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22화
“형! 저건······.”
보물 상자를 발견한 이길영이 말문을 떼기 직전, 나는 녀석의 작은 입을 막았다.
“쉿, 기다려.”
멸살법의 세계는 냉혹하다. 성좌들은 인물들의 역경을 즐기고, 시나리오의 장애물들은 인간들을 엿 먹이기 딱 좋은 것들뿐이다.
저렇듯 “날 잡아 잡수쇼”하고 있는 것들은 대개 함정이며, 심지어는 시스템 메시지조차도 믿어선 안 된다.
“보물 창고라고 해서 꼭 보물만 있는 건 아냐.”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아쉬워합니다.]
심연의 흑염룡······.
아무래도 저 자식은 얼마 전부터 내가 뒈지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나는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물창고 근처를 얼씬 거리는 그림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르르······ 찍!
땅강아쥐들이었다. 터널을 통해 뭔가를 한가득 가져온 그들은, 알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내며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화르륵.
일정한 숫자의 땅강아쥐들이 모이자 주변을 밝히는 불빛의 숫자도 많아졌다. 검은 에테르를 매개로 타오르는 불꽃, 암화(暗火)였다.
암화가 탈 정도로 검은 에테르가 많다는 것은 이곳이 [어둠 뿌리]의 중핵이라는 이야기. 그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유상아 씨 때문이잖아!”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흠칫 놀라는 이길영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저 때문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희미한 불빛 사이로, 땅강아쥐에게 제압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바닥에서 뻗어 나온 줄기에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유, 유상아 씨가 지하철만 안 탔어도,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제가 지하철 탄 거랑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인데요?”
저런 헛소리를 또 일일이 다 받아주고 있다니. 어쩌면 유상아는 부처가 아닐까. 아니면 배후성이 부처거나.
“그, 그건······ 그러니까, 유상아 씨가, 맨날 자전거만 타니까······.”
횡설수설하는 한명오의 목소리.
유상아의 음색이 차가워졌다.
“잠깐만요. 제 자전거 훔쳐 가신 게 혹시 부장님이셨어요?”
“사, 사람이 말야! 내가 차 태워 준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호의를 베풀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대답하세요. 제 자전거 부장님이 훔쳐 가셨냐고요.”
갑자기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였나. 벤츠 S클래스를 타고 다니는 한명오가, 3호선 지하철에 타고 있었던 연유가.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회사뿐만 아니라 금호역에서도 유상아에게 눈독 들이는 남자들은 꽤 있었으니까.
실제로 유상아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분위기도 온화하고 사람 비위도 잘 맞출 줄 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한명오’를 싫어합니다.]
암화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일만큼 한명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저거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그래 씨발! 내가 그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왜 부장님께서 큰 소릴 내세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그건 절도잖아요.”
“절도? 씨발, 개소리 하지마! 그러게 처음부터 고분고분 차 탔으면 됐잖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시답잖은 말싸움을 싫어합니다.]
본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젠 방법이 없다. 나는 조용히 가시를 뽑아 들었다.
“내가 한 번 대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뜻에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 한 것뿐인데 계속 네가 좆같이 구니까 나도······.”
나는 있는 힘껏 가시를 던졌다.
찢어지는 파공성과 함께 가시가 한명오의 입가를 스쳤고, 가시는 푹, 소리를 내며 어둠의 안쪽에 틀어 박혔다.
“우와아악! 뭐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기뻐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독자 씨!”
유상아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고오오오······.
땅강아쥐들의 건너편, 가시가 꽂힌 부근에서 어둠이 갈라지고 있었다.
역시 저놈이 나오는군.
[어둠 뿌리]가 있는 곳에 놈이 없을 턱이 없지.
[‘어둠 파수꾼’이 나타났습니다!]
[서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파수꾼 퇴치>가 시작됩니다!]
왕에게 굴복한 노예들처럼 공포에 질린 땅강아쥐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어스름한 불빛 사이로 칠흑의 형체가 나타났다. 사신(死神)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등허리에는 촉수 같은 것을 일렁이는 괴물.
이길영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우웁, 형, 저······.”
“괜찮으니까 해도 돼.”
급기야 바닥에 엎드린 이길영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멀리서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니까.
실제로 주변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들은 오래 전에 배를 내놓고 터져버린 상태였다.
아마 벌레들과 연결되어 있던 이길영도 상당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길영아. [다종 교감]은 앞으로 몇 번 정도 더 할 수 있어?”
