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243화 모두 먹어버렸다······. 태연히 그런 말을 하며 샐쭉 웃는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미식협의 일부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를 강하게 비난합니다.] [미식협의 소수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의 만행을 즐거워합니다.] 세월에 닳고 이야기에 찌든 ‘미식협’의 성좌들은 그 성향과 취향도 각양각색이다. 얼핏 ‘1세대’만을 최고로 치는 것 같지만, ‘양산형 제작자’처럼 SSS급을 좋아하는 성좌가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예상 밖의 전개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후후, 역시 ‘성좌’의 화신체는 육질이 다르다니까. 이것도 진체만은 못하지만······.] 아스모데우스 같은 마왕이 ‘미식협’에서 용납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좌든, 초월좌든, 마왕이든. ‘미식협’은 그 어떤 집단보다도 완고한 아집이 집적된 곳이지만, 그 모든 종류의 미식을 존중한다. 찰박, 찰박. 피 웅덩이를 밟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나는 침음을 삼켰다. [‘에오렌의 검’의 특수 효과가 종료됩니다.] 아직 [파천검성]의 무공이 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에오렌의 검]이 제대로 작동할 때의 이야기. 검이 없다면 [악령]이 된 녀석을 상대할 방법은 없었다. 어느새 대여섯 걸음 앞까지 다가온 아스모데우스가 나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날 먹으러 온 건 아닐 텐데?] [흐음, 어떻게 확신하시죠?] [날 죽이면 너는 ‘거대 설화’를 얻을 수 없어.] 아스모데우스는 나와 ‘마왕 선발전’에 대한 약속을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나를 죽일 리는 없었다. [지분 30퍼센트를 약속했잖아. 왜 이런 곳에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거냐?] [그 30퍼센트가 확실하게 저한테 온다는 약조는 없었죠.] [다른 성좌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도발하듯 던진 그 말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날 도발하는 건가요?] 아스모데우스가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었지만, 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네놈이 정말 ‘마왕’이라면, 좀스럽게 굴지 마라. 제대로 경쟁해서, 제대로 네 몫을 가져.] 애초에, 아스모데우스가 여기에 나타난 것부터가 ‘나를 돕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것이었다. 아무리 아스모데우스라도, 같은 ‘미식협’의 일원들을 공격하는 행위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녀석은 굳이 ‘광마’의 행색을 하며 저런 짓을 벌였다. 안색이 새파래진 아스모데우스가 외쳤다. [구원의 마왕······.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먹을 수―]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꺼져라.]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정 날 먹고 싶으면 죽여 보든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봤다면 분명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다른 상대도 아닌 그 ‘아스모데우스’를 이렇게 막 대하다니. 하지만 내가 이토록 막 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쿠구구구구! 아스모데우스의 ‘격’이 나를 향해 불타올랐다. 그 가공할 힘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내 감각보다도 내가 읽은 ‘이야기’를 믿었다. 「그때, 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다르게 대했어야 했다.」 멸살법의 ‘수정본’. 49회차 유중혁의 기록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발견했다. 「아스모데우스는 타협 없는 존재를 좋아한다.」 「그런 존재일수록, 더욱 꺾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유중혁 주제에 어떻게 그런 통찰을 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의 말이 맞다면 지금까지의 ‘아스모데우스’의 행동은 모두 이해가 된다. [등장인물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이변이 발생했다. [등장인물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폭발적인 간접 메시지와 함께, 처음으로 ‘마왕’급 존재의 내면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강제로 발동합니다!] 「먹고 싶어.」 「안 돼.」 「먹고 싶어.」 「안 돼.」 「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양의 사념이 내 귓가로 밀려들었다. 한 존재 안에 이만한 부피의 탐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가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해······.] 바람처럼 다가온 아스모데우스가, 어느새 이리스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쥔 채 아찔한 들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좋군요. 그래, 오늘은 이 정도로 참겠어요.] “······.” [하지만, 명심하세요 ‘구원의 마왕’. 다음번에도 오늘 같은 일은 없을······.]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화산]을 향해 내달렸다. 간신히 잡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코앞에 용암 절벽이 보였다. [바람의 길]이 내 손끝에 쥐어진 [팔찌]를 절벽 아래로 인도했다.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녹아내리는 팔찌. [서브 시나리오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1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미식협’ 내부에서 당신의 인지도가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완전히 탈진해버린 이리스의 입에 [엘라인 숲의 정기]를 넣어 주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필요한 개연성은 대부분 내가 감내했으니 회복은 빠를 것이다. [‘1인칭 조연 시점’이 해제됩니다.] 사위가 뭉그러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미식협’의 연회홀로 되돌아왔다. 감각이 되살아나자,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늙수그레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젊은이, 재미있게 잘 보았네.] 내가 돌아온 것을 깨달았는지, ‘양산형 제작자’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어르신 덕분입니다.” [흐음, 무슨 얘긴가?] “이거 말입니다.” 내 손에는 방금 전까지 이리스가 사용했던 20만 코인 짜리 쓰레기가 쥐어져 있었다. [에오렌의 검]. 참고로 그 검의 그립에는 다음과 같이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made by 양산형 제작자. ‘양산형 제작자’가 킬킬 웃었다. [장사도 다 때가 있는 법이지. 그 검이 오늘 팔릴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런 것 치고는 [도깨비 보따리]의 추천 상품으로 입고 되었던데요.” [흐흐, 도깨비가 하는 일을 성좌가 어찌 알겠나.] 