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3화
어쩌면 길게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합니다.]
[2번 책갈피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이 낮아 활성화 시간이 단축됩니다.]
[활성화 시간 : 1분]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다거나, 피 튀기는 일생일대의 혈전을 벌인다거나.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등장인물이 가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무기연마 Lv.1」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전력을 다했고,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근력을 쥐어 짜내 질주했고, 이를 악문 채 날아드는 촉수를 감당했다.
스각!
모든 전경이 스쳐갔다. 남은 것은 예리한 백광이 남긴 잔상과, 무언가를 베었다는 확실한 감각 뿐.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2번 책갈피가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한 방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성좌님들. 다들 방금 보셨어요? 내,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도깨비 비류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은 모양새였다. 사실,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눈을 부릅뜹니다.]
그 강력하다는 7급 악마종이, 내 눈앞에 촉수를 뒤집고 누워 있었으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만족한 듯 머리털을 뽑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잘려나간 촉수들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주변의 땅강아쥐들은 싸움의 여파로 죽거나 달아난 지 오래였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어둠 파수꾼만이 땅을 기며 입술을 실룩이고 있었다.
“······키. 키이. 키.”
본래라면 7급 악마종은 지금의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했다.
나는 유중혁처럼 강하지도 않고, 이현성처럼 좋은 배후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까.
[강박증이 있는 한 성좌가 당신의 준비성을 칭찬합니다.]
[2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것은 오직 ‘정보’ 뿐. 하지만 때로 ‘정보’라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기이이잉.
바로 그 정보의 결과물이,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백광검(白光劍)이니까.
[시, 시나리오 초반부터 ‘에테르 블레이드’라니······ 서, 성좌님들. 이거 실환가요?]
다행히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충 도깨비 녀석이 한창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에테르 블레이드.
최상급 배후성의 지원을 받는 화신들의 주력 기술이자, 무림계 귀환자들이 흔히 [검강]이라 지칭하는 기술.
“정확히 말하면 진짜 에테르 블레이드는 아니야. 진짜는 이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마, 마력을 흡수해 칼날을 만드는 ‘부러진 신념’에 ‘백청강기’를 실은 거니까······.]
그래도 꼴에 도깨비라고, 완전히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대단해······. 비형 자식 채널엔 뭐 이딴 놈들만 있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 파밧, 하고 ‘신념의 칼날’이 꺼졌다.
[‘부러진 신념’의 내구도가 다했습니다. 이 아이템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쉽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녀석은 제 몫을 해냈다.
“서브 시나리오 끝냈으니 보상 줘.”
[으읏, 그랬지. 기, 기다려 봐!]
비류가 허겁지겁 허공에 뭔가를 입력하자, 곧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만든 시나리오에 감탄합니다.]
생각보다는 소소한 보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어둠 파수꾼’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 그런데 저 녀석은 안 죽이는 거야?]
비류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지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어둠 파수꾼을 일별한 후,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난 불살주의(不殺主義)거든.”
[부, 불살······?]
“뭘 쉽게 죽이지 않는 성격이라.”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럴 줄 알았다며 감탄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보며 음흉하게 웃습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당황한 도깨비 비류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이 녀석을 죽이면 보상이 엄청날 텐데? 지금 죽이면 7급 악마종 최초 살해자니까 부, 분명 7000코인 이상 줄 거라고! 너 7000코인이 어, 얼마나 큰돈인 줄 알아?]
“안 죽인다고. 그보다 보상 상자 열어야 되니까 좀 비켜 봐.”
나는 거슬리는 비류를 눈앞에서 치우며 말했다. 어차피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저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푸욱!
[7급 악마종, ‘어둠 파수꾼’이 사망하였습니다.]
······뭐?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의 도깨비와, 땅강아쥐 칼을 맞고 소멸해가는 어둠 파수꾼의 모습. 그리고.
“하하, 하하하핫! 나, 나도 이제 강해질 수 있다고! 김독자 이 개자식아! 이건 몰랐지!”
