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242화 이곳에 모인 성좌들의 숫자는 총 열 명. 나머지 넷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시나리오 지역 어딘가에 흩어져 있겠지. [양보하지 않겠다면.] [너도 먹어 치워 주마.] 성좌들의 진언이 [악령]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전용 스킬, ‘백청강기 Lv.8’을 발동합니다!] 마력의 실체는 내 것이 아니라 이리스의 것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화신인 만큼 이리스 본신의 저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새하얀 백청의 힘이 [에오렌의 검]에 더해지자, 검의 기세는 한층 더 풍부해졌다. 기이이이잉! 에오렌의 검은 10분 동안 [악령]에게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검. 하지만,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쪽이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내 검격에 한 성좌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 느리구나! 어린 성좌여. 어디 이 노괴들을 즐겁게 해 보아라!] [노괴라니. 나는 아직 500년밖에 안 살았다고. 그리고 저놈이 더 늙었을지도 모르잖아.] 어린 여자아이의 몸에 빙의한 것이 처음인 까닭일까. 검은 어설픈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을 뿐이었다. 고작 일 할의 힘만을 사용하는 성좌라 해도, 성좌는 성좌다. 상위의 위인급에서부터 하위 설화급에 이르기까지. [악령]이 되기 위해 모인 성좌들이 격을 발출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무려 열 명의 성좌가 기세를 내뿜자 이리스의 움직임이 삐걱거리며 굳기 시작했다. 투명한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이리스의 몸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함정을 파놓은 거미들이 히죽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파르르르르······.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떨리는 이리스의 몸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얕보지 마라. 나 역시 성좌다.] 아직까지 나는 ‘제대로’ 격을 발출해 본 적이 없다. 마계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내내 나는 줄곧 반병신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미식협의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꾸준히 설화를 회복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일백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그에 거의 준하게 ‘격’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츠츠츠츠츠츳! [성좌의 ‘격’을 발출합니다!] 당신이 가진 설화중 일부가 상황에 반응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역사급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가 주변의 억압에 반항합니다!] [전설급 설화,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리스의 상황에 반응합니다!] 주변의 땅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인근의 수림이 흉포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쿠구구구구구! 일대에 치는 스파크의 범람에 성좌들은 경악한 모습이었다. 이 시나리오에 강림한 성좌는 본래 힘의 ‘일 할’ 만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강림’이 아니라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 현현한 상태였고, 때문에 본래의 ‘격’을 온전히 방출할 수 있었다. [어떻게 신입이 이런 ‘격’을······!] [······이게 정말 ‘강림’ 상태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성좌들은 거의 기겁한 모습이었다. 지금 놈들은 이 ‘격’을 내 본래 힘의 일 할이라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일부러라도 무리하고 있는 이유였다. 츠츠츠츠츠! [꺼지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지금 제대로 착각하게 해 둬야, 이 일이 끝난 후에도 놈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을 테니까. [저, 저 건방진 놈이······!] [······과연 <스타 스트림>은 넓군.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난 거지?] 내 기세에 위축된 성좌 몇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반대로 더욱 열의를 불태우는 녀석도 있었다. [크하하하핫! 최고의 요리로군. 오늘의 미식협은 최고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성좌. [악령]의 팔이 쭉 늘어나며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지만, 우습게도 검은 코앞에서 다가오는 팔조차 베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 미안해요! 전 검술은 영 꽝이라······!’ 제길. 그래서 움직임이 이렇게 굼떴던 거였나. 상처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리스의 팔꿈치에서 피가 튀었다. 내 움직임에서 뭔가 낌새를 느낀 것일까. 주춤거리던 성좌들의 기세가 변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슈가가가가각! 일제히 산개한 성좌들이, 제각기 [악령]의 몸뚱이를 이용해 산만한 공격을 가해왔다. 나는 어떻게든 검을 휘둘러 수세를 극복하려 했지만 이리스의 검술 숙련도가 너무 낮아서인지 쉽지 않았다. 유중혁의 몸에 빙의했을 때와는 천차만별의 결과. 새삼 유중혁이 얼마나 대단한 화신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군. ‘격’만 높은 녀석일 뿐이야. 해치워!] [검에 스치지만 않으면 돼. 하하하, 오늘은 포식이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가각! 푸슛! 곳곳에서 [악령]의 공격들이 날아들었다. 다리 사이를 스쳐가는 작은 낫. 한 바퀴를 선회하며 뒤를 노리는 부메랑. 옆구리의 빈틈을 찔러오는 긴 창극까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리스의 몸은 생채기와 멍으로 뒤덮였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다급히 [책갈피]를 사용해 [바람의 길]을 열었으나, 그것마저도 이리스의 몸으로는 사용감이 어색했다. 결국, 얽힌 발걸음이 꼬여 기세는 흐트러졌다. 짧은 틈을 노리고, 처음으로 달려들었던 성좌가 팔을 뻗었다. “큿······.” 목덜미를 잡힌 이리스의 육체가 허공으로 맥없이 떠올랐다. [운이 안 좋았구나. 신입.]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성좌의 입이 벌어졌다. [미식의 시간이다.] 그로테스크한 송곳니들이 빼곡하게 자라난 입안에, 달아오른 소화액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악령]의 생김새를 일부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최악의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5번 책갈피를 활성화 하겠다.” 사실, 여기서 이 기술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스의 육체가 [전인화]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고, 과도한 개연성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방법이 없었다. [5번 책갈피를 활성화합니다.] 그런데 책갈피를 발동한 순간, 예상 밖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해당 인물에 적합하지 않은 스킬입니다.] [전용 스킬, ‘소형화’의 사용이 취소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의 사용이 취소됩니다.]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책갈피]의 힘. 가끔 이렇게 스킬과 화신체의 궁합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게 하필 지금이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마지막 발악인가?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아라.] 