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237화 Episode 45. 미식협 오로성으로 향하는 내내, 안나 크로프트는 말이 없었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묘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딱히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생각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안나 크로프트에 대한 내 이해도가 너무 낮아서 [전지적 독자 시점]의 2단계를 발동시킬 수가 없었다. 하긴, 원작에서도 나는 안나 크로프트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저 녀석에게 유중혁이 죽거나 뒤통수를 맞은 횟수만 꼽아도 양 손가락으로는 모자랄 지경이니까. 나와 안나 크로프트가 모두 말이 없었기에 마차 안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어색해졌고, 셀레나 킴만 애꿎은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오게 된 거예요. 아스가르드의 화신들도 초청을 받았거든요.” 천성이 착해서 이런 분위기를 견디질 못하는 셀레나 킴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어쨌거나 여러 가지 정보를 듣게 된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셨군요. 세 분 다 아스가르드 소속이십니까?” “네. 안나의 주선으로.” “좋은 성운을 택하셨군요.” “아하하,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어요.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리게 됐네요. 다른 화신들은 초대받지도 못했는데······.” 셀레나 킴은 살짝 들떠 보였다. 하긴, 미식협의 초대는 별자리의 연회와는 의미가 다르니까. 별자리의 연회가 귀족 전체의 모임이라면, 미식협은 상류 귀족의 살롱과 비슷했다. 하지만 호사(好事)라. 과연 셀레나 킴이 그곳에 도착해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리스, 왜 말이 없니? 전에 독자 씨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랬잖아.” “블린(влин)! 내가 언제!” “얘가······ 너 지난 연회 이후로 매번 독자님, 독자님 노래를 불렀잖니? 모처럼 뵈었는데 이야기라도 좀 해보렴.” 놀리는 듯한 셀레나 킴의 말에 이리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흘끔흘끔 내 눈치를 보던 이리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구원의 마왕······ 님 맞으시죠?” 순간 이 녀석이 그때 그 건방진 꼬맹이가 맞는가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은 나도 예의를 차려 주기로 했다. “맞습니다.” “······저, 저희랑 같이 계신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왜 불편하다고 생각하시죠?” “저희는 일개 화신이잖아요. 그리고 구원의 마왕님은······.” 곁에 있던 셀레나 킴의 표정도 변하고 있었다. 반가움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내가 그들과는 다른 ‘성좌’라는 것을 새삼 자각한 눈치였다. ‘설화급 성좌’와 보통의 ‘화신’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아마 다른 성좌였다면 여기서 “하찮은 벌레들이 이제야 제 주제를 깨달았구나” 따위의 대사를 지껄였겠지. 물론, 나는 아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한때는 화신이었으니까요.” 내 말에, 셀레나 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용기를 얻은 이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하세요.” “혹시 배후 계약을 맺은 화신도 있으신가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어, 그건······.” 머뭇거리는 이리스를 향해 셀레나가 눈치를 주었다. “이리스. 넌 이미 점지된 배후성이 있잖니?” “그,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궁금하잖아!” 트윈 테일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홱 고개를 돌리는 이리스를 보고 있자니, 지구에 있을 신유승과 이길영이 떠올랐다. 녀석들, 잘 있으려나······. 나는 그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한반도에 제 화신이 있습니다.” 내 말에 이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아, 혹시 그 꼬마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신유승에 대한 소문이 다른 곳에서도 퍼진 모양이다. 쑥덕거리길 좋아하는 성좌들이니, 자기들 화신한테도 이미 얘기했겠지.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혹시 화신을 바꿀 생각은 없으신가요?” 화들짝 놀란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안나 크로프트를 일별했다. 안나 크로프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산하에는 좋은 화신들이 많아요. 재능이 있는 친구들도 많고요. 저기 있는 이리스도 그들 중 하나죠.” 의외의 제안이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지? 어쩌면, 아스가르드에서도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나는 정식으로 ‘성운’ 창설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지금 제게 <아스가르드>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아스가르드 산하에는 좋은 화신들이 많으니, 그들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권하는 것뿐이죠. 어차피 배후 계약은 배후성 입장에서는 언제든 취하할 수 있잖아요?” 순간 낙담했던 이리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저는 배후 계약을 취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여자애가 그렇게 마음에 드시나 보죠? ‘신유승’이라는?” 내가 대답이 없자, 이리스의 얼굴이 깊은 실망감으로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해도가 몹시 낮은데도 감정의 변화가 스킬로 포착될 정도다. 그런데, 안나 크로프트가 묘한 말을 했다. “가령, 그 화신이 갑자기 죽는다면······.” 안나 크로프트의 입가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세요. 그냥 예를 드는 것 뿐이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거나, 갑작스런 재해로 화신이 사망한다거나······.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화신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건가요?” “불의의 사고 말씀이십니까?” “네, 불의의 사고요. 그저 우연히 벌어졌을 뿐인 불의의 사고.” 나는 안나 크로프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유승이 죽는다······.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제가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모르는 일이죠. [운명]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니까요.” ······[운명]? 순간 대기가 흔들렸다. 주변 공기가 불길한 색깔로 물들며, 마차 전체가 파르르 떨렸다. 이리스와 셀레나 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두 화신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엄한 화신들에게까지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방금, 안나 크로프트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츠츠츠츠츠츠츳! 