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228화
[이 공단의··· 새로운 지배자는··· 누구냐.]
그 어마어마한 목소리에 나와 유중혁은 동시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츠츠츳 거리는 잡음이 많은 걸로 봐서, 진언의 사용이 꽤나 힘겨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유중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파피루스>의 성좌로군.”
“‘최후의 파라오’라면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 여자겠지?”
거대한 미라의 형상에 낡은 황금빛 왕관. 다른 모든 곳은 붕대로 덮였음에도 드높은 콧대만이 드러난 얼굴. ‘멸살법’에서 읽은 그대로다. 분명 저 화신체는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의 것이다.
[유중혁이······ 누구지······?]
다시 한번 이어지는 진언에, 공단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확실히 대단한 패기이긴 했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주눅 들지는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고작해야 위인급 성좌. 유중혁도 나도 이제 위인급 성좌의 기세 정도에는 쫄지 않는다.
“유중혁. 이길 수 있겠냐?”
전신에 설화팩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무리다. 곧 그 시간이라서.”
“아까 그 패널티 말하는 거냐? 하루에 10분씩 사라진다는?”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나는 고개를 돌려 클레오파트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 녀석을 어쩐다······.”
“놈은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왜?”
“아직 ‘마왕 선발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나리오에 소속되지 않은 성좌들의 화신체는 강력한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아직 ‘거대 설화’가 열리지 않은 이상, 그들 또한 마음대로 활개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 아스모데우스한테 당한 거 벌써 잊었어?”
“누구나 아스모데우스처럼 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마계에서 마왕들은 성좌에 비해 개연성 제약이 덜하니까. 문제는 저 성좌들이 그 제약을 극복할 만한 여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파피루스> 소속이잖아? 성운의 개연성을 빌려와서 난장을 놓으면······.”
“김독자. 벌써 네놈이 한 짓을 잊은 모양이군.”
“뭐?”
유중혁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단의 새로운 지배자······ 그놈에게 전해라. 마왕 선발전에 참전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클레오파트라의 화신체는 그 말과 함께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모래성이 무너지듯, 모래알처럼 조각난 화신체가 먼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명심해라··· <파피루스>는··· 결코 두 번 경고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저렇게 고분고분히 떠나는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저런 식으로 현현하고 나면 화신 수백쯤 학살하는 건 식후 운동 정도로 여기는 녀석들인데.
유중혁이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잊었나? 놈들은 너에게 [운명]을 강제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파피루스> 뿐만 아니라 <베다>와 <올림포스>도, 당시 나를 자기들 편에 끌어들이기 위한 [운명] 선언에 대량의 개연성을 갈아 넣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순순히 사라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
놈들은 지금 여분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이다.
유중혁이 특유의 침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 선발전까지는 시간을 번 셈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당장, 성좌들이 이쪽을 공격해 올 리는 없다.
나는 메시지 로그를 확인했다.
[현재 ‘마왕 선발전’이 준비 중입니다.]
[남은 준비 시간 : 28일 17시간 12분]
내 예상이 맞다면 ‘마왕 선발전’은 21번 시나리오부터 24번 시나리오까지 모두 소비할 것이다. 거대 설화니까 그 정도 시나리오는 잡아먹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남은 시간을 가늠하며 말했다.
“우리 둘만으로는 부족해.”
“알고 있다.”
마왕 선발전이 시작되면 저쪽에서는 성좌들이 출몰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리 위인급 성좌라도 성좌의 수준에 도달하면 일반적인 화신들보다는 훨씬 강하다. 더군다나 이름값 높은 녀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나와 유중혁만으로 상대하기는 힘들어진다.
“생각해둔 거 있냐?”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구에 있는 동료들을 데려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직 이현성이나 정희원은 초월좌나 성좌들을 상대로 싸우기엔 부족했다. 그들도 개인 시나리오와 메인 시나리오를 번갈아 수행하며 강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후반 시나리오에 들어섰을 때 본격적인 전력 운용이 가능해질 테니까.
