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234화
[네놈······ 설마 그때 그······.]
부들부들 떠는 도깨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안 좋은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 곁에 두둥실 떠 있던 비유도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다.
41회차의 신유승을 ‘재앙’으로 만들고, 한반도에 강림시켜 그 비극을 초래한 원흉 중 하나가 바로 저 도깨비였으니까.
이름이······ ‘바울’이었던가?
분명 연옥에 들어가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역시나······.
관리국 처벌은 죄다 솜방망이다. 무림 재개발팀에 들어가는 게 무슨 처벌이야?
“안 본 동안 얼굴 많이 삭았네?”
[으으, 그으으으으······!]
“그땐 그나마 중급 도깨비였잖아. 지금은 보아하니······ 하급?”
[네놈! 네놈······!]
흥분하는 꼴을 보니 다시 ‘독대’를 요청해서 한바탕 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 이 자식 패고 설화도 받았었는데, 혹부리들은 그 설화 잘 돌려보고 있으려나?
[그만하고 물러서라, 바울.]
씩씩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바울을 대신해, 다른 도깨비가 앞으로 나섰다.
[혹시 ‘김독자’님이십니까?]
자세히 보니, 이 도깨비도 인상이 낯익었다. 목소리도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
어? 잠깐만······ 이 녀석?
“어, 너 그때 걔지? 비형 밑에서 일하던······. 이름이······.”
[영기입니다. 역시! 김독자님이셨군요!]
도깨비가 반색하며 나를 반겼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비형의 밑에서 하위 채널을 담당하던 도깨비 영기.
[살아 계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뵐 줄이야······!]
“비형은 잘 지내?”
[독자님이 사라지시고 눈에 띄게 침울해지셨습니다.]
그 비형이 침울해졌다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새 비형 녀석이랑 정이라도 들었던 모양이다.
“너도 제법 말쑥해졌다? 그땐 시나리오 갱신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아하핫. 부끄럽게 언제적 이야기를······ 저도 이제 어엿한 중급 도깨비입니다.]
중급 도깨비라.
이 녀석도 한반도 시나리오에 있었으니, 비형처럼 고속 승진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봤자 아직 1년도 채 안 된 일들인데.
[그런데 독자님. 스킬을 파시겠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금세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영기.
어리숙하든 어떻든 도깨비는 도깨비다.
이거 방심할 수 없겠는데.
“말 그대로야. 내가 파천검성 설득해서 스킬을 팔도록 해줄게.”
[독자 님께서 그걸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스킬 뭐 필요한건데? [주작신보]? 아니면 [백보신권]?”
[백보신권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필요한 건······.]
“[파천검도]인가.”
내 말에 영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다.
파천검도. 지금의 파천검성에게 파천(破天)의 이름을 하사한 무공.
<제1 무림>의 누구라도 탐하지 않을 수 없는 최상위급의 무공이, 바로 유중혁의 파천검도다.
곁에 있던 파천신군이 그르렁거리려는 기색이 보여서, 나는 재빨리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좋아. 내가 팔아줄게. 아니, 팔아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줄 수도 있어.”
내 말에, 파천신군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영기도 깜짝 놀란 듯 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대신, 내 부탁을 두 개 들어주는 조건이야. 우선 첫 번째······ [파천검도]를 너희가 곧 오픈할 시나리오의 상품으로 내걸어.”
[예?]
나는 영기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파천검도]인데, 내가 그냥 내줄 리가 있겠냐?
“너희 조만간 ‘무도 대회 시나리오’ 열 거잖아? [흑천마도] 걸고.”
[그, 그걸 어떻게······!]
“뭘 그렇게 놀라? 맨날 하는 거면서. 무림 단골 시나리오잖아. 무림의 보검이 나타나고, 그거 가지겠다고 무림인들 죄다 몰려와서 피터지게 싸우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흑천마도에 대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무도 대회는 유중혁이 <제1 무림>에 올 때마다 반복해서 참가했던 이벤트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작가한테 제발 무도 대회 좀 스킵해달라고 댓글 단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아무튼 파천검성의 무공도 그때 상품으로 걸어. 1등 상품으로 걸면 되겠네.”