진언 사용으로 인해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우려를 표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경고성을 발합니다!] 귓가로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진언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 [운명]을 일으킨 세계를 모두 부숴버릴 거다.] 꽈아아앙! 폭발한 격의 충격으로 마차의 창문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깜짝 놀란 마부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심지어 저 침착한 안나 크로프트조차 희미하게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춰섰고,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로성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굳어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내립시다.” *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오로성으로 안내되었다. 오로성(五輅城). 이 성은 전 차원에 흩어진 ‘미식협’의 주요 본거지 중 하나로, 미식협의 간부가 직접 소유한 성채였다. 아마 이걸 가지고 있는 녀석이······ 마계의 72마왕 중의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었던가? [출입 허가를 받은 분들입니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시죠.] 성내로 진입하자 내부는 중세풍보다는 현대식에 가까웠다. 마치, 고급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키는 광경이랄까. 중간중간 상징체의 형태로 흩어져 있는 성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안내인을 통해 1층 로비의 구석에 위치한 대기실로 안내 받았다. 아직 도착한 인원이 없는지, 대기실의 인원은 나와 아스가르드 3인방이 전부였다. [그럼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아직 도착할 화신들이 더 남아 있어서······ 아, ‘구원의 마왕’님은 성좌시니 따로 대기실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 있을게요.” 안내인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내 납득한 듯 사라졌다. 솔직히 아직은 여기가 더 편하다. 나로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좀 필요하고 말이지. 대기실의 벽에는 역시나 눈요기를 위한 패널들이 걸려 있었다. 이 시간에도 차원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위 시나리오의 장면들······. “저, 아까는······.” 말을 걸어온 것은 셀레나 킴이었다. 마차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꺼려할 법도 한데, 역시나 ‘멸살법’ 설정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좀 과했죠.” 그제야 셀레나 킴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아니에요, 저희가 너무 무례했어요. 죄송합니다, 구원의 마왕.” 아까보다 훨씬 격식을 차린 인사였다. 그런 사과를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뭔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셀레나 킴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녀는 ‘멸살법’ 전체에서 내가 괜찮게 보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다만, 내가 싫은 쪽은 저기 구석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뻔뻔한 녀석이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안내인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아스가르드의 화신분들은 저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아마,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이들을 찾는 모양이었다.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가볍게 목례를 남기고 먼저 사라졌다. 그러나 안나 크로프트는 곧바로 방을 떠나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많은 성좌들을 적으로 두고 있어요. ” “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내 단언에 안나 크로프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종전에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크게 위축된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낱 화신일 뿐이지만, 무려 성운 전체와 계약을 맺은 존재다. 아마 <아스가르드>의 최상위권 성좌들이 내 격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지로서, 진지하게 조언하는 거예요. 싫어도 지금은 다른 성좌들과 협력해야 할 때니까.” 같은 목표라······. “글쎄, 나는 당신 목표를 모르니 거기엔 답해줄 수 없겠군요.” “이 세계를 지키는 것. 당신도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나는 그 말에 답하는 대신, 대기실의 벽에 걸린 패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재앙이나 성좌들의 출현으로 처참하게 찢겨 나가는 화신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안나 크로프트가 내 곁을 스쳐갔다. 그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이 세계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스치듯 흘린 그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앞서가는 안내인과 나를 초조한 눈빛으로 번갈아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중에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길 바라죠.”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뒤, 대기실에는 나만이 남았다. 홀로 남은 나는 조용히 생각들을 정리했다. ‘멸살법’에 언급된 미식협의 성좌들을 떠올렸고, 개중에 설득할 수 있을만한 성좌들의 명단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그들의 특성이나 호오를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별자리의 연회 때는 운이 좋았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교계로 표현한다면 이번 ‘미식협’은 내게 본격적인 데뷔전이다. 여기서 어떤 인상을 주고,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내가 꾸려갈 시나리오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그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또 안내인인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존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겁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김독자. 많이 기다렸어요.] 그 화사한 진언의 톤을 듣는 순간,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정말이지, 명계의 여왕은 장난기가 너무 많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차림을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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