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229화
나는 쏟아지는 원망과 분노의 파도를 간신히 거스르며, 뒤돌아서는 징벌자를 향해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
그런데 그때, 머릿속으로 성좌들의 메시지가 밀려들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경악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력에 가슴을 졸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눈치에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응? 뭐?
갑자기 무슨······.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채널에 입장합니다.]
······아,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벌써 아스모데우스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우리엘이 다시 채널에 입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어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들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킬킬 웃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운 ‘아스가르드’를 향해 삿대질을 합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들 때문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왜 삿대질을······.
성좌들의 메시지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징벌자는 빠르게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앗, 기다리라니까!”
아쉬웠다. 좋은 동료를 얻을 기회였는데.
뒤늦게 쫓아온 장하영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때? 엄청 예쁘지?”
“쟨 언제부터 나타난 거야?”
“사흘 전인가 나흘 전부터. 미색은 물론이고 실력까지 출중한 녀석이라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어. 신출귀몰한 것도 그렇고.”
“내일도 올까?”
검술의 종류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만한 발검이라면 분명 ‘마왕 선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어디서 저런 인물이 나온 거지? 분명 ‘멸살법’ 원작에는 없었는데······.
“매일 왔으니, 아마 내일도 올 거야. 그나저나 단단히 반했나 봐?”
“그런 게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다 안다고. 너 여자 안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또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디서 들어온 헛소문인지 알 것 같네.
“오랜만입니다, 우리엘.”
*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엣헴 하고 콧대를 세웁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우리엘의 간접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장하영과 치료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공을 칭송합니다.]
주로 들은 이야기는 유중혁을 설득해 마계까지 놀러온 우리엘의 천방지축 모험담이었다.
역시나, 나를 구하도록 유중혁을 설득한 건 우리엘이었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 녀석이 나를 구하겠다고 제 발로 여기에 올 턱이 없으니까.
“상징체는 현재 수선 중입니다. 끝나면 다시 그쪽으로 현현하실 수 있을 거예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감동 받아 눈물을 글썽입니다.]
“근데 유중혁한텐 무슨 개인 시나리오를 주셨던 겁니까? 대천사가 함부로 마계에 개인 시나리오를 풀어놓는 건 위험할 텐데요.”
사실, 우리엘 정도의 고위급 성좌가 마계에 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성운 <에덴>과 72마왕의 마계는 휴전 중인 상태니까.
아마 우리엘이 제대로 된 화신체 대신 허접한 상징체로 현현한 것은 그걸 의식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우리엘이 아스모데우스에게 그렇게 무력하게 당할 일도 없었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차피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유중혁과 우리엘의 링크가 끊기면서, 우리엘의 개인 시나리오는 강제로 말소되었을 것이다.
유중혁도 다른 개인 시나리오를 받았다고 말했었지.
가만히 나와 우리엘의 이야기를 듣던 장하영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근데 너 어떻게 성좌들이랑 그렇게 친해?”
“나도 성좌거든.”
“······뭐? 농담이지?”
“내가 말 안 했었나?”
장하영은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좌면······ 저 하늘에 있는 그런 거지? 오늘 아침에 나타났던 그 미라 같은 애들.”
“보통은 그렇지.”
“그 왜, 수식언이란 것도 있고. 그 수식언의 맥락에 별자리를 짓고 살아간다는······.”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이 있었지.
성좌들의 진체는 수식언의 맥락 속에 있다고.
나야 성좌가 되자마자 타락하는 바람에 그 맥락이란 걸 구경도 못 해봤지만······.
“맞아. 그게 성좌지.”
“넌 수식언이 뭔데······요?”
갑자기 내가 성좌라는 걸 의식했는지, 장하영은 무척 조심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내가 누구인지 알면 엄청 경악할 텐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장하영’을 경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장하영’에게 친한 척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읏······!”
우리엘에게 뭔 협박을 당했는지, 장하영이 재빨리 내게서 한 걸음을 떨어졌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천사 같은 미소를 짓습니다.]
저 천사는 대체 얘한테 뭔 소릴 한 거야?
치료실로 들어가자,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늦었군.”
“뭐야, 벌써 와 있었냐?”
어딜 다녀온 건진 모르겠지만, 유중혁의 부츠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새 차도 새로 타왔는지 차종도 바뀌어 있었다.
이곳의 허브티 같은 건가?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미감이 엄청 까다로웠지.
유중혁이 내 뒤쪽에 있는 장하영을 흘끗 보며 말했다.
“아까 말한 게 그 자인가?”
“맞아.”
내가 대답하자 장하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쪽이 새로운 공작님? 안녕, 난 아슬란이야.”
“버릇이 없는 놈이군.”
“미안, 이런 년이라서.”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기류가 보여서, 내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설마 둘이 처음 보는 사이야? 유중혁 너 며칠 전에 왔다며?”
