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238화
페르세포네가 옅게 웃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나 보죠? 옆 동네 대천사가 당신 취향이 이쪽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데.]
“절대로 오해입니다.”
[흐음······.]
페르세포네가 아쉽다는 듯 목소리를 흘렸다.
참고로 페르세포네는 유중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복장이 차이나 드레스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잠깐······!”
내 만류가 이어지기도 전에,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다시 한번 변했다.
옷차림이 차이나 드레스로 화하기에 또 유상아로 변하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웬걸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아니 대체······.”
싱긋 흩뿌리는 미소에, 상대가 페르세포네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페르세포네는 얼마 전 마계에서 보았던 ‘징벌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보니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던데. 역시 이쪽인가요?]
드레스의 옆트임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맨살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외쳤다.
“······그만 놀리십시오!”
[후후, 정말 재미있어.]
아이처럼 웃은 페르세포네가, 다시 한번 변신했다.
이번에는 유상아의 모습이었다.
차이나 드레스나 가터벨트 대신 걸친 단정한 오피스 룩.
그 외양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미노 소프트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언제나 유상아는 저런 차림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었다.
유상아 씨, 잘 있으려나.
한수영이랑 같이 다닌다니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그래도 그 ‘유상아 씨’니까, 괜찮을 거라 믿는다.
페르세포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요. 데리러 온 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세포네의 뒤를 따라갔다.
대기실을 나서는 순간 몇몇 성좌들의 시선이 내리꽂혀서, 나는 조금 긴장했다. 페르세포네와 함께하는 나를 보며 수군대는 성좌들도 보였다.
이거 어쩐지 귀부인과 그녀의 젊은 시종이 된 기분인데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세포네와 나는 로비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엘리베이터 앞에 도달했다.
아마, 미식협의 축제는 이 성채의 최상층에서 진행될 것이다.
거대한 수정구를 닮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와 페르세포네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기우뚱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조금 무거워졌고, 투명한 수정벽의 바깥으로 암흑차원의 정경이 펼쳐졌다.
차원의 지평선 너머로 장대한 <스타 스트림>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기대하는 얼굴이군요.]
“기대라기보다는, 좀 긴장이 됩니다.”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그대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마지막으로 볼 때는 화신이었는데, 이젠 어엿한 성좌가 되었군요.]
“그래 봤자 아직 풋내기입니다. 제가 여기 와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군요.”
나름대로는 겸양의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내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페르세포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내가 ‘미식협’에서 그 정도 위치도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신규 회원 하나 데려가는 것도 힘겨워할 정도라고?]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농담이에요.]
“제발 그만 놀리십시오.”
[앞으로 얼마나 유망한 성좌가 될지 모르니, 미리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해 두세요. 당신도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니까.]
전부터 느끼지만, 이 여왕님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파천검성을 명계의 타르타로스에 데려가 주는 대가로 그녀가 요구한 것은 내가 이 ‘미식협’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미식협 참석’이라는 조건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 될 것이란 것을. 그녀는 성좌가 된 나를 위해 본격적인 데뷔 무대를 꾸려준 셈이다.
페르세포네의 흑요석 같은 눈이 반짝였다.
[지금 격의 위치는 어느 정도죠? 설화급은 아닐 테고.]
아마 내가 ‘설화급’이라는 사실이 다른 성좌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다음 ‘별자리의 연회’ 때는 2층에서 뵐 수도 있을 겁니다.”
순간 페르세포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내가 고작해야 위인급 정도의 격일 거라 생각했겠지.
명계의 여왕님께서 당황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도 제법 쏠쏠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이내 깊은 우려가 섞였다.
[그대를 시샘하는 성좌들이 생겨날 거예요.]
“······.”
[어떤 성좌들은 그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죠.]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각오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만날 성좌들 중 호락호락한 녀석은 없을 것이다.
나를 시샘하는 녀석이든, 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녀석이든.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성좌들은, 당신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을 거예요.]
“······예?”
[지금까지야 ‘한반도 시나리오’의 영향력이 큰 곳만 다녔을 테니 잘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잊지 마세요, 이곳은 ‘미식협’이라는 것을.]
