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249화 2차 수정본 업데이트. 예상치 못한 시점에 들려온 그 메시지에, 나는 한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수정본이 또 나온다는 것은, 내 행동으로 인한 미래의 개변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즉, 1차 수정본을 받은 후 내가 쌓은 서사들이, 또 고스란히 모여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데 공헌을 했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3회차의 나는 성공했을까? 이번에도, 4회차에는 내가 없을까? 내가 바꾼 이야기로, 유중혁은 결말에 도달했을까? ······작가는, 대체 왜 내게 이런 걸 계속해서 보내주는 것일까?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진행 중입니다.] 아직 파일이 업데이트 되기 전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아니면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새로운 수정본의 향방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전개였다. “파천검성! 지금 달아나려는 거요? 당신이 살아온 이 세계를 모두 내버리고 도망가려는 거냔 말이오!” 내가 잠깐 ‘멸살법’에 정신이 팔린 사이, 고수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제일 크게 성토하는 것은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던 제갈세가주였다. “······달아나? 이 내가 말이냐?” “지금 이게 달아나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오!” “재미있구나, 아이들아.” 목소리에 깃든 짙은 조소. 그 목소리에 반응한 무림인들이 일제히 기합을 지르며 기세를 발출했다. 고오오오오! 하나하나가 <제1 무림>에서는 내로라하는 고수들. 거기에 세가주들의 마력까지 더해지자, 장원 일대에는 위협적인 지진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기세를 끌어올리는 세가주들을 향해, 파천검성이 진각을 내딛었다. 쿠우웅! “커허헉!”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파천검성의 진각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충격파는, 저쪽에서 발출한 지진파를 정확히 상쇄한 뒤 상대의 몇 배나 되는 마력으로 고수들 전원에게 내상을 입혔다. 모든 것이 간단한 발구르기 한 번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1 무림>의 재앙이라 불리는 파천검성의 힘. 핏줄기를 흩뿌리며 쓰러진 고수들이 원망스러운 눈길로 파천검성을 올려다보았다. “파, 파천검성!” “우릴 버리지 마십시오! 제발!” 이만한 힘이라면 분명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일까. 피를 토하는 무림인들의 표정에서는 절망보다는 오히려 희망의 그림자가 내비치고 있었다. 파천검성이 표정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사이, 하늘의 [그레이트 홀]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이제는 정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비유.” 허공에서 나타난 비유가 포탈을 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포탈이 있는 위치였다. 아무리 봐도, 우리 주변에 포탈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체불명의 벽’을 통해 배운 [백리안]으로 포탈의 위치를 확인한 장하영이었다. “······아무래도 포탈 열린 게 저쪽 같은데. 설마 광장까지 달려가야 하나?” 장하영이 가리킨 쪽에는 처음 우리가 청룡성으로 왔을 때 도착했던 광장이 있었다. 나는 비유에게 재촉했다. “비유. 이쪽으로 포탈을 옮겨줄 수 없어?” [바앙.] 비유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소속 도깨비는 이런 부분에서 힘의 제약을 받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유가 아직 어린 아기 도깨비라 그런 걸 수도 있고. 결국, 우리는 처음 통과해 온 포탈이 있는 곳으로 다시 움직여야 했다. 파천신군이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파천신군은 [X급 페라르기니]의 조수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타게나, 빨리!” 운전석에 탑승한 한명오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빠르게 차량의 내부로 탑승했다. “출발하죠.” 부아아아앙! [X급 페라르기니]의 마력 엔진이 굉음을 냈다. 우릴 쫓던 고수들이 경신법을 사용해 쫓아오는 것이 보였지만,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양산형 제작자’의 신작을 따라오기는 무리였다. 쿠구구구구구!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창 밖으로 <제1 무림>의 정경이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 [그레이트 홀]에서 운석 파편 같은 것들이 낙하하고 있었다. 그 충격파에 터져 나가는 상점가와, 불길에 휩싸인 무관들. 오대세가주가 이끄는 대형 첨탑들이, 하늘에 도전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무너지는 건물들이 붕괴하며 지축을 울렸다. 누군가는 붕괴된 건물에 깔렸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안고 울부짖는 무림인들이 있었고, 그런 무림인들을 끌며 달아나야 한다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리에 주저앉은 어린 아이들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마치 페이지를 넘기듯, 한 세계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말을 했다. 「“시나리오란 더 커다란 멸망을 막기 위한 작은 멸망이지.”」 얼마나 더 많은 멸망을 겪어야, 이 모든 이야기는 끝날 것인가. 고개를 돌리자, 파천검성과 유중혁도 나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도망가, 빨리!” “하지만······!” 창 밖으로 들려오는 젊은 무인들의 목소리. 파편에 맞아 외상을 입은 남녀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한명오가 먼저 브레이크를 밟았고, 장하영이 이어서 말문을 열었다. “······쟤들 태워주면 안돼?” 이 녀석이라면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한명오가 엑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전경이 다시 움직였다. 장하영이 희미한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얼마든지 자리 있잖아.” “우린 이 ‘시나리오’의 밖에서 온 자들이니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하지만 사부님도 여기 출신인데 우리랑 같이 나갈 수 있잖아.” “이 분은 좀 특별하고.” 나는 파천검성 쪽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파천검성은 ‘거신족’의 피를 이은 존재. 태생이 ‘무림’의 시나리오에서 출발하지 않은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도 다른 시나리오들을 받을 수 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무림인 남녀가 보였다. “저 사람들은 여기서 벗어나도 어차피 죽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시나리오만을 받아온 자들은, <제1 무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곳을 탈출한다면, 즉각적으로 ‘추방자 패널티’를 받아 소멸할 뿐인 것이다. 장하영의 표정에 무력감이 깃들었다. “그런······.” 장하영이 느끼는 기분을 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감정 속에 살아왔으니까. 어떤 세계의 위기 앞에,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세계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 뿐이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8분 남았습니다.] [멸망의 설화가 강림하고 있습니다.] 