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246화 [보유 코인 : 5,490,875 C] 끝없이 올라간 코인은, 마침내 정점을 찍고서야 멈춰섰다. 나는 그 믿을 수 없는 숫자에 몇 번이고 눈을 의심했다. [······젊은이, 얼마 벌었나?] 곁을 돌아보니, 멍한 얼굴의 ‘양산형 제작자’가 보였다. 이 영감님도 아까 15만 코인을 걸었으니, 분명 상당한 수입을 거뒀을 것이다. 나만 해도 최소 5배의 배당인 셈이니······.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부러워합니다!] [성좌, ‘심장을 노리는 고리대금업자’가 당신의 코인을 탐냅니다!] 늘 고고한 표정을 짓던 페르세포네조차 입 꼬리를 실룩이고 있었다. 참고로 명계의 여왕님은 30만 코인을 걸었다. ······명계도 한 몫 톡톡히 챙겼겠는데?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우리 셋을 제외한 대다수의 성좌들은 크게 절망한 얼굴들이었다. 표정만 봐도 다들 얼마나 코인을 걸었는지 알 만 했다. 심심풀이로 소액의 코인을 걸었던 성좌들은 그저 아쉽다는 표정들이었지만, 10만 코인 이상 걸어댄 성좌들은······. [으아아아아아!] 분노로, 맛이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파산할 정도로 걸어댄 성좌도 있는 모양이었다. 예컨대, 저 녀석.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당신을 향해 엄청난 적의를 드러냅니다.] 쿠구구구구! [저 놈 잡아!]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비롯한 코인을 잃은 성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코인과 함께 이성마저 잃어버렸는지, 당장이라도 나를 한강물에 처박을 기세였다. 눈치를 보던 성좌들이 내 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은 성좌도 있었다.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였다. [다들 물러서세요. 대체 어디까지 추해질 셈인가요?] 차가운 밤공기를 연상시키는 ‘격’이 울리자, 다가오던 성좌들도 주춤거렸다. 하지만 몇몇 성좌들은 밤바람 정도로는 식힐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명계의 여왕! 지금 코인 좀 땄다고 그러는 거요?] [당신한텐 볼 일 없으니 비키시오!] 분위기가 격앙되자,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고위급 성좌들도 끼어들었다. [모두 예의를 지키세요.] 페르세포네와 친분이 있는 ‘새벽 별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이미 눈깔이 돌아가버린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예의? 예의는 쥐뿔······!] 코앞까지 다가온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격’을 발출하자, 다른 성좌들도 동시에 ‘격’을 터트렸다. 허공에 터져 나온 강력한 스파크와 함게 ‘격’의 충돌이 예고되려는 바로 그 순간. [성좌 ‘구원의 마왕’이 사용한 소원권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츠츠츠츠츳! 홀 전체를 뒤덮는 눈부신 스파크가 튀며, 흥분한 성좌들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다들 주춤거리는 사이, 홀의 천장에 포탈이 열렸다. 포탈 너머에서 불길한 아우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그에 못지 않은 엄청난 것이 있음은 분명했다. 누구지? 이 정도면 분명 최고위급 성좌나······. 쿠구구구구······. 대기를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낯선 존재가 포탈을 뚫고 나왔다. 현묘하기 짝이 없는 아우라를 온몸에 휘감은 존재. 그러나 그 존재는 신격도, 성좌도 아니었다. 마술사 같은 시커먼 복장에, 고풍스러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사내. [······대도깨비?] 대도깨비였다. [오랜만이군요, 성좌 여러분.] 단 한 마디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강압적인 침묵이었다. 격을 발출하던 성좌들도, 소리를 질러대던 성좌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스타 스트림>의 규율이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을 속박합니다.] 츠츠츠츠츳! 이 자리의 모든 성좌들은 속박할 수 있을 정도의 개연성. 아무리 채널의 운영권을 가졌더라도, 보통의 도깨비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 으으어······.] 고위급 성좌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던 ‘성급한 늪의 포식자’조차,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원작에서 저 도깨비의 묘사를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화신들은 도깨비의 계급이 네 가지 뿐이라 생각한다. 하급, 중급, 준상급, 그리고 상급. 하지만, 그들 위에도 도깨비들은 존재한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을 거느리는, 십이 색의 뿔을 가진 도깨비들의 수좌(首座)들.」 도깨비의 머리에 돋아난, 일곱 개의 붉은색 뿔. 이 <스타 스트림>은, 그들을 ‘대도깨비’라 부른다. [죄송하지만, 파티는 여기서 끝입니다.] * 한창 ‘멸살법’을 읽을 적, 나는 성좌들과 도깨비들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도깨비들이 아무리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위급 성좌 쯤 되면 도깨비 한두 마리 쯤 쳐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만한 힘을 가진 성좌들도, ‘도깨비’만큼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리 짜증나는 시나리오를 열더라도, 결코 도깨비를 죽이는 법은 없다. ······왜냐고? 