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235화 다음 날부터 유중혁은 파천검성과 수련에 몰두했다. 자신의 일족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말에, 파천검성은 줄곧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는 유중혁은, 함부로 스승을 위로하는 대신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몰두했다. ‘본래는 내가 직접 태고의 거신을 만나게 해주려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김독자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본래의 계획대로 태고의 거신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최소 40번 시나리오는 넘겨야 하니까. ‘그 녀석, 설마 명계와 그 정도로 친분이 있을 줄이야.’ 가만히 보면 김독자는 은근히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 꼬장꼬장한 성좌들을 잘도 홀려대는 것인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헤죽헤죽 웃습니다.] 저 헤죽거리는 대천사만 봐도 그렇다. 2회차 당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는 저런 성좌가 아니었다. 지엄하고, 지고하며, 정의감에 불타는 대천사. 그런 존재가, 어째서 이번 회차에는 저렇게 망가져 버린 것인지 유중혁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냐?” 파천검성의 질문에, 유중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수도 있다. 무도 대회 시나리오는 결코 만만치 않아.” “지금의 저는 지난 회차의 이 시점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렇다고 십 대 고수를 상대할 수준은 아니야.” 무림의 십대 고수라면,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을 통해 무공을 판매하던 빙화신녀나 환영비객도 그중의 하나고, 파천검성의 본가(本家)인 남궁가에도 그런 십대 고수가 있었다. 무도대회가 열리면 그들 중 하나가 참전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번 무도 대회의 상품이 상품인 만큼, 유명 성좌들의 화신이 참전할 경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성좌들이 무도 대회 본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무도 대회를 지겨워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강력한 성좌들일수록 이런 시나리오에는 싫증을 낸다는 것이었다. 무림에서 매해 반복되는 시나리오인 만큼, ‘무림 대회’를 충분히 관음한 성좌들은 대회를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유중혁의 맥을 짚어 보던 파천검성이 입을 열었다. “초월형 2단계를 열어야 한다.” “열어 본 적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1단계를 돌파할 때랑은 다르다.” “어떻게든 될 겁니다. 지난 회차에서는 3단계도 돌파해본 적이 있으니까.” “······3단계라고?” 파천검성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초월형의 3단계는, 결코 재능만으로 넘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단계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막대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난 회차의 유중혁이 그런 시간을 겪었을 리가 없을 터······. 스승의 의문을 이해한 유중혁이 답했다.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을 이용했습니다.”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 흔히 ‘무림인들의 묘지’라 불리는 곳. 그곳을 찾아 들어간 무림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막대한 시간의 감옥 속에서 재능의 벽에 부딪쳐 광인이 되거나, 자신을 좀먹는 수련 끝에 벽을 넘어서 초월좌가 되거나. 유중혁은 둘 중 후자였다. “······대체 얼마나 고된 수련을 거쳤던 것인지 짐작도 되질 않는구나. 거기 몇 년이나 들어가 있었던 것이냐?” “아마 백 년쯤 될 겁니다.” “백 년 만에 3단계라······ 그래서 네놈이 이렇게나 오만해진 게로구나.” 백 년. 보통의 인간에게는 긴 세월이지만, 초월좌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다. 이 세계에는 이백 년, 삼백 년을 살며 무공을 쌓아도 초월좌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가 많기 때문이다. 온갖 영약을 꾸역꾸역 처넣고 육체를 개량해도 넘을 수 없는 벽. 그것이 바로 두터운 초월의 벽이다. 그런데 유중혁은 100년 동안 그 벽을 세 번이나 넘었다. “여차하면 이번에도 시간 단층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미친 생각이다! 시간 단층을 사용하면 영혼에 탁기가 서린다. 시간 단층에 잘못 들어갔다가 미쳐버린 마두들을 보지 못하였느냐? 광인과 초월좌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이제 네놈도 잘 알지 않느냐?” “······시간 단층으로도 지난 회차의 당신을 넘지 못했습니다.” “흥, 당연하지! 날 따라잡으려면 아직 백 년은 이르다!” 씩씩거리던 파천검성이 말했다. “어쨌거나······ 한 번 3단계를 돌파해 봤다니, 그래도 아예 무지렁이인 상태보다는 가르치는 맛이 있겠구나.” 그런데 스승의 칭찬에도 유중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파천검성이 묻자, 유중혁은 결국 이실직고를 했다. 잠시 후, 이야기를 모두 들은 파천검성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탈진한 사이 대오각성을 했다고?” “그게,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3단계를 넘어섰는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파천검성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설마 지금 네놈의 무의식을 믿고 다시 3단계를 돌파할 수 있다 자신하는 것이냐? 그딴 건 빙화신녀 같은 사이비 고수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다시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뭐라?” “이전과 같은 방식은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뻔뻔한 제자의 말에, 파천검성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내가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너도 초월의 벽을 넘었으니 알겠지만, 초월은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모든 초월좌는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초월’할 뿐이다.” “그래도 도움은 받을 수 있습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결국은 만 가지 갈래 중 하나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지. 