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248화 <스타 스트림>에서 ‘멸망 시나리오’는 크게 두 종류다. 첫 번째는 성운들로 인해 네임드화 되어, 일종의 신화(神話)가 된 대멸망 시나리오. ‘라그나로크’나 ‘기간토마키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멸망 시나리오’다. 지금 눈앞에서 열린 [그레이트 홀]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성좌가 아니군.” 휘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파천검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성좌가 아닌데 저런 기세를 풍긴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계의 신격들이다.” 쿠구구구구―! 이제 나도 성좌가 되었기 때문일까. 홀 너머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신격들의 힘을, 나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는 몇 번이나 저 녀석들의 일부를 마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맹인은 태양을 보아도 눈이 멀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성좌가 되었다는 사실이 싫어질 지경이었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왜 하필 지금 ‘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된 거지?” 이미 1회차와 2회차를 겪은 유중혁은, 나처럼 <제1 무림>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제1 무림>은 ‘이계의 신격’들에 의해 멸망한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본래라면 빨라도 몇 년은 더 지나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가 그 시점을 앞당겼다. 뭘까. 대체 뭐가 잘못 되어서······. ······잠깐만, 설마? 유중혁 또한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를 향해 물었다. “······내 생각이 맞는 건가?” “그런 것 같아.” 나는 긴장하며 대답했다. ‘멸망 시나리오’는 화신들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나리오. 꾸준한 개연(蓋然)의 획득으로 인해 누적치가 채워지지 않으면, ‘멸망’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츠츠츠츠츠츠! 그리고 이 ‘청룡성’에서, 최근 그만한 개연성을 촉발한 일은 하나 뿐이었다. 파천검성이 말했다. “무도 대회인가.” 무도 대회. 그곳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비롯한 여러 성좌들이 가세해 개연성을 지원했던 것이, 결국 재앙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당신을 싫어하는 소수의 성좌들이 즐거워합니다.] 빌어먹을 자식들. “김독자.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거냐?” 미식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유중혁이 내게 화를 냈다. 나로서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미 시작된 시나리오를 되돌릴 방법 따윈 없었으니까. [잠시 후 ‘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이계의 신격’이 습격을 준비 중입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비참가자들은 신속히 시나리오를 이탈하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메시지와 함께, 청룡성의 중심부 쪽에서 소란이 시작되었다. “미친! 저거 뭐야?” “도망쳐, 빨리!” 다른 시나리오들과 달리, ‘대멸망 시나리오’는 참여의 선택권이 있다. 우리처럼 서브 시나리오로 떠도는 화신들은 빠르게 지역 이탈을 감행하고 있었다. 무공 구결이 담긴 파일을 팔던 잡상인들도, 그 구결을 듣고 고수가 된 청룡성의 무림인들도······. 하늘 위에 홀이 나타난 순간 모두 표정이 달라졌다. 저 ‘홀’ 앞에서 인간이 칭하는 ‘고수’나 ‘하수’의 개념은 완전히 무의미했다. “뭐야, 무슨 일······.” 놀란 장하영과 한명오도 뒤늦게 장원 밖으로 뛰어나왔다. “탈출해야 되니까 빨리 준비해.” “헉······.” 숨을 삼킨 장하영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레이트 홀]을 뚫고 나온 거대한 촉수 다발들이 있었다. [피스 랜드], 그리고 [암흑성]에서 내가 마주했던 그 ‘이계의 신격’들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산 것 들 의 이 야 기를 탐 할 것 이 다】 음절들 사이로 배어 있는 지독한 존재감에 몸서리가 처졌다. 맥락에 깃든 어마어마한 탐욕에, 도망치던 고수들이 소변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으, 으아아아아아아!” 진언만으로도 산것들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거대한 혼돈. 나는 물론이고, 유중혁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지금 저런 놈과 맞부딪치는 것은 무리다. ‘이계의 신격’은, 약한 개체조차 성좌들을 우습게 짓밟는 힘을 가지고 있다. [꿈을 먹는 자]를 상대했을 때처럼 ‘제4의 벽’을 통한 요행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여기서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파천검성님.” 내가 파천검성을 바라보자, 파천검성도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이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에게, <제1 무림>은 고향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멸살법’에 쓰여 있던 문장들 뿐. 그리고 그 문장들에 의하면, 파천검성은 딱히 이곳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모두가 ‘고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제1 무림>은 그저 타락한 세계의 온상일 뿐이었다. 인정을 잃고, 협의를 잃은 세계. 「“무림이 멸망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무림은 멸망해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했던 파천검성이, 이곳에 남을 턱이 없었다. <제1 무림>은 이렇게 멸망할 것이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했다. “스승.” 유중혁이 어서 떠나자는 목소리로 채근했다. 그러나 왜일까, 파천검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산처럼 우뚝 선 파천검성은, 그저 고요히 서서 소로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동과 탈주로 혼란에 빠진 도시의 정경. 그리고 그 정경을 뚫고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인파. 하나 하나가 이미 초월을 바라보거나, 초월에 도달한 고수들. 그들의 전신에 어린 형형한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파천검성, 오랜만이오.” 청룡성의 세가주(勢家主)들이, 파천검성을 찾아왔다. * 그들이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계의 신격’들이 무림을 찾아왔고, 멸망은 예정되었다. 그리고 멸망 앞에 무림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달아나거나, 맞서 싸우거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은 전자를 택하겠지만, 오래도록 이곳에 남아 터를 잡은 화신들은 다르다. 