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233화 Episode 44. 사기꾼 유중혁의 스승, 파천검성은 인내심이 강하다. 100년 전에도 그랬고, 200년 전에도 그랬다. 그렇기에 그녀는 검의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었다. 많은 무림인들이 자신의 무공을 팔고 무림을 떠날 때도, 이곳에 홀로 남아 초월의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놈은 대체 뭐냐?” 쿡. 쿡. 큼지막한 손가락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유중혁의 볼을 몇 번이고 찔렀다. 그저 손가락일 뿐이지만 초월좌의 손가락이었다. 그러니, 아프지 않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두 연놈이 똑같구나.”」 그것은 언젠가 무림 십대 고수 중 하나인 천마가 남긴 말이었다. 아마도, 천마는 사람을 정확히 보았다. “한마디 대꾸조차 없구나. 말하지 않으면 볼기짝을 때리겠다.” 파천검성은 그 말과 함께 커다란 곰방대를 들어 올렸다. 전신의 혈도가 제압 당해 꼼짝도 못하는 유중혁의 엉덩이가, 철썩하고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김독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철썩! 철썩! 철썩! 소리는 장난 같았지만, 그에 담긴 공력도 장난은 아니었다. 이윽고 유중혁의 입가에 핏줄기가 맺혔다. 그쯤 되자, 파천검성의 아미도 묘한 곡선을 그렸다. “인물값을 하는 놈이로군.” 조금은 감명 받은 듯한 투였다. “다시 묻겠다. 대체 어디서 파천검문의 무공을 훔쳐 배운 것이냐?” “······.” “솔직하게 말한다면 목숨은 부지해주마.” 그 말에 유중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천검문의 무공은 본래 비인부전(非人不傳). 그러니 문외자인 유중혁은 익혀서는 안 되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파천검성은 목숨을 살려주겠다 말했다. 말뜻은 명확했다. 지금 파천검성은, 유중혁을 자신의 제자로 들이려는 것이다. ‘스승.’ 그런 스승의 심경을, 유중혁은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쇠락해가는 무림에, 제대로 된 제자를 구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과 동류의 무공을 익힌 초월좌가 나타났다. 관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유중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여기서, 김독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파천검성 남궁민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기회를 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분명 파천검성의 환심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흐음, 눈빛이 불타는 듯 뜨겁구나.” “······.” “혹시 나를 사모하느냐?” 이런 와중에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역시 자신의 사부가 틀림없다. 유중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나를 만나면, 당신은 죽게 된다.’ 유중혁은 스승의 마지막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긴 세월의 고련 끝에 홀로 상처받아 비뚤어진 초월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존재. ―멍청한 제자야.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무림 최강자인 천마와 혈마의 합공을 당하며, 홀로 귀환자 연맹과 맞서 싸우던 스승의 모습. ―살아라, 중혁아. 그때 유중혁은 함께 싸우지 못했다. 약했기 때문에. 너무 약했기 때문에. “······너의 눈이 슬프구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흠칫 몸을 떨었다. 파천검성의 맑은 눈동자가 유중혁을 비추고 있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은 인간과 거신족의 혼혈. 그러니 저것은, 네안데르탈 거신족의 능력 중 하나였다. “고독하고, 오만하고, 깊이 상처받았구나.”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명경목(明鏡目). 그 눈으로, 파천검성이 유중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마치 자신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유중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아무 말도······.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메시지에, 유중혁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괜찮을 거라고 말합니다.] ······괜찮을 거라고?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번 회차는 다를 거라고 말합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의 스승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번 회차는 다르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저 녀석이 하는 말은, 어쩐지 믿고 싶어진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날벌레가······ 시끄럽다.” 파천검성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력으로 소리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파천검성 수준의 초월좌가 되면 잠깐이지만 저런 일도 가능해진다. 도깨비가 채널 주파수를 조정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김독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스스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내 이름은 유중혁.”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유중혁이 숨을 삼켰다. “나는 당신의 제자였다.” “흐음······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너 같은 이를 본 적이 없어. 물론 제자로 둔 기억도 없다.” “말 그대로다. 나는 당신에게 무공을 배웠······.” 유중혁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설화, ‘파천검성의 제자’가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입술이 강제로 뒤틀리며 말의 어미를 바꾸었다. “······습니다.” 유중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난 회차에서 파천검성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는 ‘회귀자’라고 했지. 그렇다면,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구나. ―다음 회차에는 당신 제자 안 해. ―앙칼진 녀석. 말이라도 곱게 하면······ 존댓말은 대체 언제 입에 붙는 거냐? 다음 생에선 붙는 거냐? 아마도 이 설화가 남은 것은, 그때 파천검성과 나눈 대화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화신 ‘파천검성’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때 자신과 함께 했던 파천검성은 이제 없다. 그럼에도, 이 설화는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다. ―그때도, 다시 한번 내 제자가 되어라.