지금은 당장 쓸 수 있는 동료들을 구해야 한다.
“여기서 모은 동료는 없나?”
“아, 있긴 한데······.”
그러고 보니 장하영 이 녀석이 어디 갔지?
나는 아픈 몸을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같은 편을 물색해 놓으라고 말해둔 참이야. 슬슬 성과가 있을 때가 됐는데······.”
“준비해 둬라. 나는 잠깐 다녀 올테니.”
어딜 가냐고 채 묻기도 전에, 유중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나는 몸도 풀고 작전 계획도 세울 겸, 붕대를 대충 정리한 후 치료실을 나왔다.
아일렌은 2주는 더 요양해야 한다고 했지만,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로 회복 능력이 급상승합니다.]
······아, 특성 효과 때문이었군.
적당히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서자 경악한 아일렌이 달려왔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보다 아일렌, 이거 좀 고쳐주라.”
내게서 우리엘의 인형을 받아든 아일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데요?”
“성좌의 상징체.”
불경하게도, 아일렌은 그 말을 듣고 곧장 인형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황급히 인형을 다시 주워든 아일렌이 나를 보며 물었다.
“······떨어트렸다고 천벌 받진 않겠죠?”
“착한 성좌니까 걱정하지 마. 튼튼하게 수선해 줘.”
성좌가 착하다니. 좀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다른 성좌도 아니고 우리엘이니 그렇게 표현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잠깐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공단의 거리로 나왔다.
희미한 햇살 속에 비치는 공단의 거리는 이제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를 알아본 몇 명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쳤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일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생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삶을 결심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야, 유중혁! 깼냐?”
돌아보자, 마침 내가 찾던 녀석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움닫기를 해 내 목에 매달린 장하영이 내게 어설픈 헤드락을 걸어왔다.
나는 애써 장하영을 떼어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유중혁이 아냐.”
“아, 이제서야 본명을 밝히시려고?”
“······알고 있었냐?”
“뭐, 나만 가명을 쓰는 건 아닐 테니까.”
나는 잠시 장하영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내 이름은 김독자야.”
나름대로 멋지게 얘기해 본 건데, 장하영은 영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이상한 이름이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됐어. 지금껏 뭐하고 있었냐?”
“아, 채팅 좀 하다가 이 근처에 제보가 떠서 나왔지.”
“제보?”
“넌 누워만 있어서 모르겠구나? [공단]에 그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거든.”
나는 장하영에게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물론 유중혁에 관한 것이었다.
“그 녀석이 ‘지배권’을 거부했다고?”
“맞아. 공작위 계승은 하되 여길 통치하지는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 다들 난리야.”
무슨 상황인지는 알 법했다.
아마 유중혁은 자신의 모토인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를 실천 중일 것이다. 그래서 그딴 말을 한 거겠지. 생각은 좋다. 그런데 상황이 나빴다.
“공단이 난리가 났겠네. 아직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그런 선언부터 하면 치안 문제가 발생할 텐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금 공민들 엄청 흥분해 있어.”
강력한 독재자에겐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욕망을 통제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그런 독재자가 실권을 포기했으니, 지금껏 쌓여 왔던 공민들의 욕망은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공단의 어둠이 사라질 것 같은가?”」
그것은 ‘멸살법’에 나온 세이스비츠 공작의 대사였다.
새삼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배자가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공단] 전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악한 독재자가 사라진 만큼, 사람들이 감추고 있던 욕망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어이, 그 파편 내놔!”
“시, 싫어요. 제가 주운 겁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나와 장하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골목 안쪽에서 다수의 사내들이 한 화신에게 린치를 가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뻔해 보였다. 분명 [공장]에서 나온 설화 파편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거겠지.
내가 움직이려는 순간, 뜻밖에도 장하영이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봐.”
“······뭐야?”
“말했잖아. ‘제보’가 있었다고.”