“···아직 한두 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겠다. 그럼 잠시 여기서 쉬고 있어.”
나는 길영이를 기대어 놓고 유상아와 한명오 쪽을 향해 다가갔다. 패닉에 빠진 한명오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으, 으헉! 저게 뭐야······!”
나는 맥가이버 칼을 들어 두 사람을 묶은 줄기를 잘라 주었다. 몇 번 칼을 움직였을 뿐인데, 줄기에 닿은 부분이 급격하게 부식하더니 날이 삭아 없어졌다. 과연, 이게 악마종의 힘이라는 거겠지.
“물러나 있어요.”
나는 한명오가 떨어트린 땅강아쥐 척추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7급 악마종, 어둠 파수꾼.
멸망이 시작된 이후 등장한 수많은 괴수종들 가운데서도, 저 악마종들은 유독 특별했다.
사실 땅강아쥐들의 ‘보물’은 악마종에게 바치는 ‘제물’에 가까웠다. 같은 급수라고 해도 악마종은 다른 괴수종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둠파수꾼’이 자신이 따르는 마왕의 가호를 받습니다.]
“카뮨. 데르. 이투르.”
악마종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제각기 다른 마왕을 숭배하며 [어둠 뿌리]를 통해 그 마왕의 권능을 일부 계승한다.
[‘어둠 파수꾼’이 ‘공포’를 발산합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공포’ 효과를 대부분 중화시킵니다.]
때문에 하나의 악마종을 살해한다는 것은 곧 마왕 하나와 척을 진다는 것을 뜻했다.
“이투르!”
뭐라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상황이 안 좋게 됐다.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어, 엄마?”
유상아였다.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
“물러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게 아니라 방금 저 괴물이 ‘엄마’라고······.”
나는 잠시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
“으음, 그러니까······ 카, 카르드, 에미렌? 아, 이 발음이 아닌가? 아케두?”
순간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칼리두!”
놀랍게도 유상아의 말에 어둠 파수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물 '유상아'가 스킬 ‘통역 Lv.3’을 발동하였습니다.]
······맙소사, 스페인어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들어나 볼까.
“녀석이 뭐라고 하는 데요?”
“그게······ 아까부터 계속 ‘엄마가 되어라’ 라고······.”
······엄마가 되어라?
어둠 파수꾼이 유상아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칼리두!”
유상아가 울상을 지었다.
“어, 엄마라니, 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둠 파수꾼은 이번에는 한명오를 가리켰다.
“칼리두!”
터져버린 입술을 닦던 한명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 내가 왜 엄마야! 아빠지!”
어둠 파수꾼의 등허리에서 촉수가 날아들었다.
푸슈슛!
“우우웁!”
입에 촉수가 꽂힌 한명오의 안색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꿀렁꿀렁하는 소리와 함께, 한명오의 목젖을 통해 뭔가가 넘어갔다.
그렇군.
엄마라는 건 저런 뜻이었나.
악마종은 다른 종의 체내에 새끼를 수태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유상아 씨, 아직 2세 계획은 없으시죠?”
“당연하죠!”
유상아는 그 말을 바로 알아듣고 빠르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나는 땅강아쥐 창을 휘둘러 한명오에게 연결된 촉수를 찢었다.
놈이 분노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칼리두우!”
푸슛! 터엉!
악마종의 촉수에 땅강아쥐 창의 모양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어룡의 위장에 상처를 냈던 스톤 호그의 가시조차 악마종의 몸에 박힌 순간부터 삭아 없어지는 중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느새 한명오를 끌고서 저만치 멀어진 유상아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승산은 있는 거죠?」
아마도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승산은 전혀 없었다.
푸슛! 푸슈슛! 터엉!
고작 몇 방의 연타에 땅강아쥐 창은 거의 못 쓸 정도로 망가졌다. 창을 쥔 손이 아파 왔다.
보물 상자를 지키는 이 녀석은 동호대교의 어룡과 마찬가지로 잡으라고 데려다 놓은 괴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원래의 계획은 이 녀석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이 사라지고 난 뒤 보물 상자를 까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라는 건 언제나 그렇듯 일이 그르칠 때를 대비해 존재하는 법이다.
“도깨비. 보고 있지?”
[우, 우웃. 알고 있었어?]
어둠 속에서 환한 전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도깨비.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비형의 사촌뻘 정도 되어 보이는 녀석.