비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악령]의 입에서 쑥 빠져나온 긴 혀가 이리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기도가 막히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리스의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연결이 약해지고 있었다. [특성 효과로 사고가 가속화됩니다.] 위기에 맞서 수십 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개중에 한 가지가 사고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아직 그 인물에 대한 내 이해도는 낮은 편이니까.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6번 슬롯에 ‘혁명의 기사 마르크 제비어’를 해제한다.” 츠츠츠츠츠! 나는 있는 힘껏 ‘격’을 방출하며, 순간적으로 성좌들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머지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파천검성 남궁민영’을 넣겠다.” [6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읽고, 느끼고, 겪어온 모든 활자들이 하나의 인간이 되어 내 안에 체현되는 느낌.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언젠가, 처음으로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로드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 무슨······!] [······저건 무슨 힘이지?] 미식협의 성좌들마저 경악할 정도의 기운이 내 안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높아 스킬 수준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높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해당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책갈피의 지속 시간이 감소합니다.] 본래 [파천검도]는 ‘여성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유중혁이야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했다지만, 나는 무리다. [현재 당신의 화신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흡사합니다.] 정확히는, 본래의 몸이었다면 무리였을 것이다. [전용 스킬, ‘파천검도(破天劍道) Lv.10(+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꽈르르릉! 하늘을 깨부수듯이 내리친 벼락이 [에오렌의 검]에 깃들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을, 최적의 시간에 방출한다. 성좌들이 상황을 알아 차리기도 전에, 모든 것은 끝날 것이다. [전용 스킬, ‘파천검뢰(破天劍雷) Lv.10(+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우레와 함께, 하늘의 창을 뚫고 날아든 푸른 벼락들이 주변의 모든 것에 내리꽂혔다. 그 검결에 깃들어 있는 ‘멸살법’의 활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림인들은 파천검성을 십대 고수로 꼽지 않는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잿가루로 흩날리는 [악령]의 몸뚱아리들. 「무림인들은, 파천검성을 일종의 재해(災害)라 생각한다.」 작은 인간으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성좌를 마주 보게 된 존재. 꽈르르르릉! 이것이 바로, 무림의 재앙인 ‘파천검성’의 힘이었다. [스킬의 격이 화신체의 재능을 아득히 넘어섰습니다.] 기혈이 역류하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초월좌가 아닌 나나 이리스는 본래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니까. 하늘이 정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깜빡였다. 눈부신 벼락의 전주곡이 한바탕 휩쓸고 지났을 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악령]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성좌, ‘고요한 섬의 미식가’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성좌, ‘잊혀진 선망의 군주’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 [총 10명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연속으로 달성했습니다!] 가까스로 숨을 놓으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이룬 업적에 <스타 스트림>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당신을 위한 새로운 설화가 준비 중입니다.] 성좌들의 격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해도, 화신의 육체로 성좌들의 화신체를 열이나 학살했다. 그러니, 설화가 생기지 않을 턱이 없겠지. 츠츠츠츠츠츳! 입에서 울컥 피가 토해졌고, 귀와 코에서 동시에 핏물이 쏟아졌다. 걸핏하면 칠공에서 피를 쏟아대니, 이젠 피 맛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미식협’에서 허락된 개연성이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버틸만 했다. 나는 무너지는 이리스의 육체에 설화 파편을 덕지덕지 붙였다. 파천검성의 무공으로 인한 충격에 이리스의 의식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미식협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내용에 경악합니다.] [미식협의 몇몇 성좌들이 당신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미움을 받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다. [미식협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에 큰 호기심을 보입니다.] [미식협의 몇몇 간부가 당신에게 호감을 표합니다.] 나는 이리스의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화산]을 향해 나아갔다. 이리스는 시나리오가 완료 되어야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저 [화산]의 용암 속에 이 팔찌를 던져 넣어야만 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마흔 걸음, 서른 걸음, 스무 걸음······. 가까워진 용암의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팔찌를 부술 수 있는 절벽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쯤 나타날 거라 예상은 했다. 아직 내가 해치우지 못한 [악령]은 넷이나 남았으니까. [구원의 마왕, 정말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군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에오렌의 검]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외형의 여자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악령]이 되었지만, 그 기본적인 외형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짓씹듯 입을 열었다. “아스모데우스.” 자신의 진명이 불리었다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지, 아스모데우스가 황홀한 목소리로 말했다. 츠츠츠츠츠. [······아, 다시 한번 불러 줘요.] 유중혁의 전신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3회차를 실패하게 만드는 원흉. 천천히 다가오는 아스모데우스의 ‘격’이 느껴진다. 이게 고작 ‘일 할’의 힘이라니. 역시, 72 마왕 쯤 되면 차원이 다르다 이건가. 나는 한 걸음을 물러서며, 재빨리 주변을 경계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녀석을 제하고도 [악령]은 아직 셋이나 더 남았다. 녀석들까지 오게 된다면, 승산이 없어진다. 그러니 그 전에······.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다른 성좌들은 없으니까.] 히죽 웃는 아스모데우스의 작은 손아귀에 세 개의 머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머리와 함께 잘려 나간 검정색 케이프 자락들. 화신들의 머리가 아니었다. 발끝부터 아주 천천히, 한기가 돌았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왜 ‘멸살법’에서 아스모데우스를 미친놈으로 묘사하는지 아주 정확히 이해했다. 성좌들의 피가 묻은 아스모데우스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깃들었다. [내가, 모두 먹어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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