미식협.
이 <스타 스트림>의 상위급 성좌들이 모이는 대연회.
문득, 페르세포네의 웃음이 무섭게 느껴졌다.
[‘별자리의 연회’ 때처럼 보모 역할을 해주진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벨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듯 연회장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머뭇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내리자마자 몇몇 성좌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지만, 관심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과도한 관심이 쏟아진다면 오히려 움직이기 부담스러울 테니까.
로비의 1층에서처럼 ‘상징체’로 존재하던 성좌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인간형이거나, 이세계의 생명체로 의태한 모습.
이곳에 사소한 [개연성]을 의식하는 성좌는 하나도 없었다.
떠들썩한 연회 홀의 중심을 차지한 몇몇 성좌들은 내가 ‘멸살법’에서 읽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연회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바이킹 복장의 사내였다. 등허리에 멘 거대한 망치를 보고서도 그의 모습을 못 알아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
[1세대 설화 중 최고는 당연히 ‘망치를 먹는 드래곤’이지!]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호쾌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 반대편에서 한 여인이 대꾸했다.
[무슨 소리죠? 최고라면 당연히 ‘새벽의 아이들’이에요. 평점도 제일 높다고요.]
별빛을 수놓은 듯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여자는 성운 <수호의 나무>의 성좌인 ‘새벽별의 여신’일 것이다.
보아하니 어떤 설화가 최고의 설화인지를 놓고 또 논쟁이 붙은 듯했다.
허구한 날 무슨 설화가 최고인지를 놓고 싸운다더니, ‘멸살법’에서 들은 것과 정확히 같은 정경이었다. 한반도에서는 보기 힘든 고위급 성좌들이 태연히 돌아 다니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이곳이 어떤 곳인지 실감이 났다.
저 강력한 ‘페르세포네’조차, ‘미식협’에서는 보통의 성좌에 불과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다행히 ‘채널’이 기능하는 곳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래, 겨우 이런 곳에서 주눅들 수는 없다.
나는 ‘미식협’의 중앙 무리들 사이로 슬그머니 접근해, 주변을 서성이는 성좌들 중 하나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저······.”
그러나 누구도 나를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성좌들.
나는 용기를 내 곁에 있던 성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요.”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힐끔 돌아본 성좌는, 마치 시비라도 걸듯 내 어깨를 툭 밀치고 다시 중앙의 연회홀로 걸어 가버렸다.
「김독자는 이런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혼자가 된 기분.
갑자기 수많은 성좌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분명 같은 곳에 있는데도, 그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말한 ‘무관심’이 무엇인지,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미식협’은 나 같은 신입이 함부로 발을 내밀 수 없도록, 자기들만의 방호벽을 단단히 형성하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시야를 좀 넓혀서 미식협의 주변부을 살폈다.
중앙의 연회홀에서 담소를 나누는 성좌들 외에, 외따로 서성이는 존재들도 보였다. 그들 또한 ‘미식협’의 일원이니, 분명 강력한 성좌인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가자, 그곳에는 대기실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무수한 패널들이 붙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나리오’의 영상들.
자세히 보니, 내가 ‘구원의 마왕’이 되었던 순간의 영상도 한쪽 구석에 작게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관람 중인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겪은 ‘한반도 시나리오’조차, 여기서는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옆의 패널에선, 한반도의 실시간 화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비형의 채널인 것 같았다.
화면에는 자칭 단발의 미소녀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김독자 그 자식, 지금쯤 분명 희희낙락하고 있을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수영, 지금 내가 어디 와 있는지 알면 그딴 소린 못할 거다.
―야, 심연옥들 잘 모으고 있지? 그거 잘 모아야 돼. 나중에 일 그르치면 그거라도 써야 하니까.
―······진짜로 독자 씨가 이런 걸 시켰어요?
―아 그렇다니까!
화면에서 티격태격거리는 한수영과 유상아를 보고 있자니, 물씬 그리움이 솟았다. 더 보고 있다가는 기분만 울적해질 것 같아서, 나는 옆의 패널로 눈을 돌렸다.