“무슨 제보?”
“여기에 ‘징벌자’가 나타날 거야.”
“징벌자?”
그런 존재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멸살법’은 물론이고, ‘혁명가 시나리오’에서도 그런 포지션은 없었다.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장하영이 덧붙였다.
“공민들이 만든 별명이야.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나타나서 치안을 정리하는 녀석인데, 정말 엄청난 미모의······.”
그 순간, 골목 안쪽에서 사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죽이고 빼앗아!”
병장기를 빼든 사내들이 본격적인 린치를 가하려는 모양이었다.
징벌자인지 뭔지, 그딴 걸 기다리느니 내가 먼저 움직이는 게 빠르겠다. 내가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움직이는 순간, 골목에 호리호리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만.”
전신에 흑색 케이프를 두른 한 여자가 담벼락 위에 서 있었다.
케이프 때문에 무장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얼굴만큼은 아주 분명하게 보였다. 마치 혼자서만 화질이 다른 듯한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찰랑이는 것을 보며,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느릿느릿 생각을 움직였다.
······‘멸살법’에 저런 인물이 있었던가?
갑자기 내가 아는 모든 종류의 찬사들의 의미가 묘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먹색의 눈썹 아래로 드러난 깊고 섬연한 눈동자.
세상의 미를 결정하는 온갖 기준들이 동시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성좌들의 수식언으로도 묘사할 수 없을 듯한 얼굴.
그렇기에 분하게도, 그 얼굴을 표현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유중혁의 뺨을 세 대쯤 갈길 미모였다.」
‘멸살법’에서도 그런 표현은 나온 적이 없었다.
‘멸살법’에서 손에 꼽는 외모를 가진 장하영도 ‘두 대 갈긴’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내가 충격으로 굳어져 있자, 유중혁의 뺨을 두 대 갈긴 장본인이 작게 속삭였다.
“왔네. 저 녀석이 징벌자야.”
여자의 미모에 압도되어 있던 사내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헤죽거리는 입술을 보아하니, 무슨 소리가 나올지는 뻔해 보였다. 그런데 사내들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뭔가가 움직였다.
투둑.
그리고, 뭔가가 떨어졌다.
사내들이 비명을 지른 것은 그보다 조금 후의 일이었다.
“으, 으아아아악!”
팔이 잘린 사내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고, 뒤이어 사태를 파악한 사내들이 허겁지겁 병장기를 넣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심지어는 구해진 사내조차 겁에 질려 골목길을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골목에는 떨어진 사내들의 팔과 여자만이 남았다.
고요히 검을 집어넣는 여인을 보며, 장하영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봐봐, 진짜 쩔지? 네가 쓸만한 인물들 물색해 보라고 했잖아. 내가 어제도 말 걸어보려고 했는데 바로 사라져버려서―”
잔인한 손속이었지만, 그럼에도 정도(定道)를 지킨 검술.
놀라운 것은 그 검술의 빠르기였다.
나는 부지 중에 중얼거렸다.
“화신 수준의 검술이 아니야.”
“뭐?”
장하영은 눈치 못 챘겠지만, 나는 확실히 보았다.
현시점에서 저런 빠르기의 발검은 초월좌들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동료로 삼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마왕 선발전’에 큰 전력이 될 것이다.
흑색 케이프의 여자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말을 걸어 시간을 끄는 동시에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 정보를 볼 계획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특성창을 볼 수만 있다면 설득하는 게 보다 쉬워질 테니까.
그리고 운만 좋다면―
“큿······.”
그러나 여자에게 다가가 스킬을 쓰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이글거리는 여인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전해지는 끔찍한 감정의 양에 나는 몸을 떨었다.
나를 향한 엄청난 원망과 분노.
그만한 감정의 폭포를 겪어본 것은 정말 간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순간 아연해지고 말았다.
······뭐야 이 여자?
날 알아?
······그보다, 왜 날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