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낡은 기억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간접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김독자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동료라.’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유중혁은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합니까?” “물론 궁금하다, 몹시.” “그럼 정신 장벽을 열겠습니다. 나를 엿보십시오. 당신의 명경목이라면 가능할 테니까.” “······흐음. 명경목도 알고 있다?” “딱 5분입니다. 그 이상은 줄 수 없습니다.” 파천검성의 눈빛이 의심의 빛으로 물들었다. “이상한 수작을 꾸미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수작을 꾸며도, 어차피 당신이라면 제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도발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파천검성의 눈썹이 움찔했다. “좋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성좌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초월좌의 존재를 엿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갑자기 무림에 나타난, 자신과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초월좌. 궁금증이 도지지 않을 턱이 없었다. “내가 너를 보겠다.” 이윽고 파천검성의 명경목이 빛을 발했다. 쿠구구구구······! 유중혁은 자신의 머리털이 모조리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명경목을 통한 기억 전이는 그만큼이나 위험하다. 유중혁 자신에게도, 파천검성에게도. 그럼에도 유중혁은 저질렀다. 어쩌면, 파천검성의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다. 자신이 본 것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유중혁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이 도박이 성공한다면, 그는 파천검성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잠식하는 명경목의 맑은 기운이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십여 분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우우우웅······. 명경목의 빛이 완전히 꺼졌음에도, 파천검성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 걸까? 아니면······. 천천히 고개를 드는 파천검성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3회차를 거치는 동안 처음 보는 표정. 그리고 잠시 후에야, 유중혁은 그 표정의 의미를 깨달았다. “다신 나의 제자가 되지 않겠다더니······.” * 유중혁과 파천검성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생했다.” “······어설픈 위로는 집어 치우십시오. 당신이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좋아. 틀림없는 내 제자로구나.” 2회차의 파천검성은 죽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의 파천검성은, 2회차의 파천검성 남궁민영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복수는 했습니다. 천마와 혈마는, 35번 시나리오에서 모두 때려 잡았으니까.” “그래. 보았다. 힘들게 이기는 걸 보니 썩 만족스럽진 않더구나.” “그럼 당신이 직접 죽이지 그랬습니까.” 누가봐도 정상적인 사제간의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천검성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많이 변했구나, 중혁아.” “아무것도 변한 건 없습니다.” 그 쀼루퉁한 대답에 파천검성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움막을 감싸고 있던 절진의 일부가 일그러지며, 대형 망원경의 렌즈를 연상시키는 패널이 떠올랐다. 그 작은 패널 위로, 바깥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날 찾아온 것은 저 아이 때문이냐?” 그곳에는 만두를 꾸역꾸역 처먹으며 개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독자가 있었다. 유중혁은 인상을 쓴 채 그 광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친구인 게냐?” “친구 같은 건 아닙니다. 저 녀석은 그냥······.” “벌써 성운들과 대적할 생각을 하다니, 용감한 녀석이더구나.” “······.” “저 녀석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게냐?” 그토록 무뚝뚝한 제자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가 기특하다는 듯, 파천검성은 절진 너머로 비치는 김독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절진의 일부가 흔들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파천검성. 그만 무공을 내놓으시오.] 유중혁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깨비.” 이젠 지겹다는 듯, 파천검성이 말했다. “무공 매입자들이 또 오셨군.” “······예정보다 빠른데, 얼마나 된 겁니까?” “제법 됐다. 이 근처에는 이제 나 밖에 안 남았으니.” 무림의 무공에는 가치가 있다. 어쨌든 모든 무공은 역사를 쌓아 만들어진 일종의 설화니까. 그 연원이 깊은 무공일수록 그 가치는 더욱 크다. 그것을 잘 아는 도깨비들이기에, 파천검성의 무공을 탐내는 것이다. 유중혁이 [천총운검]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저랑 김독자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상대는 도깨비다.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김독자라면 가능합니다.” 유중혁은 스승의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패널로 비치는 도깨비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낯이 익다 싶더니, 본 적이 있는 도깨비였다. ‘서울 돔에 있던 그 녀석이다.’ 아마 김독자라면, 저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화면 너머로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직도 살아 있을 줄은 몰랐네? 벌 받으러 간 거 아니었냐? 역시나, 입 꼬리가 알랑거리는 모양을 보니 벌써 김독자 특유의 ‘엿 먹이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도깨비를 향해, 김독자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벅벅 긁으며 물었다. ―흐음, 그래. 파천검성의 무공을 사러 왔다고? 유중혁은 스승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아마 김독자 선에서 사태는 정리될 것이다.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가 나선 이상 또 요상한 술수를 부려서 도깨비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겠지. 그런데 다음 순간, 김독자가 뜻 모를 미소와 함께 이상한 소리를 했다. ―좋아, 내가 팔게. 파천검성의 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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