그 이유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츠츠츠츠츠!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미식협’ 전체를 옭아매는 개연성의 그물이 펼쳐졌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밀도 높은 스파크. 이 또한 ‘설화’의 힘이었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에게서 빌린 ‘설화’. 설화급이든 위인급이든, 여기서 나가려고 하면 이 스파크의 폭풍에 휘말려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목요일의 천둥’이나 ‘새벽 별의 여신’ 같은 고위급 성좌들 조차, 한껏 불쾌한 기색만 내비칠 뿐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페르세포네였다. [대도깨비 ‘하롱’. 오랜만이군요.] 그러자 대도깨비가 이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간만입니다. 명계의 여왕.] [‘이야기의 왕’께서는 잘 계신가요?] [왕께서는 무탈하십니다.] 상대가 상대이기 때문일까, 페르세포네의 표정에도 이제껏 찾을 수 없었던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거죠? 게다가 집행부의 도깨비들까지 이끌고······.] 언젠가 보았던 [집행부]의 도깨비들이, 대도깨비의 배후에 전열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무시무시한 기세는 ‘미식협’의 성좌들 못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집행부의 도깨비들은 언젠가 ‘성좌’였던 존재들이니까. 대도깨비는 페르세포네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조용한 눈으로 성좌들을 쓸어 보았다. [‘코인’을 대출해가신 성좌님들을 좀 모셔가야겠습니다.] [······코인?] 그 순간, 신음을 흘린 몇몇 성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양산형 제작자’가 이해했다는 둣 중얼거렸다. [정말 미련한 자들이로군······.] 아무래도, 이번 도박판에 끼기 위해 도깨비들에게 코인을 빌린 성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습게도, 개중에는 ‘성급한 늪의 포식자’도 끼어있었다. [으으으······ 비켜, 비켜라!] 그는 대도깨비가 펼친 개연성의 그물을 찢기 위해 스파크가 튀는 벽으로 달려들었다. 츠츠츠츠츳! [끄아아아아악!] 대도깨비의 그물은 강력했다. 스파크의 그물에 손이 닿는 순간,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달려든 집행부의 도깨비들이 그의 화신체를 간단히 구속했다. [놔라, 이거 놔!] 줄줄이 엮여 나가는 성좌들을 보며, 나는 왜 하필 지금 이곳에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일지 생각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 ‘소원권’의 개연성이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세계에서 도깨비는 ‘개연성’에 가장 예민한 종족이니까. 순식간에 모든 채무좌(債務座)들을 구속한 대도깨비가 포탈 너머로 그들을 이송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엔 볼 일 따위 없다는 듯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인사도 남기지 않은 대도깨비는, 그저 몇몇 성좌들을 경고하듯 노려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런데 포탈이 닫히려는 마지막 순간, 대도깨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눈동자 너머로,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거라, 아가야. ‘왕’께서 너를 보고 계시니.」 * 대도깨비가 다녀간 후, 미식협은 폐회했다. 파티가 그런 식으로 끝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각자의 별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연회 홀이 혼란한 틈을 타, 조용히 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상당 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으로 끌려갔지만, 여전히 내게 적의를 보이는 성좌들도 남아 있었다. 그러니 녀석들이 내 뒤를 캐려하기 전에 이곳을 뜰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오로성의 입구에서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어떻게 돌아가지? 안내인도, 마차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자칫 다른 성좌들에게 붙잡힐 수도 있는데······. 그때, 성의 모퉁이에서 엔진 소리와 함께 뭔가가 달려왔다. 말끔한 유선형의 몸체를 가진 고급 스포츠카. ‘SSS급 페라르기니’를 연상케 하는 자동차였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차를 만든 게······.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스포츠카가 내 앞에 멈춰섰다. 창문이 열리자, 허허로운 백발에 선글라스를 걸친 노인이 나타났다. [타게, 젊은이.] ‘양산형 제작자’였다. * 뒷좌석을 여는 순간, 차체는 중심이 길어지며 리무진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는 그 기묘한 광경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거라면 몇 명이든 탈 수 있겠는데? 