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247화
Episode 47. 마왕 선발전
미식협에 다녀온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마왕 선발전’ 까지 남은 시간은 나흘 남짓.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유중혁이 손에 넣은 [흑천마도] 외에도, 아직 무림에는 꽤 쓸만한 히든 피스들이 더 남아 있었다.
나는 ‘멸살법’의 1차 수정본을 열어 히든 피스를 챙길 수 있는 서브 시나리오들을 뒤적거렸다.
그동안 틈틈이 수정본을 읽어서 중요한 부분들은 대강 살폈지만, 여전히 빠뜨린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자마자 되게 바쁘네.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비추고.”
품에 맞지 않는 큰 소매의 무도복을 걸친 장하영이 30분째 종종걸음으로 나를 쫓아다니며 궁시렁거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녀석을 노려보다가 물었다.
“넌 훈련 안 하냐?”
그러자 장하영이 입술을 샐쭉 내밀며 대꾸했다.
“······나 열심히 하고 있거든?”
“열심히는 무슨. 만두만 처먹고 있던데.”
“너도 만두만 처먹으면서 폐관 수련 한번 해볼래?”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가 싶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너 대회에서 3등 했다며? 별 일이네.”
흠칫 어깨를 떨던 장하영이 짐짓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말했다.
“별 것도 아니던데?”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다.
뭐 때문에 그렇게 쫓아 다녔는지 알겠구만······ 솔직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
“상품은 받았어? [마혼단]이었지?”
“응.”
“줘봐.”
“왜?”
장하영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빼앗아가려는 거 아냐. 어차피 너 그거, 그대로는 못 먹잖아.”
어두운 표정을 보니 유중혁에게도 이미 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흑천마도]를 뽑으며 이런 식의 이야기를 떠들었겠지.
「그걸 그냥 먹으면 주화입마에 걸려 전신의 혈도가 모두 터져 죽는다. 여기서 그 ‘마혼단’을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장하영이 이렇게 질색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싫으면 안 줘도 돼. 네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거니까.”
아직은 신뢰 관계가 충분치 않으니, 장하영이 나를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장하영이 작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건 아냐. 어차피 너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했을 거니까.”
톡,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 작은 환약 한 알이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제1 무림>의 3대 영약 중 하나, [마혼단]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봐.”
이 거무튀튀한 약은 과거 혈마교에서 1000명에 달하는 고수의 혼백을 정제해 만들었다는 끔찍한 전사(前史)를 가진 약이었다.
단 한 알로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하고 초일류의 공력을 얻을 수 있지만, 혼백들의 저주로 인해 복용자를 마기에 찌든 광인으로 만든다는 저주받은 환약.
유중혁이야 본래부터 맛이 가 있는 녀석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장하영은 이걸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어디 보자······.”
하지만 어떤 시나리오든 꼼수가 있듯, 저주받은 아이템이라고 해서 사용하지 못할 건 없다. 실제로 ‘멸살법’에서도 비천호리가 이 환단을 흡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 알의 대환단(大還丹)만 있으면 돼. 결국 모든 건 균형과 조화야. 마기가 문제라면 정기를 공급하면 되는 거지.」
세 알의 [대환단]을 [마혼단]과 함께 빻아서 섭취하면, 저주를 피할 수 있다.
말은 쉽다.
문제는 [마혼단]과 함께 3대 영약으로 손꼽히는 [대환단]을 대체 어떻게 구하냐는 것인데, 사실 나한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비유.”
나는 비유를 불러 [도깨비 보따리]를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추천 상품] 목록에 [대환단]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도깨비 녀석들 빅 데이터는 무서운 데가 있다.
+
[추천 상품 목록]
* 대환단 ― 200,000 C / 재고 : 5
+
20만 코인이라.
평소였다면 고민 좀 할 가격이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일부러 화면을 공개 상태로 전환한 채 상품을 구매했다.
[6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대환단’ 3개를 구매하였습니다.]
그러자, 채널 메시지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과소비를 부러워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대환단의 성능을 궁금해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대환단의 성능을 알려준다면 500코인을 후원하겠다고 말합니다.]
