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230화 준비는 금방 끝났다. 나는 아일렌에게 [유중혁 공단]을, 그리고 마르크와 몇몇 의원들에게 [김독자 공단]을 맡겼다. ······그보다 [김독자 공단]이라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마계에 정말 그런 이름의 공단이 생긴 건가? 왠지 그쪽 사람들은 불행해질 것 같은데. “젠장, 난 그냥 선술집 주인이야. 정말 그런 걸 시킬 참인가?” “그럼 선술집 운영하듯 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권한 일부를 양도했으니까 치안 정리는 확실히 해주고.” 내 말에도 마르크는 탐탁잖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얼굴 정도는 비치고 가는 게 좋지 않겠소? 공단 사람들이 꽤 혼란스러워 할 텐데.” “당장 거기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어서 그래.” “만약, 새 혁명가가 나오면······.” “지역 전체가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갔으니 당분간 혁명가는 없어.” 내 말에 마르크는 애써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마르크 정도면 잠시 공단을 맡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원작에서도 상처받은 [공단]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마르크였으니까. [김독자 공단]은 이미 유중혁이 일으킨 참상으로 모두 패닉에 빠져 있다고 하니, 더욱 마르크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의원들을 이끌고 [김독자 공단]으로 떠나는 마르크. 그 뒷모습을 배웅하던 한명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출발하지.” “‘우리’라뇨?” 나는 그 뻔뻔함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린 채 한명오를 돌아보았다. ······이 양반은 대체 언제 봇짐을 바리바리 싸맨 거야? “나 혼자 여기 남아 있기도 뭐하지 않은가.” “······.” “그리고 무림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지. 젊었을 적에 무협지깨나 읽었다네.” 사실 한명오가 왜 따라가려는 것인지는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릴 따라가려는 건 한명오가 아니라 한명오의 보스일 것이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마왕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봅니다.] 우리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수정본의 3회차 전개를 모르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아스모데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당장 우리엘과 아스모데우스보다 걱정되는 것은 다른 쪽이다. “떨거지가 많군.” “세상만사가 다 불만이지?” 서로를 노려보는 유중혁과 장하영.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천검성을 만나는 게 목적이니 유중혁은 당연히 같이 가야 했고, 연락책으로서 장하영도 꼭 필요했다. 무엇보다 이번 여정은 장하영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출발하죠.” 내가 허공에 신호를 보내자, 비유가 “바앗”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소용돌이치며 생성된 포탈. [그레이트 홀]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우리 네 사람이 건너가기엔 충분했다. 성질 급한 유중혁은 포탈이 나타나자마자 들어갔다. 입자 단위로 팽이 치며 사라지는 유중혁을 보며, 장하영이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나 마계 벗어나는 건 처음인데.” 첫 번째 차원 이동을 겪은 뒤, 장하영은 줄곧 마계에서만 살아왔다. 격려 차원에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한명오가 입을 열었다. “나만 믿게. 내가 소싯적에 읽은 무협지만 삼백 권이 넘어. 이번 여정은 나만 따라오면 될 걸세.” 호언하는 한명오를 보며 속으로 미소지었다. ······무협지 삼백 권이라. <제1 무림>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 잘도 저런 소릴 하지. “갑시다.”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포탈로 뛰어들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든다 싶더니, 언젠가 보았던 우주의 정경이 펼쳐졌다. 한 줄기 빛이 된 내가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피고 지는 <스타 스트림>의 은하. 몇몇 별들이 흘끗 나를 바라보며 지나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까칠한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다. “웩, 어지러워······.” 