새카맣게 변한 하늘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레이트 홀]을 통해 나타난 촉수는 네 개를 넘어섰다. 커져가는 홀을 보는 것만으로 장하영과 한명오는 몸을 떨었고, 유중혁은 침음했다. 나 역시, 피부의 솜털이 바짝 서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저런 것엔 맞설 수 없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존재가 누구고. 내가 앞으로 얻어야 할 힘이 어떤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아마 저것도, [거대 설화] 중 하나겠지. 아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설화. 하나의 세계를 끝장내기 위해 강림하는 저 ‘설화’는, 지금껏 내가 알던 설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가 엾 은 시 나 리 오 의 노 예 들 아 도 망 칠 곳 은 없 다】 울려퍼진 진언에 청룡성의 모든 창문들이 박살났다. 【멸 망 은 너 희 를 뒤 쫓 을 것 이 다】 ‘양산형 제작자’의 차체조차 진언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5분 남았습니다.] “포탈이다!” 다행히, 우리는 제 시간 안에 포탈에 도착했다. 이제 탈출하는 것만 남았다. “갑시다.” 파천검성을 얻었고, 미식협에서의 데뷔도 그럭저럭 마쳤다. 코인도 충분히 쌓았다. 마무리가 찝찝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해결책이 없었다. <제1 무림>은 언젠가 반드시 멸망하게 될 세계였고, 그때든 지금이든 내가 그 멸망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 순간, 파천검성이 차에서 내렸다. “파천검성?”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을 읽지 않아도, 그녀의 생각은 알 수 있었다. [무림의 동도들은 지금 즉시 광장으로 집결하라.] 이계의 신격에 대항하듯 울려퍼지는 사자후(獅子吼). 성좌의 진언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내공이었다. 달아나던 무림인들이, 그녀의 목소리에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파, 파천검성!” “파천검성이다!” 일순간, 무림인들과 나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외쳤다. “잠깐만요!” 혼란스러웠다. 왜 파천검성이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설마 내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2차 수정본’이 지금 업데이트 되는 것은, 이곳에서 파천검성이 죽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진행 중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2차 수정본’은 오지 않았다. “파천검성! 함께 가야 합니다!” 이곳에 있으면 파천검성은 죽는다. 그러자 파천검성이 대답했다. “어린 성좌야, 한 그루의 나무는 숲이 아니다.” 몹시 불길한 서두로, 파천검성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몇 그루의 나무가 모여야 숲이 되는 것인지, 너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당연히 그런 생각 따위, 해본 적 없다. 대신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떨어지는 운석 속에 부러져 나가는 아주 작은 나무들이었다. 너무 큰 나무들이 덮고 있었기에,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아주 작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파천검성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잊고 있었다. 파천검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가진 협(俠)은, 너무나 공명정대하여 때로 다른 이들의 정의를 초라하게 만든다.」 모든 초월좌는 각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씩 존재하고, 파천검성에게 그것은 협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몇 그루의 나무를 숲이라고 부르지 않듯, 한 그루의 나무가 산사태를 막아낼 수도 없다. “약속을 잊으신 겁니까? 동족을 만나게 해 주면 저를 도와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킬 것이다.” 파천검성은 하늘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 온전한 ‘대멸망’이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가장 오래된 옛것’들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저 너머에 있는 것은 태고의 맥을 잇는 신격이었다. 적어도, 그때 나와 유중혁이 잡았던 [꿈을 먹는 자]에 준하는 녀석이 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저들을 막은 후, 너를 찾아 가겠다.” ······척준경의 삼검으로도 쓰러트리지 못했던 존재를, 파천검성이 이길 수 있을까? “스승!” 결국 유중혁이 나섰다. 하지만 파천검성의 태도는 완고했다. “떠나거라. 이번 회차의 가르침은 끝이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진솔한 말에, 파천검성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무척 매혹적인 말이구나.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46번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당신이 있어야······.” 그 한 마디로 ‘파천검성’이라는 존재가 유중혁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새삼 깨달았다. 파천검성이 유중혁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그런 제자가 기특하다는 듯이. 거대한 파천검성의 손이 유중혁의 머리를 뚜껑처럼 덮었다. “넌 혼자가 아니다.” 그 말을 하며 파천검성의 눈은 아주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의 멸망을 막는다.” 유중혁이 파천검성을 잘 아는 만큼, 파천검성 역시 유중혁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파천검성은 유중혁을 떠나 보낼 말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세계’의 멸망을 막아라.” “파천검성······!” “그만 가거라.” 유중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감정의 다발들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분 남았습니다.] 결국, 내가 유중혁을 잡아 끌었다. 나 역시 이렇게 떠나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선택을 한다면 3회차는 여기서 종말을 맞게 된다. “······가야 한다, 유중혁.” 망부석처럼 굳어진 녀석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결국 장하영과 한명오가 나섰다. 질질 끌린 유중혁이 차로 옮겨졌고, 파천검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제자들을 잘 부탁한다.” 차 안에 갇힌 파천신군이 컹컹 짖었다. 유중혁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도, 그만 가거라.” 언제나 누군가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녀는 이제 자기보다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재 미 있 는 피 조 물 이 있 구 나······ 너 는 누 구 냐?】 저 지고한 외신(外神)이 피조물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 어지간한 성좌들조차 기가 질려버릴 상황에, 파천검성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무림의 신.] 마치, 떠나는 자신의 제자에게 들으라는 듯. 오래도록 숲을 지켜온 고독한 거목이, 하늘을 향해 자신을 말했다. [파천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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