영기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아마 녀석으로서는 반가운 제안일 것이다.
어차피 파천검성의 무공을 사들여서 도깨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그 무공을 걸고 대형 시나리오를 굴려 추가 구독좌를 확보하거나,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무공을 비싼 값에 판매하거나.
영기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를 계산하는 중일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손해볼 게 없지요. 무공 구입비도 절약하는 셈이니까. 단······.]
“단?”
[부탁이 두 개라 하셨으니, 두 번째 조건이 뭔지도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 신중함에 나는 옅게 웃었다.
중급 도깨비가 되더니 꽤 영리해진 모양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간단해. 이 장원의 모두를 ‘무도 대회 시나리오’에 참가시켜 줘.”
[이 장원의 전부를······?]
순간, 영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제야 내 계략이 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왜지?”
[다른 화신은 몰라도, 파천검성 본인은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만약 파천검성이 무도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우승자는 파천검성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자연히 무도 대회의 참가자는 줄어들 거고, 도깨비들로서는 손해를 감수하게 될 것이다. 나는 크게 양보하듯 말했다.
“그럼 파천검성은 빼고.”
[그럼 좋습니다. 무도 대회 시나리오는 2주 뒤입니다. 그때까지 파천검성의 스킬을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영기에게, 나도 호응해주었다.
“알겠어. 시나리오 초대 제대로 하는 거나 잊지 마.”
[물론입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지요.]
“비형한테 안부 전해 줘.”
[하하, 알겠습니다.]
일이 잘 풀린 게 기쁜 모양인지, 영기는 희희낙락 웃으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뒤따라온 도깨비들도 함께 떠나기 시작했다. 바울 녀석은 끝끝내 나를 노려보며 가길래, 나도 녀석을 있는 힘껏 쏘아봐주었다.
잠시 후, 모든 도깨비들이 사라지자 곁에 있던 장하영이 내 옷깃을 잡아 끌었다.
“야, 지금 대체 뭐한거야? 무공을 팔아? 무도 대회를 열어? 대체 뭔 짓을······.”
왕왕! 왕왕왕!
「우리 무공을 팔겠다니!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멍하니 내가 하는 꼴을 보고 있던 파천신군도 뒤늦게 반응해왔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겠지.
“김독자!”
······역시나.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달려온 유중혁이 내 멱살을 붙잡더니, 일생일대의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나를 마구 흔들었다. 나는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펄럭거리며 말했다.
“이거 좀 놓고 말해.”
“닥쳐라! 네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무공을 팔겠다니······!”
“진정 좀 해. 너 때문에 저지른 거잖아, 인마.”
“······뭐?”
“방금 우리가 얻은 게 뭔지 모르겠냐?”
내 말에 유중혁이 손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리고 뒤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무도 대회’가 시작됩니다.]
도착한 시나리오의 세부사항을 읽는 듯, 잠시 말이 없던 유중혁이 이내 조용히 중얼거렸다.
“······흑천마도?”
“그래. 갖고 싶다며.”
”······.“
”잘 보면 마혼단도 있을 거야. 그건 3등 상품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를 보는 유중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서 힘이 풀린 녀석이 스르르 나를 놓았다.
자식이, 그렇게 감동할 것까진 없는데.
아무튼 한 녀석은 설득한 것 같고, 문제는 다른 쪽이겠지.
고개를 돌리자, 파천검성이 표정을 굳히고 서 있었다.
「거신(巨神)의 신력을 타고난 존재. 파천검성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神)과 다를 바 없었다.」
멸살법의 묘사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저렇게 서 있을 뿐인데 이토록 위압감이 느껴지다니.
나는 공손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제지간의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구나.”
“제 이야기 좀 들어보고 말하시죠.”