혹시 이 차도 팔려나? 이제 돈도 있겠다······. 탄탄한 방마(防魔) 소재로 만들어진 차체는,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준수했다. 나는 리무진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티를 쪼록 마시며 차 안 곳곳을 살폈다. 운전석에는 ‘양산형 제작자’가, 그리고 조수석에는 ‘페르세포네’가 앉아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아까부터 누군가와 통신을 나누는 중이었다. 어쩌면, 아까 나타난 ‘대도깨비’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양산형 제작자,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흐음, 뭔가?] “······왜 이 여자가 같이 있는 겁니까?”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자 ‘양산형 제작자’가 히죽거렸다. [허허, 갈 때 태워주기로 약속했었네. 너무 싸우지들 말게.] 몹시 불쾌한 상황이었지만, 차도 얻어 타는 마당에 불평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동행인들을 살폈다. 뒷좌석에는 나를 포함한 아스가르드 3인방이 타고 있었다. 지쳐 쓰러진 이리스와, 기절한 셀레나 킴까지. 그들의 상태를 살피던 안나 크로프트가 문득 내쪽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돕지 않았어도, 이리스는 살았을 겁니다.” “알아. 아마 ‘목요일의 천둥’이 살려줬겠지. 안 그래?” 내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누구보다 잔인한 여자지만, 자신의 것이 된 ‘사람’만큼은 잃지 않는다. 실제로 원작에서 안나 크로프트가 벌인 비슷한 이벤트에서도, 안나의 동료들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나리오를 통해 각성의 계기를 얻었을 뿐······. 죽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리스가 좋은 배후성을 얻을 기회였는데, 당신이 다 망쳤습니다. 내가 본 미래는 결코 이렇지 않았는데······.” “그 애도 그딴 식으로 배후성을 얻고 싶진 않았을 거야.” “성좌인 당신은 모릅니다.” [쯧쯧. 사이 좋게 지내라니까, 안 되겠구만.] 리무진의 형태가 변하더니, 내 좌석이 괴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시야가 한바퀴 도는가 싶은 순간, 나는 어느새 페르세포네가 있던 조수석으로 와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나와 페르세포네의 자리를 바꾼 것이다. 떽떽거리는 게 듣기 싫었던 모양인지,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방음벽까지 세워져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성좌들 뿐만 아니라 화신들과도 사이가 나쁘군 그래. 너무 적을 많이 만들지 말게.] “저도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나는 여기에 적이 아니라 ‘동료’를 구하러 왔다. 결과적으로는 이 모양 이 꼴이 지만······. ‘양산형 제작자’는 품 속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가진 설화에서는 분노가 느껴져. 이 세계와, 성좌들에 대한 강한 분노가.] 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오늘 못 볼 꼴을 많이 봤다는 걸 아네.] “그렇지도 않습니다.” ‘양산형 제작자’가 허허 웃었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꺼진 화면 같은 어둠이 차의 전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 어둠을 고요히 응시하던 ‘양산형 제작자’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슬픔 같은 것이 스쳤다. [그래도, 그들을 너무 미워하진 말게.]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나온 말이었기에,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모두,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것 뿐이니까. 쓰레기 같은 성좌든, 고귀한 성좌든······ 모두, 그저 ‘이야기’가 좋아서 저러고 있는 것 뿐일세.] 설마 ‘양산형 제작자’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묘한 배신감 같은 것이 가슴 속을 덥혔다. “그렇다고 화신들의 삶을 짓밟아도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자기 ‘시나리오’를 하면 된다. 남의 시나리오를 망칠 게 아니라, 다음 ‘시나리오’로 나아가면 된다. 다른 ‘시나리오’에 눈길을 돌리고 정신을 파는 것은, 그저 현실을 도피하는 일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스마트폰이 켜지며 ‘멸살법’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읽던 문장들이 출력되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 문장들을 보고 있자,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자넨 늘 그걸 보고 있군 그래. 빈 메모장에 뭐라도 쓸 참인가?] 나는 그 물음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이걸 보면 마음이 안정되거든요.” 멀리서 암흑 차원의 긴 어둠이 밀려나는 모습이 보였다. 텅 비어있던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갈 시간이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