곁에선 장하영이 헛구역질을 했고, 한명오는 등산이라도 나온 듯한 기세로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파천검성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오오, 이곳이 바로······.” 과하게 들뜬 한명오가 아이 같은 얼굴로 우리를 재촉했다. ‘멸살법’의 시작을 목격한 나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싶다. [청룡성에 도착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하늘에 열렸던 포탈이 닫히자, 나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청룡성(靑龍城)은 <제1 무림>의 4대 성채 중 하나다.」 ‘멸살법’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제 1무림>에서도 가장 커다란 성 중 하나였다. 실제로 광장에서 보이는 도시의 규모만 봐도 어마어마했다. 중앙을 차지한 대궁(大宮), 그것을 중심으로 펼쳐진 널따란 시가지. 각종 무공서를 판매하는 시장가와 떠들썩한 대로변. 크고 작은 장원 앞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무림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딱히 적의를 드러내는 이들은 없었지만, 그들이 품은 기도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강자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제1 무림>의 정경에 그리운 표정을 짓습니다.] <제1 무림>은 무수한 강자들이 나고 자란 곳. 어쩌면 성좌들 중에도 이곳을 지나친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분위기에 압도된 듯 입을 벌린 채 주변을 살피던 장하영이 물었다. “······중국풍인데? 원래 그런 거야?” “원래 ‘무협’이 그쪽 배경이니까.” 그렇다고 마냥 중국이라고 보기도 뭐한 것이, 저 붉은 등은 일본풍이고 군데군데 섞인 건축 양식은 동남아의 것이었다. 물론 중국만의 것도 있다. 가령 저 차이나 드레스라든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흘겨봅니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걸었다. 성채가 너무 넓어서 정확히 감은 못 잡겠지만, 내가 읽은 부분이 맞다면 ‘파천검성’의 무관도 이 지역 일대에 있을 것이다. 일단은 먼저······ 시장가 쪽으로 나가볼까.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제1 무림>의 요리도 먹어보면 좋겠다.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뜨끈한 닭 국물과 만두다. 그 두 음식은 유중혁이 <제1 무림>에서 제일 많이 먹은 메뉴였다. 걸핏하면 뜨끈한 닭 국물에 만두를 먹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밤에 그 부분을 읽을 때면 허기진 배를 붙잡고 편의점에 가서 천 원짜리 찐빵을 사 먹었다. “흠, 무공을 훈련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만.” “원래 무공은 그렇게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무협지를 삼백 권이나 보셨으면 잘 아실 텐데요.” “그래도 무림 고수는 있겠지? 무관도 있을 거고?” “있죠, 물론.” “기대되는구만.” 나는 가엾은 눈으로 한명오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양반은 이 ‘무림’이 자기가 아는 그 ‘무림’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오의 기대는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한명오는 뭔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지나가는 화신을 유심히 노려보며 물었다. “왜 무림인들이 청바지를 입고 있는 건가?” “왜, 무림인은 청바지 입으면 안 됩니까?” “아니, 이 시대 중국에 청바지가 있을 리가······.” “우리처럼 관광객들인가 보죠.” 청바지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이나 큼지막한 헤드폰을 쓰고 다녔고, 스마트폰 비슷한 기기들을 사용하는 화신들도 보였다. 소위 무림풍 패션을 추구하는 이들도 보였지만,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우리처럼 세계관과는 맞지 않는 복색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자신의 로망이 파괴되는 것에 절망한 한명오를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상상하신 건진 알겠는데, 요즘 ‘무림’은 다 이렇습니다.” “그, 그런 건가?” “당연하죠. 요즘이 어떤 시댄데.” “이건 내가 원하던 무림이 아니야······.” “실제로 보면 뭐든 실망인 법이죠.” 내 핀잔에도 불구하고 한명오는 포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새 통역 스킬까지 익혔는지, 저잣거리의 상인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말투도 제법 무림 본새가 났다. “여기, 무관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허름한 가판대 위에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고 졸고 있던 상인이 한명오의 말에 끔뻑 눈을 떴다. “음? ······초행길인가 보구만.” “그렇소.” “무관은 왜? 