“유, 육십만 코인?!”
지나가던 한명오가 개밥그릇을 든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 파천신군의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자네······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네만.”
“마침 잘 됐네요. 이것도 가져가서 좀 빻아 주세요.”
“이, 이건 뭔가? 영약 같은 건가?”
“괜히 호기심에 드시진 말고요. 잘못 먹으면 마왕의 저주에 걸릴 겁니다.”
마왕의 저주라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진 한명오가 내게서 환약들을 받아 재빨리 갈아왔다. 네 알의 환단은 고운 가루가 되어 있었다. 나는 장하영을 향해 불쑥 그릇을 내밀었다.
“나 가루약 못 먹는데.”
“이번만 참아. 코 막고 물이랑 같이 삼켜.”
“근데······ 이거 내가 먹어도 돼?”
“나나 유중혁은 먹어도 크게 도움이 안 돼. 하지만 넌 다르지.”
유중혁은 [마혼단]을 먹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만큼의 마력 운용 체계가 잡혀 있을 것이고, 나 같은 경우는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있다. 하지만 장하영은, 한창 마력 부족에 시달리는 중일 것이다.
장하영이 계속해서 머뭇거려서, 내가 말했다.
“안 먹을 거면 내놓든가. 하여간 배짱이 없어.”
“먹을 거야!”
호로록 약을 입에 털어 넣은 장하영이 물과 함께 쓴맛을 삼켰다.
장하영이 그릇을 내려 놓자, 주변에서 기회만 보고 있던 파천신군이 달려들어 그릇을 열심히 핥았다.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장하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별 느낌 없는데?”
“효능은 내일 쯤 나타날 거야. 체내에서 환약의 기운이 어우러질 시간이 필요하니까.”
알아 들었다는 듯,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한명오가 재차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이보게, 독자 씨.”
그쪽을 돌아보자, 뭔가 예상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혹시 이 차는······ ‘미식협’에서 받은 건가?”
그가 말하는 ‘차’란, 장원의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X급 페라르기니]였다.
암흑 차원의 단층조차 가로지를 수 있는 늘씬한 검은색 차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양산형 제작자’의 말이 떠올랐다.
―적을 너무 만들지 말게.
내가 아는 ‘성좌’들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는 성좌였다.
이 차를 공짜로 줬다면 더 괜찮은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
“미식협이 무슨 자선 단체라고 저런 걸 주겠습니까. 리스로 산 거예요.”
“리스? 어, 얼마에······.”
“한 달에 5만 코인이었나.”
“5, 5만 코인? 자네 대체 코인을 얼마나 번 건가?”
“대충 480만 코인 정도요.”
480만 코인이라는 말에 장하영과 한명오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장하영이 물었다.
“저기······ 넌 화신 더 안 구해?”
“왜, 내 화신 하게?”
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장하영이 소리쳤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리고 난 이미 정해둔 성좌 있거든?”
“성좌? 누구?”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장하영을 꼭 화신으로 거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장하영이 이 시점에 엉뚱한 성좌를 배후성으로 고른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런데, 장하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구원의 마왕.”
“뭐?”
“난 꼭 그 사람 화신 할 거야.”
강렬한 눈빛을 불태우는 장하영을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 싶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장하영은 아직도 내 수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다.
원작에서는 눈치 하난 끝내주는 녀석이었는데······,
아니, 애초에 내가 ‘구원의 마왕’일 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문득 이 녀석을 놀려주고 싶어졌다.
“걔가 너 받아주긴 한대? 연락은 해 봤냐?”
“아직······.”
얼굴을 붉히는 장하영을 보니,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뭔가 복잡한 기분이다.
지켜보던 한명오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설마 아직도 저 친구 수식언을 모르는 건가?”
“몰라, 아저씬 알아?”
내가 채 말리기도 전에, 눈치 없는 한명오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가 바로 ‘구원의 마왕’일세.”
*
그 후 이틀 간, 장하영은 나를 피해 다녔다.
평소에는 게으름 피우기 바쁘던 녀석이 갑자기 무공 수련이랍시고 연무장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덩달아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은 혼자 연무장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유중혁이었다.