문제의 칼을 쥔 채 히죽거리고 있는 한명오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이어서 폭발적인 메시지가 귓가를 잠식했다.
[7급 악마종을 최초로 사냥하였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완수 하였습니다.]
[8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공헌자 : 김독자, 한명오]
아마 이 메시지의 일부를, 한명오 역시 공유하고 있겠지. 막타만 쳤으니 코인은 얼마 못 받았겠지만······.
메시지를 보며 행복해 죽으려고 하는 한명오가 보인다.
“불살주의? 멍청한 놈! 이런 세상에서 불살은 무슨 불살이야!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은 갑이 못 되는 거야! 알아 들었―”
그런데 한명오는 알까.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7급 악마종 ‘어둠 파수꾼’을 사살하여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살해자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권속 살해에 최종 타격을 가한 화신체를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것입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최종 타격자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릴 것입니다!]
[최종 타격자 : 한명오]
“뭐, 뭐야? 이 메시지 뭐야!”
당황한 한명오가 소리를 질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사악함에 감탄합니다.]
“아······ 내가 말 안했나? 일부러 안 죽인 거라고.”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시나리오를 스타 스트림에 추천하였습니다.]
한명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는 살해자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를 실현시킨다.
무슨 일일지는 몰라도, 분명 끔찍한 일을 겪게 되겠지.
돌아보니, 유상아와 이길영이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어 주었다.
“우린 같이 보상이나 열어 보죠.”
*
잠시 후, 우리는 보물 창고를 샅샅이 뒤져 각자 얻은 것을 꺼내 보였다.
“전 이거 찾았어요.”
“저는 이거예요······.”
유상아와 이길영이 찾아낸 것은 각각 작은 팔찌와 낡은 방패였다.
[마력 회복 팔찌]
[낡은 철제 방패]
둘 다 D급의 아이템이었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마력 회복 팔찌]는 누구에게나 유용한 아이템이고, [낡은 철제 방패]는 이현성이 들기에 좋을 것이다.
이름에 ‘철제’가 붙었다고 해서 무시해선 곤란하다. 이계의 철은 지구의 철보다 훨씬 단단하니까.
유상아는 조금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단출하네요.”
단출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은 ‘보물 창고’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휑한 상태니까.
유중혁.
어제 약수 쪽으로 떠났다는 놈은, 아마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악마종과 싸우면 피곤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적당히 기회를 봐서 보물만 훔쳐 갔겠지.
결국 우린 이미 도둑이 털어간 집을 또 터는 강도인 셈이다.
“아직 메인이 남았으니 괜찮습니다.”
나는 창고의 중심에 있던 검은 상자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의 물건은 화로(火爐)였다.
너무 작아서 주머니에도 넣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차마 ‘화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물건.
[마력 화로].
역시 남아있군. 이 아이템이야 말로, 사실 이번 서브 시나리오의 핵심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마력 화로는 1인당 하나만 소지할 수 있습니다.]
분명 유중혁이 하나를 가져갔을 테니, 본래 마력화로는 총 두 개였을 것이다.
“······이게 대체 뭘까요?”
“음, 용도를 조금 알 것도 같군요.”
나는 짐짓 의뭉을 떨며, 마력 화로를 가동시킨 후 죽은 땅강아쥐의 다리 한 짝을 올려 보았다.
사이즈에 맞지 않는 음식을 올려놓은 접시마냥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지만,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땅강아쥐의 다리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와! 맛있는 냄새!”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가 싶더니, 어느덧 땅강아쥐 다리의 색깔이 노릇노릇하게 변해 있었다.
“고기다!”
이길영도 흥분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유상아가 다급히 물었다.
“이, 이거 먹어도 되는 걸까요?”
“제가 먼저 먹어 볼게요.”
나는 적당한 기름기가 도는 뒷다리를 잡고, 통째로 살점을 뜯었다. 살점 사이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육즙······ 나는 씹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역시 책으로 읽는 것과 실제로 맛보는 건 다르구나.
[소수의 성좌들이 군침을 흘립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침을 삼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손톱을 물어뜯습니다.]