무공 배우시게?” “무림에 왔으면 검술 한 초식은 얻어 가야 사내 아니겠소?” “크하하, 그렇지. 그렇지. 대협 말이 맞소이다.” 대협이라는 말에 한명오의 입꼬리가 헤죽 올라갔다. [등장인물 ‘추국명’이 ‘흥정술 Lv.4’을 발동합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정말 질이 좋지 않은 경우였다. “그런데 대협께서 좀 오해가 있으신 듯하구만, 요즘은 ‘무관’에서 무공을 배우지 않소.” “응? 그게 무슨 소리요?” “하하, 땀내 나는 전통 무공 교수법은 저기 100번대 깡촌 무림계에서나 쓰는 거지,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무공 안 배워. 대협이 세상 물정이 어두운 듯하여 내가 특별히 알려주는 거니까 운 좋은 줄 아시구려.” 당황한 한명오가 되물었다. “그, 그럼 요즘은 어떻게 무공을 배우는 거요?” “요즘은 이걸 쓰지.” 상인은 그 말과 함께 물품에 쌓인 먼지를 탁탁 털어 보였다. 상인이 내민 박스에는 작은 mp3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천지빙령검(天地氷靈劍) 무공 구결 세트] ―무림 십대 고수 빙화신녀(氷花神女)가 직접 녹음한 두뇌 새김 무공 구결 각인 포함! ―무공 구결은 반복 학습이 최고입니다! 어릴 적부터 반복 학습으로 무공 구결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세요! ―6개월 할부 가능! 매달 500코인으로 누구나 고수가 될 수 있다! “······이게 뭐요?” “요즘 젊은 고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요. 천 번 만 들으면 누구나 일류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소문난 물건이지.” “그럴 리가······ 정말이오?” “당연히 진짜지. 내가 무림 생활만 10년인데 대협한테 거짓부렁을 하겠소? 여기 오면서 이어폰 꽂고 다니는 젊은이들, 혹시 못 봤소이까?” “엇, 봤습니다. ······설마?” 얼빠진 한명오의 말에 상인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자투리 시간에 이거 듣고 있는 게야. 요즘은 젊은 것들이 더 독해.” “허······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내가 시대에 뒤처졌군.” “허허, 여기 한정판은 특별히 빙화신녀가 직접 녹음한 버전이라 듣기도 좋아. 빙화신녀 알지? 무림인 공식 고막 여친. 자, 여기 들려줄 테니 한 번 들어보시게. 잠 안 올 때 들어도 아주 효과가 좋아.” 한명오가 홀리듯 이어폰을 귀에 꽂는 동안, 곁의 장하영도 상인의 물품을 뒤적이고 있었다. [환영비객(幻影飛客) 홈트레이닝 6개월 세트.] ―당신도 만 번 만 따라 하면 암기의 달인이 될 수 있다! [남궁가의 제왕검학(帝王劍學) 무작정 따라하기!] ―남궁가 최고 강사진의 온라인 강의로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로 절정 고수가 되세요! ―24시간 질의응답 게시판 운영중. 주화입마 걱정 없음. 언제든 마음 놓고 상담하세요! 그러고 보니 지금쯤 <제1 무림>에서 한창 이런 게 유행할 때였다. 소위 무의식을 자극해서 무공을 익힌다느니, 집에 앉아 강의를 들으며 편하게 무공을 수련한다느니······. 함부로 상품을 헤집는 장하영을 향해 상인이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어이 거기, 소협인지 소저인지······ 아무튼. 안 살 거면 함부로 뒤적이지 마. 비싼 거야.” “진짜 이런 걸로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여기 평들 안 보이나? 전부 전문 기관에서 인증한 상품들이야.” ‘멸살법’을 모두 읽은 나도 죄다 처음 들어보는 기관이었다. 일반 무림인들의 평들도 보였다. ―백영신동(12세, 남) : 친구가 듣길래 따라 들었는데 좋아요. 수강 3개월째부터 계속 학관 1등 하고 있습니다. 짱!! ―탐랑미요(32세, 여) : 솔직히 3주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6주째 부터 갑자기 귀가 뚫리더니 모르던 무공 구결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화왕방군(24세, 남) : 진짜개쩝니닼 이거 듣고 시나리오 개쉬워졌어요. 시나리오 난이도 어쩔?? 이젠 도깨비가 무섭지 않아!!! 누가 봐도 허위 광고였지만, 사실 처음 <제 1무림>에 방문하는 화신들이라면 그냥 넘기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지금껏 힘든 시나리오를 돌파하며 여기까지 온 화신들이다. 그런데 시나리오 난이도를 하향시킬 정도로 심오한 무공을 코인 몇 푼으로 쉽게 배울 수 있다니, 다들 흔들리지 않을 턱이 없다. 이런 무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던 한명오 부장도 어느새 완전히 넘어간 뉘앙스였다. “자네들도 한 번 들어보겠나? 뭔가 무공이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 “허허, 대협은 무공발이 좋은 모양이구만. 보통 3주 정도는 명현현상이라고 헤매는 기간이 있는데 말이야.” “하핫, 그렇습니까? 저, 이거 일시불로 얼마면―” 아무래도 이쯤에서 말려야 되겠다 싶어서 나서려는 찰나, 뒤쪽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딴 걸 듣는다고 고수가 될 수 있었다면 <제 1무림>이 멸망하는 일은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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