“또 쓸 데 없는 짓을 한 모양이군 김독자.”
“······별 거 아냐.”
유중혁은 별 대꾸 없이 [흑천마도]로 휘휘 바닥을 긁으며 연무장을 나갔다. 저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동작인데······ 자식, 새 칼 생겼다고 아주 신난 모양이다.
연무장에서는 장하영이 더미를 두들기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내가 밤마다 이불에 발차기를 하던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누가 성좌 아니랄까봐, 훔쳐 보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구나.”
돌아서자, 그곳에는 초장신의 여자가 서 있었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파천검성이 말했다.
“‘님’을 붙이지 않으면 궁둥이를 때려주겠다.”
“······파천검성님.”
고작 단어 한 음절 때문에 유중혁 꼴이 될 수는 없다.
“타르타로스에는 다녀 오셨습니까?”
“아직. 하지만 네녀석 덕분에 ‘명계의 여왕’과 약속을 잡았다.”
“다행이군요.”
곧 동족을 만날 거란 기대 때문일까, 파천검성의 무표정한 얼굴에 언뜻 온화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나마 그녀를 얻은 것이, 이번 여정의 수확이었다.
파천검성은 ‘멸살법’ 전체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강함을 지닌 초월좌.
그녀만 있다면, ‘마왕 선발전’도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허(許)한다.”
“왜 장하영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신 겁니까?”
“녀석은 재능이 있다. 잘 갈고 닦으면 새로운 종류의 초월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어.”
무슨 말인지는 안다.
아마 파천검성도 장하영에게 깃든 ‘벽’을 느꼈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이유가 안 된다.
“저 녀석이 남자라는 건 아실 텐데요.”
본래 [파천검도]는 여성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다.
유중혁은 어떻게 예외였다고 해도, 이 비인부전의 무공이 이렇게 많은 제자를 둔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아직 애송이로군. 설화에는 본디 하나의 해석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어쩌면 파천검성은 장하영이 전생에 여자였다는 걸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
파천검성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그때였다.
“예전에 알던 사내 놈이 생각났다.”
“사내요?”
“그래, 사내.”
그 순간 나는 파천검성이 말한 ‘설화에는 본디 하나의 해석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
‘사내’라는 말 하나에 과연 저 ‘사내’가 애인을 말하는 것인지 그냥 남자 사람 친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토록 혼동이 오는 걸 보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 ‘파천검성’한테 애인 따위가 있을 리가.
“아주 잘 생긴 녀석이었다.”
원작에서도 파천검성이 ‘사내’의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혹시 장하영이 그 전 애인이랑 닮았다든가······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일부러 장난치듯 말해본 건데, 뜻밖에도 파천검성은 진지하게 답했다.
“잘 생긴건 닮았지.”
이쯤 되니 혹시 유중혁을 받아줬던 것도 그냥 잘 생겨서 그랬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내 실망감은 아랑곳 않고, 파천검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주 잘 생겼지만, 너무 작아서 가엾은 녀석이었지.”
“······작다고요?”
나는 순간 그게 고도의 전 남친 까기일까 아닐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경악했다.
‘멸살법’에서 파천검성과 인연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중에서 ‘작다’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
아니, 잠깐만.
설마 그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았던 게······.
쿠구구구구!
바깥에서 굉음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장원을 비롯한 청룡성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와 파천검성이 동시에 연무장 밖으로 뛰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도 이쪽을 보았다.
“김독자.”
하늘에, 시커먼 소용돌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소용돌이였다.
시나리오에 ‘재앙’이 나타났을 때만 열리는 저주 받은 배출구.
유중혁이 낮게 침음하며 말했다.
“······[그레이트 홀].”
‘재앙 시나리오’는 본래 초반 시나리오 지역에만 나타나는 것.
<제1 무림>에 뜬금없이 ‘재앙’이 출현할 리 없었다.
20번대 이후의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재앙’이 출몰하지 않으니까.
그런 지역에서, ‘홀’이 열리는 경우는 오직 하나 뿐이다.
“······도망쳐라.”
<제1 무림>에, ‘대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