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239화
내 말에, 노인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구원의 마왕······?]
묘하게 접히는 노인의 주름에서는 정확한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노인은 잠시 후 희미하게 놀라는 듯했고, 묘하게 분노하는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며, 마지막에는 탄복하는 듯한 기색을 풍겼다. 정확히는 그 모든 감정이 하나의 표정에 담겨 있었다.
[그렇군. 자네가 바로······ 허허, 그랬군.]
노인은 나를 아는 듯한 말투였다.
페르세포네가 미식협의 성좌들은 나 같은 건 잘 모를 거라고 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도 의외로 인지도가 있는 건가?
“수식언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든 코트는 마음에 드는가?]
“······예?”
[자네가 입고 있는 코트 말일세.]
나는 무심결에 내 백색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언젠가, 명일상을 해치운 뒤 보상으로 받은 코트였다.
그리고 이 코트를 제작한 성좌의 이름은······.
“······양산형 제작자?”
내 경악한 목소리에 노인이 히죽 웃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키는 그 모습에, 나는 살짝 기가 질리고 말았다.
양산형 제작자.
그는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성좌를 꼽을 때, 반드시 그 목록에 언급되는 이였다.
비록 일신의 무력은 최상급이라 평하기 어려웠지만, 관리국을 비롯한 수많은 성운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맺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
설상가상으로 나는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서 ‘양산형 제작자’의 화신인 귀환자 명일상을 죽인 적이 있었다.
[허허,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되네. 잡아먹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양산형 제작자’는 이미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듯했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네. 괘념치 말게. <스타 스트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애초에 관심 있게 보던 녀석도 아니었어.]
“······.”
[근성도 없고 의지도 약한데다 쉬운 길만 골라 찾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거든.]
나는 복잡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양산형 제작자’가 그 일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결국은 ‘양산형 제작자’같은 성좌조차 화신을 그저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환멸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렇다고 고마워하진 말게. 아무리 형편없는 녀석이었다고 해도, 내 화신이었네. ······그나저나, 자네가 만든 이야기는 잘 보았네.]
“제가 만든 이야기요?”
[그래, 시나리오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난장판을 만드는 솜씨가 정말 탁월하더군. 덕분에 한동안 눈이 심심치 않았어. 별점도 다섯 개를 줬지.]
칭찬인지, 아니면 고도의 조롱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감사를 표했다.
[이곳은 처음인가 보군. 누구 소개로 왔지?]
“명계의 여왕입니다.”
양산형 제작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 할망구가······ 흐흐, 기어이 일을 치는군. 이런 시기에 자네 같은 신입을 데려오다니······.]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지만, 나는 일부러 의뭉을 떨었다.
“미식협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일이라면 늘 있지. 그보다 그 할망구는 처음 온 신입을 내팽개쳐두고 자기 볼 일만 보러 간 겐가? 쯧쯧······ 하여간 올림포스 연놈들은. 이리 오게. 내가 간단히 소개를 시켜주지.]
예상외로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나는 앞서 나가는 ‘양산형 제작자’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주변을 두루 살폈다.
신기한 구경거리가 많다고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디까지나 ‘마왕 선발전’을 도와줄 성좌들을 모집하러 온 것이다.
어디보자.
제일 먼저 말을 걸면 좋을 성좌는······.
[저쪽에 저 술고래는 생긴 것만 봐도 누구인지 알겠지? ‘토르’일세. 저기 저 꼬장꼬장하게 생긴 여자애는 ‘바카리네’고······.]
‘양산형 제작자’가 무턱대고 성좌들의 진명을 불러댈 때마다 나는 가슴께가 선뜩해졌다. 성좌들의 진명에는 그들의 주목을 끄는 힘이 있다. 문제는 그게 호의일지 분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페르세포네 같은 성좌들의 진명을 부른 적은 있지만, 저렇게 막 불러대지는 않았는데······.
[쟤들은 나랑 별로 안 친해서 소개시켜주긴 어려우니 별 기대는 하지 말게.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질겁을 해서 말일세.]
실제로 ‘목요일의 천둥’과 ‘새벽별의 여신’은 ‘양산형 제작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기색이었다.
대충 무엇 때문인지는 알 만 했다.
[쯧쯧, 좋은 설화가 뭔지도 몰라보는 연놈들 같으니······.]
어쨌거나, ‘양산형 제작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만으로 성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까는 발을 내딛기도 어려웠던 연회 홀의 중심부로 이토록 쉽게 진입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말을 걸기도 전에 다들 도망가게 생겼는데······.
아,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도 미식협의 일원이었는데······ 그 녀석은 어디 있는 거지?
[슬슬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려는 모양이구만.]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 대던 ‘양산형 제작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근처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안내인이 음식을 내왔다.
[메르바토스 9서클 대현자의 눈알]
나는 음식을 살짝 뒤적이다가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았다. 주변의 몇몇 성좌들이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깟 것도 못 먹느냐며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겨우 그런 음식에 손을 댔다는 것 자체를 멸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런 시선이 쏟아지든 말든 ‘양산형 제작자’는 그 눈알을 푹 찍어 우적우적 씹기 바빴다.
[그럭저럭 먹어줄만한 맛이로군. 보게, 저기 저 친구가 오늘의 사회자일세.]