“지금쯤 나한테 온 우편물이 있을 텐데, 빨리 건네줬으면 좋겠어.”
[히힛. 그건 내, 내 소관이 아니야. 비, 비형의 일이지.]
“지금은 네가 비형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거잖아. 성좌들이 안달하는 거 안 보여?”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도깨비 ‘비류’를 닦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도깨비 ‘비류’를 협박합니다.]
도깨비 비류가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조, 좋아. 대신 이, 이번 한 번만이야.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해, 해 주는 거라고!]
도깨비가 허공에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소환이 시작되었다.
[거래소에서 아이템이 도착하였습니다.]
[아이템, ‘부러진 신념’을 획득하였습니다.]
[계약 효과로 중개 수수료가 면제 되었습니다.]
부러진 신념.
얼마 전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거래소에 등록했던 ‘어룡의 핵’, 그 물물교환 아이템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킷.”
허공에서 내려온 아이템을 본 어둠 파수꾼이 비웃음을 흘렸다. 비웃을 법도 하다. 내가 받은 것은 고작해야 D등급의 아이템. 그것도 반으로 뚝 부러진 칼이었으니까.
[해당 아이템은 사용하기엔 너무 낡았습니다. 내구도가 떨어져 제 성능을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지어 아이템을 준 도깨비조차 허공에서 킥킥거렸다.
[그, 그런데 그렇게 낡은 걸로 싸울 수나 있겠어? 그리고 그거, 되게 특수한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쓰, 쓸 수도 없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모르면 이걸 사지도 않았겠지.
“후우우······.”
나는 숨을 힘껏 빨아들인 뒤, 정신을 집중했다.
기이이잉.
가파르게 떨리는 칼자루. 비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우웃? 어떻게?!]
고작 그 정도로 놀라서는 곤란하지. 왜냐하면 이건 네 친구한테 무려 1만 코인이나 주고 산 스킬이니까.
부러진 칼날의 겉면에 청백의 에테르가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백청강기(白淸罡氣)]
대(對) 어룡전이 끝난 후, 나는 곧장 비형에게서 이 스킬을 구입했다. 다른 최상급 강기공에 비하면 약간의 하자가 있기는 해도, 당분간 구할 수 있는 강기공(罡氣功) 중에서는 이만한 게 없다.
[‘부러진 신념’이 당신의 강기공에 반응합니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곧이어 칼자루가 광채를 뿜어내더니, 부러진 칼날의 끄트머리에서 새하얀 가상의 칼날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부러진 신념.
이 칼의 진짜 성능은, 바로 강기공을 주입했을 때 드러난다.
푸슈슈슛!
수십 개로 늘어난 촉수가 시야를 뒤덮었다. 내 체력 레벨로도 무사할 수 없는 공격들. 두렵다. 하지만 이제 승산은 있다.
기이이잉!
왜냐하면 ‘신념의 칼날’은, 악마종에 한해서는 최고의 상성을 자랑하는 무기니까.
파츠츠츠츳!
칼날에 닿은 촉수들이 모조리 산화하며 잘려 나갔다. 어둠 파수꾼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촉수를 물렸다. 급격하게 마력이 빠져 나가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스가각!
침착하게 칼날을 움직인다.
[전투 감각]이 없기에 몇 번이나 눈 먼 촉수를 놓쳤고, [검술 연마]가 없었기에 휘두르는 칼날은 어설펐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검사가 아니라 독자니까.
그리고 독자는 독자의 방식으로 싸운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었던 페이지에 대한 기억력이 향상됩니다.]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어둠파수꾼의 공격 패턴은 간단하다. 무조건 오른쪽 상단의 촉수가 먼저······」
「······한 번의 촉수 공격이 있고 난 뒤에는 반드시 일정한 텀이 있으며······」
「······녀석의 촉수는 재생되지만 재생까지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열심히 읽고, 또 읽은 것을 정직하게 활용하는 것.
“크아아아아!”
잘려 나간 촉수들이 튀어 올랐고, 어둠 파수꾼이 비명을 질렀다.
시야 너머에 이길영이 있었다.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는 녀석. 안타깝게도 녀석의 소망과는 달리, 이 세계에서 나는 신도 주인공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자신 있었다.
“카르. 미엔. 데로.”
간신히 몸을 추스른 어둠 파수꾼이 경악성을 토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뒤쪽에 있던 유상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내 약점, 전부······?”
그런 뜻이었군.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면 돼.”
나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