그 패널에서 나오는 화면은 흔한 ‘양산형 설화’를 담은 것이었다.
설화의 제목은 「전설의 이계 귀환 전설」.
제목부터 삼류 냄새가 풀풀 나는 데다, 내용도 이계에서 온 귀환자가 세계를 구하고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식의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봐 줄 만했다. 뭔가, ‘멸살법’과 닮은 데가 있다고나 할까······ 어쩐지 주인공의 말투도 유중혁과 비슷했다. 설화를 대강 훑고 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별점을 입력하시겠습니까?]
아, 이렇게 설화마다 별점을 매기는 시스템인 모양이군.
나는 작품의 곁에 있는 ‘별점’ 칸으로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설화일세.]
뒤를 돌아보니,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하며 대답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더군요.”
[허허, 그렇지? 보는 안목이 있는 친구구만.]
사실 내가 아는 ‘미식협’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설화였다.
‘미식협’의 성좌들은 이런 양산형 설화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9서클’이나 ‘소드마스터’ 같은 개념이 나오면 질색하며 헛구역질부터 하는 고상한 작자들이 바로 ‘미식협’의 성좌들이다.
그런데 이 「전설의 이계 귀환 전설」에는 그 두 가지가 모두 나온다.
“혹시 이 설화의 출품자이십니까?”
[그렇다네. 껄껄. 매년 출품하고 있지. 하나라도 더 이 설화를 알았으면 해서 말이야. 정말 좋은데, 정말 재미있는 설화인데, 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질 몰라서 말일세.]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어쩐지 반갑기까지 했다.
나도 ‘멸살법’을 열심히 읽던 시절에 가는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멸살법’ 홍보글을 올리고 다녔으니까. 대부분 욕만 들입다 처먹긴 했지만······ 아무튼, 이 노인도 나랑 비슷한 경우인 모양이었다.
노인이 탄식하며 덧붙였다.
[내가 암만 추천해도, 여기 녀석들은 콧방귀나 뀔 뿐이야. 어린 녀석들이 벌써부터 눈만 높아 가지고······ 죄다 1세대 설화 타령이나 하기 바쁘지.]
들을수록 의외의 발언들이었다.
확실히 ‘미식협’이 좀 고지식한 부분이 있긴 하지.
이 <스타 스트림>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진다.
그때, 지나가던 성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꾸준좌 또 오셨구만.]
[쯧쯧, 노망이 들어서 좋은 설화가 뭔지도 모른다더니······.]
······꾸준좌?
곁의 노인이 노발대발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노인을 가리키는 별명인 듯했다.
꾸준좌라, ‘멸살법’에 그 비슷한 별명의 성좌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꺼져라 이놈들아! 네놈들 처먹으라고 내놓은 설화도 아니다!]
그 순간, 삐빗 하는 소리와 함께 「전설의 이계 귀환 전설」에 붙어 있던 별점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 1.3/5 -> ★ 1.1/5
안 그래도 낮던 별점이 더욱 낮아졌다.
누구의 짓인지는 명백했다.
[저, 저놈들이!]
소위 말하는 ‘별점 테러’였다.
비웃듯 사라지는 성좌들을 향해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노인의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아서, 나는 별점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런 점수를 받을 만큼 형편없는 설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삐빗, 하며 올라가는 별점.
소리를 지르던 노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왜 굳이 설화에 점수 같은 게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겠군요. 모든 설화에는 제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인데요. 어떤 이에겐 흥밋거리일 뿐인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구원이기도 하니까.”
내 말에 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노인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네 요즘 젊은 성좌들 답지 않구만······ 그런 훌륭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니······.]
“뭘요.”
‘멸살법’ 같은 이야기로 유년을 견딘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기분이 한결 풀렸는지, 노인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거이거, 좋은 말동무가 하나 생긴 것 같군. 자넨 수식언이 어떻게 되나? 경황이 없어서 그것도 못 물어보고 있었구만.]
이거 뭔가 이야기가 잘 풀릴 거 같은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구원의 마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