이것이 ‘양산형 제작자’의 배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검이 있었기에 나와 이리스는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일이 좀 곤란하게 됐구만.] 나는 주변을 살폈다. 나를 둘러싼 분위기가 살벌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 대체 누구냐!] 나를 찾는 성좌들이 거센 분노를 태우며 마구잡이로 기세를 발출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방금 전 내게 화신체를 잃고 시나리오에서 탈락한 성좌들의 모습도 보였다.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당신에게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성좌, ‘고요한 섬의 미식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무대 위에서 어안이 벙벙해진 에우프로시네와, 안색이 창백해진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도 보였다. 자, 이젠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몇몇 성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서브 시나리오’는 끝났지만, 여전히 그들에겐 이 상황 또한 유희의 연장선인 것이다. 물론, 나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화신 ‘이리스’와의 계약에 따라 ‘소원권’을 양도받았습니다.] [해당 소원권으로 당신은 ‘미식협’의 개연성이 허락하는 범주 안에서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미식협’의 개연성이 허락하는 범주 안이라······.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명백했다. 성좌들은 모두 죽여달라거나 하는 소원은, 당연히 빌 수 없다. [해당 소원권이 가능한 개연성을 넘어섰습니다.] 모두 내 편을 들어달라거나, 내 부하가 되라거나. 그딴 소원도 당연히 가능할 리 없다. [해당 소원권이 가능한 개연성을 넘어섰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원권’은 일종의 외교 카드인 셈이었다.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정확히 분별해, 내게 가장 적합한 소원을 찾아내는 것. [‘미식협’의 성좌들 중 일부가 당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표출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심지어 내 채널 안의 성좌들도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조마조마함에 손가락을 꼼지락댑니다.] 그 모든 이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미식협’이 내게 예의를 지키길 바란다.] * 순간적으로 장내에는 어마어마한 침묵이 깃들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 침묵을 고요히 응시했다. [‘미식협’의 개연성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수리되었습니다.] ‘미식협’의 홀에 한바탕 스파크가 일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스파크가 아니라 ‘벼락’에 가까워 보였다. 이윽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핫! 정말이지, 재미있는 녀석이 왔군!] 맥주잔을 쥔 ‘목요일의 천둥’이 껄껄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지루해질 뻔한 이야기가, 조금은 볼 만해졌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이 불만이기에 저 작은 성좌를 핍박하는가?] 그의 발언에, 일부 성좌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저자는 규칙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지.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지금 막 끝이 났다. 나와 내 망치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다.] 그 어떤 변론도 받지 않겠다는 듯 토르의 망치가 굉음을 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토르’는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설화를 지닌 최상위 격 성좌들 중 하나. 이곳의 누구도, 그의 망치에 대적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저 천둥벌거숭이의 말에 공감하는 게 몹시 불쾌하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도 같습니다.] 그 말을 한 것은 ‘새벽 별의 여신’이었다. 곱게 넘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흩날리듯 별가루가 떨어졌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에서 끝내야죠. 싸우고 싶다면 ‘시나리오’에서 싸우세요. 더이상 ‘미식협’이 추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무려 두 명의 최상위 격 성좌가 그렇게 엄포를 놓자, 다른 성좌들도 뜻을 굽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소원권’까지 발동한 상황.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몇몇 성좌들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해코지를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여파가 잠잠해지자, ‘새벽 별의 여신’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구원의 마왕’. 당신은 왜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에게 보여준 거죠?] 마치 은하수를 담은 듯 깊은 여신의 눈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한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 눈에, 당신은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내 눈이 어두워, 당신이 보여준 ‘시나리오’만으로는 그걸 짚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괜찮다면 당신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내가 보여준 ‘시나리오’가 조악했기 때문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아마 그녀가 가진 타고난 겸손일 것이다. ‘새벽 별의 여신’ 곁으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보였다.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라더니, 이래서야 도움만 받는 꼴이다.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온 뒤, 내가 줄곧 원했던 상황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이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마왕 선발전’ 이야기를 대뜸 꺼낸다고 해서, 이들이 도와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김독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너무도 멀어, 아직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이 분명 있었다. 수백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가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외길을 걸어갔던 사내를 떠올리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도 내가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니, 아마도 내가 해야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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