“한가하게 인사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래서, 저 남잔지 여잔지 모를 녀석이 새로운 동료인가?”
“맞아.”
“난 약한 녀석은 싫다.”
“······나 약하지 않거든?”
장하영이 가슴을 펴며 말했지만, 사실 지금의 장하영이 유중혁의 눈에 찰 턱이 없었다. 아무리 ‘정체불명의 벽’을 갖고 있다곤 해도, 아직 초월좌인 유중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으니까. 둘 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어쨌든 첫 번째는 유중혁이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유중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린 보람이 없군. 설마 저 얼간이가 전부는 아니겠지?”
나는 발끈하는 장하영을 만류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 하나 더 있어. 아직 얘길 해 보진 못했는데, 괜찮은 녀석을 발견했거든.”
“누구지?”
“징벌자란 녀석이야. 얼마 전에 나타난 녀석이라는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내 말에 유중혁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 녀석은 무리다.”
“뭐? 왜?”
“나도 포섭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뭐라고 한 건데? 보나 마나 까칠하게 대한 거 아냐? 또 ‘동료가 되지 않으면 죽이겠다’ 뭐 그딴 소리로―”
일순 유중혁의 표정에 서린 분노에 나는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여자와 은원이 있다거나 그런 거겠지.
유중혁에게 원한을 사다니, 대체 누구지 그 여자?
원작에도 없었던······ 아니지, 원작이 조금 바뀌었으니 새로운 이야기가 생겼을 수도 있겠구나. 조만간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데······.”
내 시선을 받은 장하영이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뭐.”
“전에 시킨 건 제대로 했어?”
“했어.”
“내가 말했던 초월좌는?”
“응답 왔어. 올 수 있으면 와 보라던데.”
나와 장하영의 대화를 듣던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초월좌? 무슨 소리지?”
“아, 이 녀석은 다른 시나리오 차원의 존재들과 연락할 수 있거든. 꽤 쓸만하지?”
어떻게든 장하영의 능력을 어필해서 호감을 사려는 계책이었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여전히 뚱했다.
“그래서?”
“동료를 꼭 화신들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잖아. 성좌나 초월좌도 모집하면―”
“성좌들은 안 된다. 그놈들은 믿을 수 없어.”
“그럼 초월좌는 괜찮은 거지?”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1 무림>에 가볼까 해.”
“······<제1 무림>?”
“거기가 초월좌들이 제일 많은 곳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겠지만, 초월좌라고 모두 성좌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다. 그곳에는 거악(巨惡)과 거마(巨魔)들도 많아.”
“그렇겠지. 하지만 협객들도 있잖아?”
“협객이라고 해서 다 네놈을 도와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무림에서 협객 놀이를 하는 녀석들 중 제대로 된 인간을 본 기억은 없다.”
으드득 이를 가는 유중혁의 목소리에서 깊은 원한이 느껴졌다.
하긴, 지난 회차에 이미 <제1 무림>을 겪어본 유중혁이라면 무리도 아니겠지.
하지만.
“글쎄, 적어도 한 사람이라면 도와줄 것도 같아.”
은은하게 일그러지는 유중혁의 표정을 보며, 나는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나는 파천검성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데.”
파천검성(破天劍聖).
‘멸살법’을 통틀어 최강의 초월좌를 꼽으라면 반드시 손꼽히는 존재.
비록 지금 시점에선 그 정도 위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력만큼은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파천검성은, 다름 아닌 유중혁의 ‘사부’였으니까.
“왜 하필 그자에게?”
“정(正)에도 사(邪)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니까. 그리고 기왕 청하는 거, 당연히 고수를 고르는 게 맞잖아?”
유중혁의 표정은 징벌자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도 볼 만했다.
저렇게 당황하는 유중혁의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진풍경이로군.
창백해진 유중혁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절대로 안 된다.”
“왜?”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라. 그 인간에겐 절대로······.”
물론 ‘멸살법’을 읽은 나는, 왜 저렇게 유중혁이 질색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번만큼은 내 계획대로 움직여줘야 하니까.
“아냐, 가야 해. 벌써 티켓도 끊어놨거든.”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비유가 소리를 냈다.
[바앗!]
뒤이어 떠오르는 시나리오 메시지.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왕래가 잦은 시나리오 지역인 <제1 무림>은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포탈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5만 코인이라는 거금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것만큼 큰 장점은 없다.
“잘 생각해라 유중혁. 꼭 파천검성이 아니더라도, 거기라면 쓸만한 것들을 꽤 구할 수 있어.”
<제1 무림>의 주거지는 20번대 시나리오부터 40번대 시나리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드는 장소. 지금 시점에 그곳에 간다면, 분명 이용할 수 있는 정보나 히든 피스들이 다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한참이나 고민하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언제 갈 거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