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236화 유중혁의 단호한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괜찮겠냐?”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시나리오는 ‘마왕 선발전’이지 ‘무도 대회’가 아니다.” 나야 줄곧 생각하고 있던 바였지만, 유중혁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묘한 안도감과 뿌듯함이 함께 솟았다. “너······ 정말 사람 됐구나. 적어도 당분간은 죽지 않겠어.” 유중혁은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무도 대회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흑천마도]다. 하지만 [흑천마도]를 얻는다고 해서, 우리가 ‘마왕 선발전’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중혁의 말이 맞았다. 확실히 ‘무림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해서 ‘마왕 선발전’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게 네가 ‘미식협’에 가야하는 이유다. 우리 성운에는 동료가 필요하니까. 미식협에 간다면, 동맹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미식협에 가서 쓸만한 성좌들을 꼬셔오라 이 얘기지. 그런데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우리 성운?” “지난 번에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김독자 컴퍼니?” “정말 그 따위 이름이라면 당장 그만두겠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유중혁.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손수건으로 감동의 눈물을 닦습니다.] 처음 멱살을 잡힐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 ‘유중혁’과 내가 진짜로 동료가 되다니. 어쨌거나, 유중혁이 저렇게까지 말한 이상 내가 망설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다녀올게.” * 그날 밤, 나는 포탈을 뚫고 날아온 미식협의 안내인을 맞이했다. 흑색 말을 동반한 작은 마차를 몰고 온 안내인은, 서부극에 나올 법한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 오로성의 주인에게 종속된 권속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안내인은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말을 건넸다. [성좌 ‘구원의 마왕’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마차에 탑승하시지요. 여정이 꽤 길 테니, 한숨 주무셔도 됩니다.] 안내인은 나를 보고도 딱히 놀라거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미식협의 안내인 쯤 되면 ‘구원의 마왕’ 정도에는 안 놀란다 이건가? 마부석으로 가던 안내인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도중에 합승객이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괜찮아요.” 합승객이라······ 누구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내인이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뭘로 만들었는지 마차의 내부는 제법 넓고 편안했다. 흔들림도 전혀 없고, 심지어는 움직이고 있다는 관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다. 잘 됐다. 가는 동안 ‘멸살법’이나 좀 읽어두면 되겠지.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나는 내리 ‘멸살법’을 읽었다. 어쩌면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차가 움직이는 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15회차의 유중혁은 죽어가며 생각했다. ‘운이 좋지 않았군.’」 「······그렇게 19회차를 끝내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다음 번이다.’」 「······유중혁은 25회차의 삶을 마감하며 중얼거렸다. “다음번엔 진짜로 간다.”」 ······사람 됐다는 말은 취소다. 이 자식, 1차 수정본에서도 개복치인 건 여전하네. 내가 도움을 주든 안 주든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건가. 나는 유중혁의 죽음을 훌훌 넘기며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식협에 관한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극후반 회차의 유중혁이 ‘미식협’에 방문했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녀석들을 쳐죽이러 갔던 것이지 화합하러 갔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 부분의 파트는 대개 “끄아아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비천호리가 말했다. “성좌들은 모두 최악이지. 하지만 미식협의 또라이들은 그중에서도 제일 최악이야.”」 게다가 호의적인 내용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도 없다. 볼수록 내가 미식협에 가는 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안 생겼다. 어쨌거나, 나는 계속해서 ‘멸살법’을 읽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 녀석이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 원작과 수정본에 읽는 맛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대목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내가 원작에 개입한 순간의 흔적들. 그런 대목이 나올 때면 나는 특히 주의를 집중했다. 수정본에는 없는 ‘3회차’의 이야기가 언급되는, 몇 안 되는 장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녀석도 이것이 옳은 길이라 말했으니까.’」 ······옳은 길? 뭔 소리지? [식사 시간입니다. 별 거 아니지만 조촐하게 준비해봤습니다.] “고마워요.” 중간 중간 마차가 멈춰설 때마다, 안내인은 내게 식사를 제공했다. 일종의 기내식인 모양이었다. 겉보기에는 고급 햄인 하몽을 닮았는데, 무척 향긋한 냄새가 났다. 물론, 진짜 햄은 아니었다. [셀레게돈 행성의 마지막 검투사] 역시 미식협이 제공하는 거라 그런지 기내식도 설화를 주는군. 느껴지는 설화의 농축도를 보니 꽤 강한 설화인 것 같은데······. 나는 안내인이 함께 준 포크로 매끈한 햄의 살점을 푹 찍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설화 내용의 일부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성좌들의 난동 속에 끔찍하게 부서지는 도시. 거대한 압력에 짓눌려 터지는 화신들의 모습. 그에 맞서 모든 존엄을 잃고 죽어가는 검투사······. 악귀처럼 웃는 성좌들의 입 속으로, 찢어진 화신들의 몸뚱이가 통째로 쏟아졌다. 이미 사라진 세계의 마지막 정경. 화신들의 절규와 절망감이 한데 모여, 코 끝에 어른거렸다. 