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240화
돌아본 곳엔,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있었다.
“셀레나 킴?”
“제발, 제발 이리스를 구해주세요!”
내 어깨를 짚은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
그 선하고 차분한 셀레나 킴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이대로라면 이리스가······!”
순간, ‘멸살법’의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안나, 어째서 이런 짓까지······ 이럴 필요는 없었잖아요!”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건 아니에요. 이건······ 그 화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요!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이 또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에요. 잊지 말아요 셀레나. 우리는 언제든 우리를 먹어 치울 수 있는 맹수 무리 속에 던져져 있다는 걸.”」
그것은 이번 회차에서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은 이미 1차 수정이 완료된 상태.
즉, 다른 회차의 일이 이 회차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1차 수정본에서 3회차의 이야기는 삭제되어 있으니······.
“셀레나 킴.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셀레나 킴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주변의 성좌들이 대노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감히 화신 따위가······!]
무시무시한 시선이 나와 셀레나 킴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석상처럼 굳어버린 셀레나 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양산형 제작자’가 격을 마주 끌어올렸고, 셀레나 킴의 주변에 눈부신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었다.
이 ‘중앙 홀’은, 오직 ‘성좌’들만을 위한 곳.
잠깐, 이곳이 ‘미식협’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겁먹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셀레나 킴은, 뒤이어 나타난 안내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갔다. 셀레나 킴은, 반항 한 번 못하고 그저 원망스런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셀레나 킴이 전하려고 한 이야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게 내가 ‘멸살법’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셀레나 킴이 내게 온 이유는 지금 안나 크로프트가 무대 위에서 벌이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
착잡한 눈길로 다시 무대를 바라보자, 안나 크로프트는 무표정한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설화는, ‘팔찌 원정대’입니다.”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팔찌 원정대?]
“그렇습니다.”
[혹시 1세대의 설화인 ‘팔찌의 마황’을 패러디한 건가?]
팔찌의 마황.
‘멸살법’의 원작에도 언급되는 그 설화는, ‘망치를 먹는 드래곤’이나 ‘새벽별의 아이들’보다도 더 고전으로 분류되는 설화였다. 1세대보다도 더 오래된, 차라리 0세대에 가까운 정통 활극 설화.
15명으로 구성된 ‘팔찌 원정대’가 재앙의 원흉이 되는 ‘팔찌’를 불태우러 간다는 전형적인 원정 서사.
이야기를 듣던 ‘양산형 제작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그 지루한 설화를 풀겠다고?]
그러나 안나 크로프트는 성좌들의 반응 따위엔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 설화를 이끌어 갈 ‘팔찌 원정대’를 소개합니다.”
안나 크래프트가 손뼉을 치자, 그녀의 뒤쪽에 커다란 패널이 나타났다.
홀의 한쪽 벽면 전체를 덮는, 광활한 크기의 패널.
패널에는 드넓은 숲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고, 열다섯 명의 화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여긴 어디야?
―안나님 말씀이 맞는 거겠지?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서 제대로 활약하기만 하면, 우리도 최상급의 배후성을 얻을 수 있어.
대충 무슨 말로 저들을 꼬드겼는지 알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겁먹은 표정의 이리스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렇군.
저것 때문에 셀레나 킴이······.
심지어 이미 도깨비에게 인가도 받은 모양인지, 곧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 ― ‘팔찌 원정대’가 시작됩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성공 또는 실패 시 신규 설화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 해당 시나리오에는 총 15명의 화신들이 참가합니다.
* 모든 화신들은 협력을 통해 [사냥터]의 중심에 위치한 [화산]에 도착해야 합니다.
* 원정대는 [절대 팔찌]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 팔찌를 [화산]의 용암에 던져 파괴해야만 시나리오는 완료됩니다.
* 시나리오를 완수한 화신은 ‘미식협’에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
내용만 보면 꼭 내가 아는 어떤 소설 같다.
애초에 ‘팔찌의 마황’이라는 설화 자체가 그 소설에 대한 오마주인 것 같으니······.
시나리오 메시지는 계속되고 있었다.
+
* 사냥터에는 마황의 [악령]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만약 [악령]에게 원정대가 전멸할 시, 시나리오는 실패합니다.
* 제한 시간 내에 [절대 팔찌]를 파괴하지 못할 시, 시나리오는 실패합니다.
+
[호오······ 이런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이거지. 흥미롭군.]
성좌들 중 몇몇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보기엔 엉성하게 꾸민 시나리오였지만, 분명 그 안에서 성좌들이 찾을 수 있는 향취가 있었다.
오래된 설화에 대한 복기.
안나 크로프트가 노린 것은 ‘미식협’의 성좌들을 위한 추억 팔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꼬장꼬장한 ‘미식협’의 성좌들이,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좀 부족하군. 그래서 우리더러 뭘 어쩌란 거지? 설마 저 지루한 게임을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은 아닐 테고.]
“패널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화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보고 저 녀석들의 ‘배후성’이 되라는 건가?]
“물론 그런 선택을 하셔도 됩니다. 별로 재미는 없으시겠지만.”
[그 말은······?]