“한낱 무공팔이 따위와 말을 섞을 시간은 없다.”
절진 주변에 있던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파천검성, 언제까지 옛날의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파천검성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휘어지고 있었다.
“그깟 비인부전의 원칙을 지키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대로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데도?”
곁에 있던 유중혁이 정신병자를 보듯 나를 보았다.
“김독자! 더 말하지 마라!”
물론 나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애초에 당신의 진짜 힘은 [파천검도]도 아니잖아요? 초월을 거듭하면서 형(形) 따위는 버린지 오래일 텐데, 그깟 무공 좀 팔면 어떻습니까?”
쿠구구구구!
주변의 땅이 일제히 진동하고 있었다.
급기야 유중혁이 등 뒤로 나를 보호한 채 [천총운검]을 뽑아들었다.
마치, 일대의 중력이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태산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곁에 있던 장하영과 한명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땅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일행은 전멸이었다.
“스승, 잠깐만······!”
유중혁의 외침에도 파천검성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하여간 똥고집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의 격을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츳!
몰아치는 스파크와 함께, 주변의 중력이 일시적으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파천검성을 향해 나는 씩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가 화신체는 별볼일 없어도 무려 설화급 성좌다 이거야.
“아직 무공을 판 것도 아닌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좀 맙시다.”
“숨겨둔 한 수가 있는 놈이었군.”
“어차피 무림 대회만 우승하면 무공은 되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깟 대회, 우승하면 될 것 아닙니까?”
츠츠츠츠······.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인지 파천검성의 기세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물론 진짜 힘을 발휘한다면 나 하나 쯤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중혁이 동료라고 봐주는 거겠지.
“어차피 나는 참가하지 못하는 대회 아니냐.”
“애들 노는데 다 큰 어른이 끼어들면 재미 없죠.”
“무림의 아이들은 너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도 강해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가만히 선 파천검성을 보며, 나는 곁에 있던 유중혁의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었다.
“무도 대회에는 우리 중혁이가 나갈 겁니다.”
그 말에, 유중혁이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당연한 걸 뭘 저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가?
파천검성이 다시 한 번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놈은 아직 약해.”
“당신이 강하게 만들어주면 되죠. 어차피 당신 제자잖아요.”
“난 저놈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적이······.”
그 말에 유중혁이 이번에는 부릅 뜬 눈으로 파천검성을 쳐다보았다.
하여간, 스승이나 제자나 솔직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 중입니다.]
물론, 그 솔직하지 못함이 그들의 미덕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너무 때가 일러.」
「대회에 나가면, 중혁이가 죽는다.」
「녀석은 십대 고수와 겨룰 수준이 아니야.」
아직 이해도가 낮기 때문인지, 파천검성의 속내는 온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국, 이 새침데기 사제를 위해 또 내가 나서야만 한다.
“만약 유중혁을 제자로 받아들이신다면, 당신의 일족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거신들 말입니다. 그간 당신의 일족들을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파천검성이 희한한 것이라도 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일족은 세상에서 절멸했다. 어디에도 거신족은 남아있지 않아.”
“아뇨, 아직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명계의 주인이시여, 아직 보고 계십니까?”
마침 지금 내 채널에는 하데스가 와 있다.
지난 번에 신세도 진 참이니, 제대로 인사를 할 때도 됐지.
하지만 나의 부름에 응답한 것은 하데스가 아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묘한 미소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오랜만입니다. 페르세포네.”
젠장. 이 여왕님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운데.
대체 언제 들어와 있었던 거야?
잠시 눈치를 보던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고 말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역시 페르세포네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문제는, 이 여왕님이 꿍꿍이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조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역시.
“······말씀하십시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성좌들의 축제에 초대합니다.]
성좌들의 축제?
이상하군.
지금은 ‘별자리의 연회’가 개최될 시기가 아닐 텐데?
내 의문에 대답하듯, 페르세포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미식협(美食協)’에 초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