나는 잠시 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조용히 포크를 놓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성좌님의 취향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 같군요. 새로운 음식을······.] “아뇨, 저는 제가 가져온 거 먹을게요.” 안내인은 송구스럽다는 듯 접시를 가져가더니 다시 마부석으로 물러갔다.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나는 간신히 표정을 풀었다.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문득, 방금 읽었던 ‘멸살법’의 한 구절이 스쳐갔다. 「“화신들에게는 악몽 같은 곳이지.”」 새삼,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상대하는 존재들이 누구였는지. 바보 같이, 무슨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설화 파편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저놈들이 먹는 설화에 비하면, ‘이야기의 지평선’에 내버려진 설화들은 무색무취에 가까웠다. 평범한 이삼류의 화신들이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간, 그저 그런 종류의 설화 찌꺼기들. 모두 미식협이 내버린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라마르크의 기린]을 통해 그 설화 파편들을 손으로 흡수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왠지, 악몽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여행은 며칠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막간을 이용해 그동안 정비하지 못했던 것들을 몇 가지 손보았다. [보유 코인 : 1,252,353 C] 우선,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못했던 코인 점검을 했다. 확인해 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 모여 있었다. 125만 코인이라니, [대악마의 눈동자]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안나 크로프트가 사가버렸다. 나야 더 좋은 스킬이 있으니 별 필요는 없지만······. 나는 남은 코인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했다. 종합 능력치를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사실 종합 능력치는 평균 100을 넘어서는 순간 그 효율이 급감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종합 능력치에 투자하는 것보다 스킬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 물론, 종합 능력치도 압도적으로 쌓이면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긴 하다. 일단 ‘제4의 벽’을 설득해서 조만간 특성창을 한 번 확인해봐야 할 텐데 말이지. [합승객께서 들어오실 것 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던 까닭에, 나는 마차가 멈췄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나의 대답과 함께 마차 좌측의 문이 열렀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문틈 사이로 합승하려는 이들을 살폈다. 아무래도 성좌가 탈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아!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길이 좀 험하다 보니······.] 들려온 목소리는 어쩐지 귀에 익었다. 높고 가는 음색, 러시아 억양이 섞인 여자애의 목소리. 문틈 사이로 보이는 인원은 총 세 명이었다. [미리 탑승하신 분이 계십니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길 되시기를.]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좌의 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즉, 저들은 모두 화신들이란 이야기였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여인이 먼저 마차에 올라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여인의 카키브라운 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인이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셀레나 킴?” 셀레나 킴. 언젠가 ‘별자리의 연회’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했던 이였다. 내 달라진 얼굴 때문일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여자가 탄성을 질렀다. “앗, 당신은······?” “저, 누군지 기억하시겠어요?” “그럼요! 김독자! 오랜만이군요! 당신도 초대 받은 건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반색하는 셀레나 킴에게 악수하며, 나는 나머지 일행을 살폈다. 뒤이어 들어온 것은 작은 트윈 테일의 여자아이였다. “넌 뭐······ 엇?” 역시나, 이 녀석도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별자리의 연회’에서 만났던 러시아 꼬맹이. 이름이······ 뭐였더라. 붉은 꼬맹이인가 하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나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여자애를 제쳐두고, 나는 나머지 한 사람을 마저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고요하고 느긋한 목소리에, 그 저의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나는 이 인물을 잘 알고 있었다. 패왕 유중혁과 함께, ‘멸살법’ 최강의 화신으로 손꼽히는 존재. 심지어 나는 이 인물을 이미 만난 적도 있었다. “언젠가 꿈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었죠.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그때, 저한테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분명, 기억한다. ‘그린 존’ 시나리오를 할 때, 나는 스펙터의 영석을 먹고 그녀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기억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죠. 처음 뵙겠어요, 김독자. 아니······ ‘구원의 마왕’.” 흩날리는 금발머리 사이로 소용돌이치는 황색의 마안(魔眼)이 고요히 웃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 미소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미소의 이면에 담긴 불온한 사상(思想)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 크로프트입니다.” 아스가르드의 예언자. ‘차라투스트라’의 수장, 안나 크로프트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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