“성좌님들은 이 ‘시나리오’에 직접 참가하셔서, 저 싱싱한 화신들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말과 함께, 시나리오의 추가 메시지들이 출력되었다.
+
* 해당 시나리오에는 총 15명의 [악령]이 등장합니다.
*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은 선착순으로 [악령] 역할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
시나리오 메시지를 읽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처음부터 ‘안나 크로프트’는 이걸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1세대의 향취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성좌들의 욕구도 해결할 수 있는 시나리오.
성좌들 사이에서 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전까지의 웅성거림과는 완전히 다른, 흥분이 뒤섞인 고양감.
심지어, ‘양산형 제작자’조차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좌들중 하나가 물었다.
[이 시나리오를 통해 네가 얻는 것은 무엇이냐?]
“없습니다. 그저, 성좌님들이 마음 놓고 즐기시길 바랄 뿐.”
그 뻔뻔한 웃음에 치가 떨린다.
정말로 원하는 게 없을 리가 없다.
저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키우려는 것뿐이겠지.
[미식협의 성좌들이 ‘안나 크로프트’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흉계는 성좌들의 잔혹함을 뛰어 넘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무엇의 희생도 가리지 않는 존재.
괜히 유중혁이 열 번도 넘게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닌 것이다.
“그럼, 1분 뒤 시나리오를 시작하겠습니다. 지원하실 성좌님들은 선택창에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말과 함께, 내 눈앞에도 선택창이 떠올랐다.
[해당 시나리오에 참여하시겠습니까?]
[현재 지원자 : 2/15]
설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그 설화의 대상을 포식할 수 있는 기회.
지원자 수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현재 지원자 : 5/15]
나는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이곳에서, 나는 반드시 ‘마왕 선발전’의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다른 성좌들과 설화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는 그들과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하하, 모처럼 ‘예술 작품’을 먹겠군.]
[기대되지 않는가?]
빌어먹게도 이젠 인정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는 ‘성좌’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현재 지원자 : 9/15]
그때, 귓가에 “바앗”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떠오르는 작은 패널.
비유가 직접 띄워준, 나만이 볼 수 있는 화면이었다.
―제 857회 무도 대회를 시작합니다!
‘무도 대회 시나리오’에 참석한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 꽤 강해진 모양인지, 유중혁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대전 상대를 차례차례 격파해 나가고 있었다. 그 침착한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언제나처럼 생각했다.
유중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유중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물론 유중혁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마치 내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을 회귀해도, 내 선택은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야기했다.
실제로 나는 몇 번이나 녀석의 똑같은 선택을 보았으니까.
「“나는 네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늘 유중혁과는 다른 선택을 해왔다.
나는 유중혁이 아니니까.
그 강렬한 반발심 속에, 나는 늘 다른 길만을 걸어왔다.
멀리서 페르세포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눈빛.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성좌들은,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지원자 : 14/15]
나는 선택창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
이리스 블라지미로브나 레베제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제일 좋아하는 혁명가는 체 게바라와 초기의 칼 맑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세계는 혁명의 시대가 아니었다.
욕망을 지배하는 자본과, 그 자본의 소유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 이리스는 어린 나이에 이 시대에 ‘혁명’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깨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하, 재미있는 곳이네. 식물 섬유 쪼가리가 왕인 세계라니.
수많은 국가들의 체제가 붕괴하는 것을 보며, 이리스는 자신이 기다렸던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균형이 고착되어 ‘왕국’으로 변해가던 세계는, 다시 격동의 흐름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
세계는, 바뀔 수 있다.
어린 이리스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제발!”
콰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화신들의 상반신이 통째로 분리되었다.
[아주 싱싱한 육질이로군.]
큼지막한 어금니 속에 찢겨 나가는 화신들. 입술 사이로 줄줄 흘러 내리는 설화들을 쓰읍 닦은 [악령]들이 킬킬 웃었다.
[퉷. 실망스러워. 지금 이딴 ‘설화’를 처먹으라고 내놓은 건가?]
[성질 급한 친구로군. 기다려 보게. 시나리오는 이제 막 시작하지 않았나.]
[그걸 어떻게 기다리란 거야? 역시 패러디 설화는 이래서······.]
“아, 아아······ 아아아······.”
공포에 젖은 동료들이 그 어마어마한 ‘격’ 앞에 대소변을 지렸다.
혁명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공허하게 생각되긴 처음이었다.
대항할 수 없다.
누구도, 저런 것에는 맞설 수 없다.
“이리스! 도망쳐! 도망치라고!”
동료들의 외침 속에, 이리스는 달렸다.
그녀가 자랑하던 트윈 테일이 피와 땀으로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동시에 숲 속으로 흩어졌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악령]의 발걸음 소리들.
이제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도망치라고?
대체, 어디로 도망치란 말인가.
이 작은 무대 속에,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험지 전체를 감싼 광활한 결계.
어디로 도망쳐도, 그녀는 이 무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리스는, 처음으로 자본이 아닌 어떤 것을 저주했다.
성좌들을 저주했고.
<스타 스트림>을 저주했고.
이 ‘이야기’를, 저주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빌었다.
부디 누군가 이 이야기를 바꿔 주기를.
아주 작은 구원이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구원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과 ‘배후 계약’을 맺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