때 문득 깨달았지. 아, 어쩌면 이 녀석이 나를 살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결심했네. 살리든 죽이든, 일단 낳아는 보자.”
툭, 하고 떨어진 담뱃불이 창밖으로 날아갔다. 한명오가 주섬주섬 새 담배를 꺼냈다. 그 짧은 사이, 한명오의 시선은 황망히 멀어졌다 돌아왔다.
나는 한명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최악의 인간 열 명을 꼽자면 반드시 그에 들어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한명오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예쁜 아이였어. 인간은 아니었지만, 내가 낳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말 예쁜 아이였지.”
“······저도 봤습니다.”
그 ‘아스모데우스’가 화신체로 삼을 정도로, 예쁜 여자아이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듯, 한명오의 입가에 몇 번이고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야기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명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한명오가 말했다.
“그러니 독자 씨도 해보게.”
“······출산을요?”
“아니, 독자 씨가 고민하는 거 말일세.”
순간 뜨끔한 기분이 되었다. 꺼진 스마트폰 화면으로 내 당황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난 독자 씨가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네. 솔직히 말해서 원래 독자 씨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알고 있던 바입니다.”
“그런데, 최근 독자 씨가 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 알고 있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겠지. 그래도 너무 연연하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게.”
“······.”
“뭐가 어떻게 되든 그걸 살아내는 것은 독자 씨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될 걸세.”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이 남자에게 공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의 액정에 ‘멸살법’의 파일이 보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2차 수정본).TXT
나는 한명오와 같은 경험은 없다.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고, 가질 예정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한명오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차 수정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
지난 몇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차지한 대부분의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 소설을 읽음으로 인해 내가 영향을 받을까 무서웠고.
내가 저지른 일들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괴로웠으며.
내 모든 ‘미래’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우스운 일이었다.
한명오 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이 이야기는 제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멸살법’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멸살법의 ‘2차 수정본’은 이번에도 4회차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3회차에서도,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스승은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떤 서술은 나를 안심시켰고.
「그럼에도, 바꿀 수 없었다.」
어떤 서술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 녀석은 이번 회차에 없다.」
유중혁의 ‘4회차’에는 여전히 내가 없었다.
「3회차는 실패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작가가 왜 이런 걸 내게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겁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이걸 보낸 게 정말 작가인지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치, ‘제4의 벽’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마치, 소설 속의 문장을 적듯이.
「당신이 무슨 결말을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결말이든. 나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결말을 만들 것이다.」
그 문장을 적으며,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반응한 것은 ‘제4의 벽’이었다.
[‘제4의 벽’이 즐거운 듯 꿈틀거립니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멀리서 [공단]의 정경이 보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김독자 공단]의 외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명오가 급격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네.”
시나리오? 그럴 리가······.
아직 ‘마왕 선발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히든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시겠습니까?]
한명오는 조심스레 차량을 우회하며 [공단]으로 접근했다.
공단의 입구는 한 명의 경비병도 없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창문을 열자, 공단의 안쪽에서 소리치는 말들이 가감없이 들려왔다.
“내가 김독자다!”
“아니다, 나다!”
“내가 김독자다! 나라고!”
나와 한명오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게임’이 진행 중입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 공단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