꾸려진 무대 위에 빛이 들어오며, 사회자가 나타났다.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아까 홀에서 나를 툭 밀치고 지나갔던 성좌였다.
깜찍한 외형의 얼굴에, 풍성한 고딕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
[미식협의 회원 여러분, 안녕~ 오늘의 진행자는 나 ‘에우프로시네’에요!]
이름을 듣자 나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환희와 축제의 여신’ 에우프로시네.
그녀는 성운 <올림포스> 소속의 성좌였다.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몇몇 성좌들이 체통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오오오, 에우 씨! 여기야 여기!]
정확히는, 내 옆의 ‘양산형 제작자’가 그랬다.
문득 ‘멸살법’의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 원작에서도 ‘에우프로시네’가 ‘미식협’의 주최자로 나왔던 회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유중혁은······.
[바쁘신 와중에 다들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감사해요! 자리를 빌려주신 오로성의 주인 ‘헤아릴 수 없는 엄격’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아마, 저 녀석을 죽였었지.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에 앞서, 특별한 게스트를 하나 소개할까 해요. 어쩌면 들어보신 성좌님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오늘의 게스트는, 최근 가장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행성 출신이거든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폭죽이 터졌다.
[지구 출신의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를 모두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떠들썩하니 굴던 성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메인 무대의 계단으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가.
안나 크로프트가 이 시기에 미식협에 온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역시나, 내가 좋아할래도 좋아할 수가 없는 여자다.
특유의 침착한 시선으로 객석을 둘러본 안나 크로프트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미식협’의 성좌 여러분. 저는 성운 <아스가르드>의 화신, 안나 크로프트입니다.”
품위를 지킨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성좌들은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미식협’도 격이 많이 떨어졌군. 먹잇감이 무대에서 발언을 하다니.]
[요즘 <스타 스트림>이 말세이긴 하지.]
이곳은 ‘미식협’.
엄선된 ‘설화’를 미식하는 성좌들의 연회.
당연한 이야기지만, ‘설화’의 주재료가 되는 것은 바로 ‘싱싱한 화신’이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걸 알면서도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미흡하지만, 제가 첫 번째 ‘이벤트’의 주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여자가 더 무서운 것이다.
[먹잇감이 뭘 준비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당장 끌어 내려!]
분위기가 가열되자 재빨리 중재를 시도한 것은 에우프로시네였다.
[자자, 여러분. 그렇게 너무 흥분하지들 마시고······ 이 탐스러운 먹잇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들어봐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 미식가들에게 그 정도 인내심은 있잖아요?]
에우프로시네가 미소와 함께 교태를 부리자, 흥분하던 성좌들이 잠시 주춤했다. 영리한 안나 크로프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 <스타 스트림>엔 뻔한 설화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 도발적인 서두에, 투정을 부리던 성좌들의 이목이 한순간 집중되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귀환자에, 환생자에, 소드마스터에, 9서클 대마법사······ 하물며 저 같은 ‘예언자’까지. 전부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시작하는’ 천편 일률적인 설화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안나 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오직 말초적인 재미와 사이다만을 위해 제작된 그런 설화들이 범람하는 세태가, 바로 오늘날 <스타 스트림>의 현실입니다.”
성좌들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마치, 먹잇감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신기하다는 눈치들.
하지만 안나 크로프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1세대 설화’가 유행할 때는 달랐습니다.”
마치 홀린 듯이, 성좌들은 안나 크로프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시절, 성좌들은 설화를 사랑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도깨비는 설화에 주제를 부여했고, 성좌들은 그 안에서 형식과 미학을 탐구했습니다. 그때, ‘설화’는 분명 ‘예술’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예술’이라.
정말 무서운 여자다. 화신의 입장에서 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안나 크로프트의 말에 성좌들은 제각기 다른 추억에 잠긴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페르세포네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가 그 시절을 살아 견딘 성좌들이었다.
[재미있군. 그래서 네가 가진 설화는 우리 입맛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냐?]
그 말을 한 것은 홀의 구석에 기대어 서 있던 한 마왕이었다.
다분히 도발 섞인 언사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잃어버린 ‘1세대’를 돌려드리려 합니다.”
성좌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모두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들이었다.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소드마스터도, 9서클 대마법사도 없는 설화. 오직 피와 땀, 눈물과 노력으로 맺어지는 주제가 있는 설화.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그런 설화를 선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충격적인 선언에, 성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감히 화신 따위가 그런 망발을 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성좌들도 보였고, 무슨 말인지 들어나 보자며 흥미로워하는 성좌들도 보였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성좌들도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양산형 제작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멍청한 이야기를 하는군. 아무리 ‘미식협’이라도 이제 그런 설화가 재미있을 턱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가?]
“동의합니다.”
1세대 설화들 중엔 분명 훌륭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이미 자극적인 서사에 길들여진 성좌들이, 이제와 1세대를 흉내낸 설화에 감동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실을 ‘안나 크로프트’가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멸살법’ 전체에서 가장 유능한 화신이니까.
나는 머릿 속으로 그녀의 행적을 담은 ‘멸살법’의 내용들을 떠올렸다.
원작에서 안나 크로프트는 ‘미식협’에서 이런 이벤트를 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와 비슷한 일을 어디선가 벌인 적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구원의 마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