세력을 쌓고, 부를 구축하고, 설화를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한 지역의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들. “파천검성.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좌에서 우로, 각자 제갈세가, 모용세가, 사천당문, 황보세가, 그리고 남궁세가까지. <제1 무림>의 주축을 이루는 다섯 세력의 수장들이 모두 이곳을 찾다니, 아마 무림사 전체를 통틀어도 드문 일일 것이다. 그들의 뒤쪽에는 거대 방파의 수장들도 끼어 있었다. “부탁하오, 무림을 위해 힘을 빌려주시오.” 남궁민영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답했다. “내 힘이 필요하다라······.” 그 서늘한 목소리에, 세가주들 중 몇몇이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가장 앞서 나선 것은 눈치 빠른 제갈가의 가주였다. “부디 우릴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알 만 했다. 현 무림 최고수를 자칭하던 빙화신녀가, 파천검성 당사자도 아니고 고작 그녀의 ‘제자’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의 격차로. 아마도 무도 대회의 충격은, 쉬운 길만을 달려가던 무수한 고수들에게 경각심을 주었을 것이다. 강림한 성좌조차 물리칠 수 있는 힘. 낡은 초월의 길에 고수들은 다시 향수를 품었고, 찾아온 무림의 위기에 고수들은 그 길의 정점에 오른 인물을 떠올렸다. “사백조 어른, 부디 후손들을 굽어 주십시오” 급기야, 파천검성 남궁민영의 본가였던 남궁가의 가주까지 가세했다. 헌앙한 얼굴의 중년인. 아마 저 자가 바로 십대 고수 중 하나인 남궁진천일 것이다. 비록 절반 뿐이지만 파천검성에겐 저 세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때문인지, 고고하던 파천검성의 눈빛도 한순간 흔들렸다.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내가 앞으로 나섰다. “우습군요. 파천검성님을 먼저 내친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까?” 보통이라면 이들의 공분을 사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을 ‘마왕 선발전’으로 함께 데려가는 쪽을 궁리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파천검성 쪽이 더 시급하다. “한심하게도, 처음 성좌들과 도깨비들이 이곳에 방문했을 때 당신들이 한 짓을 모두 잊은 모양이군요.” “무슨······ 그대는 누구냐?” 내 말의 진의를 깨달은 일부 세가주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마, 그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무림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던 파천검성이, 왜 몰락한 소로에서 장원을 여는 신세가 되었는지.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아는 유중혁만이, 내 말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은 비뚤어진 외골수지만, 협(俠)을 아는 자다. 세파에 휩쓸리지 않기에 남을 탓하지 않고. 명예를 추구하지 않기에 헛된 영욕을 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림인들에게 이용을 당하며 살았고, 결국엔 이곳에 버려졌다. 몰락한 무림의 상징으로 파천검성을 남긴 채, 세가주들은 자신들의 성을 쌓으며 무림을 집권해왔다. “남궁세가주,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사백조라······ 지금까지 당신은 한 번도 파천검성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그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이곳을 찾아올 수 없었을 텐데.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요. 파천검성이 왜 당신들 남궁세가와 결별하게 되었는지, 설마 모르는 겁니까?” 거신족과 인간의 혼혈로 태어난 아이. 어린 파천검성이 자라나며 겪었던 시련들을, 나는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 어쩌면 유중혁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어찌······!」 「거신족의 저주 받은 핏줄이다.」 파천검성은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그런 것들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녀는 의아할 것이다. 평소였다면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의문은 오히려 내게 이로웠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파천검성은 나를 따라올 테니까. “네놈이 뭘 안다고······!” “닥쳐라! 파천검성, 저 자는 대체 누구요!” 흥분한 세가주들이 나를 위협하며 다가오자,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뽑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걸 빌미로 이곳을 편히 뜰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화난 유중혁이 일갈을 터뜨리기도 전에, 갑자기 제갈세가주가 바닥에 엎드렸다. “파천검성, 지난 날의 잘못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빌어먹게도, 어느 세계에나 이런 똑똑한 녀석들은 있다. 갑작스런 제갈세가주의 행동에 다른 세가주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주는 체신도 체통도 모두 내버린 채, 간절한 얼굴로 파천검성에게 청하고 있었다. 마치 무림의 신(神)에게 기도를 올리듯이. “당신이 돕지 않으면 <제1 무림>은 멸망할 겁니다······!”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신의 동정을 요구할 수 있으되, 언제든 그 신앙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신도의 눈빛이었다. 그러자, 무림의 신이 응답했다. “한때는 작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었다.” 뜬금없는 말에, 제갈세가주가 고개를 들어 파천검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 작은 나무들은 모조리 뿌리 뽑히고, 그 땅을 차지한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만이 가지를 뻗어 하늘을 덮었구나.” 파천검성은 표정 없는 눈빛으로 청룡성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경쟁하듯 올라선 세가의 첨탑들이, 흉벽보다 높은 크기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하늘을 대신해 그들을 굽어 살피겠다는 듯이. 그제야 나는 파천검성의 말을 이해했다. “잎과 가지는 무성하지만, 이젠 고작 몇 그루의 나무 뿐인 것을.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그것을 여전히 ‘숲’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무림(武林)은 오래 전에 죽었다. 지금 막 파천검성은 그렇게 선언한 것이다. “그만 가자꾸나.” 무림의 신은, 고요히 등을 돌려 세계를 배반했다. 예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듯해서, 나는 만족하며 파천검성의 뒤를 쫓았다. 우두커니 나를 보던 유중혁도, 뒤쪽에서 만두를 챙기던 장하영과 한명오도 재빨리 짐을 챙겨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의 행동이 ■■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뭐?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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