······.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메시지.
역시 방송은 먹방이 최고다.
먹을 것 앞에서는 모두가 대동단결이니까.
“먹어 보세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고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흘 간 끼니가 일정하지 않았으니 어지간히들 배가 고팠을 것이다. 계속 넋이 나가 있던 한명오도 언제 다가왔는지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도, 독자 씨······ 아, 아깐 내가 잠깐 미쳐서······.”
“먹어요. 눈치 보지 말고.”
“고, 고마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요.”
“뭐, 뭣······!”
한명오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한명오는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아스모데우스의 추격은 유중혁이라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니까.
우리는 각자 다리 하나씩을 잡고 으적으적 뜯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배가 고파서 다 같이 고기를 뜯고 있는 꼴이라니. 역시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식사에 열중했다. 마력 화로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불빛 때문일까. 어쩐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무언가를 죽이고, 그것을 잡아먹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지금까지도 줄곧 그래왔는데, 왜 이제와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유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핫, 하며 정신을 차린 유상아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전 한심해요.”
“······예?”
“이렇게 독자 씨가 힘들게 잡아온 걸 돼지처럼 우걱우걱 먹기나 하고 있고······.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아뇨, 유상아 씨. 그건.”
“근데 독자 씨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을 요리하는 법도 아시고······.”
“아, 그건······.”
“역시! 평소에 판타지 소설을 열심히 보신 덕이겠죠? 정말, 저는 세상이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이 스페인어나 외우고 있었는데.”
그 유상아한테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위로차원에서 입을 열었다.
“유상아 씨도 평소에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악마종의 언어를 알아들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물론,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런가······. 고마워요, 독자 씨······.”
나는 글썽이는 유상아에게 살짝 웃어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들은 다시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일행의 뒤쪽으로 향했다.
사실 [마력 화로]도 중요하지만, 내가 진짜 목적으로 삼았던 아이템은 따로 있었다.
나는 [마력 화로]를 담고 있던 ‘검은 상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거다. 틀림없어.
[마력 화로]를 가져간 유중혁도 아마 이건 몰랐을 것이다. 이 창고의 진짜 보물은 바로 이 ‘검은 상자’라는 것을.
원작에서 유중혁이 이 물건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무려 6회차의 회귀를 거친 뒤다.
이걸 최초로 발견한 게 누구였더라. ‘비천호리’였나? 음, 간만에 떠올리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대충 이런 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거기, 그러니까. 초반 지역들 돌다 보면 되게 이상한 상자가 있잖아요. 거기 물건을 넣었더니······.”」
유상아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그 상자는 어디에 쓰시게요?”
“네? 아, 이건······.”
유상아가 상자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잘 보니 상자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설마 이것도 읽을 수 있는 건가?
“랜덤······ 아이템 박스?”
망할.
이래서 외국어 능력자는.
“어······ 저······ 음.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나는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그런데 유상아가 선수를 쳤다.
“어서 써 보세요, 독자 씨!”
“······그래도 되겠습니까?”
끄덕끄덕. 이길영의 고개도 힘차게 아래위로 흔들렸다.
“우리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이곳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모두 독자 씨가 가지세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래, 어차피 들켜 버린 거, 그냥 빨리 써 버리자.
“그럼 제가 쓰겠습니다.”
[당신의 결정에 소수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7급 악마종의 핵을 꺼냈다. 아까 죽은 어둠 파수꾼의 시체에서 도려낸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까 내구도가 다해 망가진 [부러진 신념]을 꺼내 들었다. 원작에 따르면, 이 상자의 사용법은 간단하다.
「“누가 알았겠어요. 그게 한정판 코인 아이템이었을 줄.”」
나는 악마종의 핵과, 부러진 신념을 상자에 넣었다.
「“하, 내 말 못 믿는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거기에 하위 아이템을 넣고, 상자를 닫으면!”」
사실 이 두 아이템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나도 결과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엄청난 것이 나올 거라는 거다.
「“무조건 상위 아이템이 나온다고요!”」
잠시 후, 닫힌 상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