세상에 같은 깨달음은 없다. 같은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그래도 갈래가 만 가지나 있다면, 개중 하나 쯤은 얻어 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전 회차에서도 하나를 찾았고.” 유중혁은 그 말을 하며, 어쩐지 자신이 김독자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자신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쩌면 같이 다니는 사이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제자를 향해 파천검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느냐? 쉽지 않을 거다. 전 회차에서 겪어서 알겠지만, 본래 [파천검도]는 남자를 위한 것이 아니야.” 유중혁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 회차에서 파천검성의 무공을 배우는 게 무척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회차는 달랐다. “성별의 문제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콧김을 뿜습니다.] 날아든 간접 메시지에, 유중혁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매번 이 순간이 되면 복잡한 감정과 함께 막대한 분노가 차올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활용해야만 했다. “마침 시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경악한 파천검성이 입을 떡 벌렸다.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꺼내 닦으며 말했다. “밖에 있는 녀석에겐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 [‘김독자 공단’에서 당신의 공적을 의심하는 공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독자 공단’에서 ‘사기꾼 김독자’에 대한 설화가 퍼집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나는 낮잠에서 깨어났다. 메시지의 형태를 보아하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단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공단의 지배자가 바뀌었는데도 아직까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사기꾼 김독자’라니······. 내 얼굴도 모르는 녀석들이 날 더 잘 아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김독자. 뭘 하고 있는 거냐.” 툭 건드리는 발길질에 나는 신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유중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아마 파천검성의 고된 훈련을 받고 온 모양이었다.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 “게으름을 피우는군.” “지금은 게으름을 피워야 해. 난 환자니까.” 핑계 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추방자 패널티’로 인한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파천검성에게 괜히 대드는 바람에 회복이 지연된 것도 컸다. 그나마 ‘라마크르의 기린’의 숙련도도 늘고 있고, 설화 파편도 꾸준히 섭취하고 있으니, 회복이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장원 앞쪽의 마당에서 열심히 무공을 훈련하는 두 남녀를 보며 물었다. “저 녀석들은 어때?”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는 장하영이, 죽을상을 한 한명오와 대련을 하고 있었다. 감독관을 맡은 파천신군이 왕왕거리며 초식을 지적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계집애는 제법 재능이 있더군. 괴이한 특성을 이용해 굉장히 빠르게 무공을 습득하고 있다.” “계집애 아냐. 쟤 남자야.” “네놈 눈깔은 가끔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군.” 뭐래 멍청이가. 쟤 남자 맞거든? 원작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한 마디를 쏘아 붙이려는 순간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성좌들과의 일은 어떻게 됐지?” “······고민하고 있어.” 어느새 페르세포네의 메시지를 받은 것도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 되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미식협(美食協)’에 초대하였습니다.] [일주일 뒤, 암흑 차원의 오로성(五輅城)에서 미식협의 축제가 열립니다.] [오늘 밤까지 출발 여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미식협으로의 초대.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예상 했지만, 예상보다도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미식협(美食協). 표현 그대로, 미식을 좋아하는 입맛 까다로운 성좌들의 모임. 얼핏 생각하면 ‘별자리의 연회’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별자리의 연회’가 공식이라면 ‘미식협’은 비공식이고, 모임 안에서 벌어지는 이벤트의 강도 또한 차원이 다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합니다.] 무엇보다, 미식협에는 우리엘이 없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제천대성도 없을 것이고, 은밀한 모략가도 없을 것이다. 심연의 흑염룡은······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곳의 분위기는 ‘별자리의 연회’처럼 내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에서 우호적이지 않은 성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중혁이 물었다. “겁먹은 건가?” “그럴 리가.” 겨우 그런 이유로 ‘미식협’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장하영과 한명오의 대련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머리를 연달아 두들겨 맞는 한명오가 침묵에 박자를 넣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던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이곳 때문이군.” “······맞아.” 페르세포네의 메시지에 따르면, 미식협의 축제는 정확히 일주일 뒤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날짜는 정확히 ‘무도 대회’와 겹친다. 즉, 무도 대회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날 나는 <제1 무림>에 없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다녀와라,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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