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225화 “우습군. 아직 나는 ‘마왕’이 되지도 않았어. 아직 갖지도 못한 거대 설화의 지분을 어떻게 나눠줄 수 있지?” “내가 도운다면 가능하죠.”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에 오만한 자신감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의 존재를 ‘마왕’으로 옹립시키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표정. 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좋아, 만약 내가 마왕이 된다면 설화 지분을 나눠주겠어.” 순간, 허공의 별들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크게 실망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착잡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성별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성좌들의 극렬한 반응은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 녀석을 정면에서 적대할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 선택에 만족한 듯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잘 생각했어요. 얼마나 줄 거죠?” “삼십 퍼센트.”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실망의 빛이 스쳤다. “너무 적은데.” “너무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오십 퍼센트. 지금 여기서 계약서를 써줘요.” 순 날도둑놈이 따로 없다. 거대 설화의 절반을 빼앗기면, 저 ‘아스모데우스’의 동의 없이는 거대 설화의 힘을 끌어 쓸 수 없게 된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계약서는 쓸 수 없어.” “왜죠?” 드드드드드. 주변의 자갈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거야 뭐 타고난 협박범이 따로 없군. 하지만 그런 공갈에 당할 정도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만 지분을 나눠주진 않을 거니까.” 그 말에, 순간적으로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주변의 모든 별들이 숨죽인 채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삼십 퍼센트의 설화 지분은 경쟁 지분으로 내놓을 거다.” “······경쟁 지분?” “누구든, 나를 도와주는 존재라면 그 지분에 대한 몫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야. 누가 얼마만큼의 몫을 가지게 될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설화 기여도에 달려있겠지.” 그제야 하늘에서 나를 노려보던 시선들이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탐욕을 드러냅니다!] ‘경쟁 지분’은 내가 마지막으로 내놓을 수 있는 카드였다. 어차피 맹수를 끌어 들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 맹수들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내가 선택할 폭을 넓히는 편이 나았다. 내 의도를 눈치챈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나를 속였군요.” “속이지 않았어.” 허공에 떠오른 자갈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정확히는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쉽게 막을 수 없는 강대한 격이 담긴 공격들. 전이라면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츠츠츠츠츠츳! 날아들던 돌들이, 보이지 않은 손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정지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를 노려봅니다.] 이미 내가 거대 설화의 일부를 ‘경쟁 지분’으로 내놓기로 선언한 상황. 그 지분을 노리는 몇몇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턱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츠츠츠츠츠! 그러나 아무리 아스모데우스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 다수의 성좌들과 개연성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쪽에는 만만찮은 성좌도 하나 끼어 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정욕과 격노의 마신’을 노려봅니다.] 한동안 허공을 노려보던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힘을 회수했다. 그러자 지탱할 곳을 잃은 돌무더기들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아스모데우스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마왕’이 될 수 있는 건 당신 하나가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중요한 기회를 차버린 거라고.” 언제든 다른 쪽에 붙을 수 있다는 투의 말투. 확실히, 지금 ‘아스모데우스’가 다른 쪽의 손을 잡는다면 문제는 좀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글쎄, 기회를 차버리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 같은데.” 짧은 사이, 나는 아스모데우스가 왜 하필 ‘나’를 선택했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스모데우스는 내가 아니라 [베르칸]이나 [멜레돈] 쪽에 붙는 것이 더 유리했다. 굳이 따지면 나는 인간이자 성좌인 존재고, 베르칸과 멜레돈은 날 때부터 악마종이었으니까. 그런데, 녀석은 내게 먼저 손을 내뻗었다. 지금 아스모데우스에게는,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 거절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조금 위축되어 보였다. “······정말 불쾌하군요. 내가 마왕이라 탐탁잖았나요?” 저 지고한 악마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멸살법’ 전체로 보아도 이건 극히 드문 장면이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왕이든 성좌든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냐. 나는 내 설화가 최고의 설화가 되길 바라는 것뿐이야.” “최고의 설화?” “미식협에 속해 있는 당신이라면 내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 텐데.” 일부러 언급한 그 단어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일변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 인간의 수사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표정으로 나를 보던 아스모데우스는 그로부터 십여 초가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감히 ‘후보자’가 ‘마왕’의 요리 솜씨를 시험하겠다······?] 츠츠츠츠츠츠! 순간적으로 차오른 가공할 살기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마치 일대의 시공간 전체가 저 마왕의 손아귀에 들어있는 듯한 광경. 당황한 성좌들이 빛을 짜냈으나, 이미 주변의 어둠은 그들의 힘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농도가 깊었다. 이것이 진짜 ‘마왕’의 힘. 만약 아스모데우스가 여기서 진짜 힘을 냈다면, ‘긴고아의 죄수’가 있든 없든 나와 유중혁은 소멸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이 힘을 굳이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증명이자 경고였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당신에게 미묘한 호감을 드러냅니다.] 언제든, 저쪽에서는 나를 죽여버릴 수 있다는 경고. 어둠 속에서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내 마음에 쏙 들어.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어요.] 다행히 사태는 이쯤에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아스모데우스와 딱히 척을 지지도 않았고, 일방적으로 설화의 지분을 빼앗기지도 않았다. 언제든 상황이 뒤바뀔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만들어 놓은······. [다만, 쓰레기 청소는 하고 가야겠어.] 아스모데우스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가슴 어귀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바람 인형이 터지는 듯한 소리.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듯 아려왔다. 그러나 유중혁의 신체에는 딱히 손상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가 잿더미로 흩어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 눈앞에서 그런 게 돌아다니는 꼴은 볼 수 없거든요.] 나는 황망히 사라지는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다가, 한순간 스치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급히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우리엘?” 뒤늦게 끄집어 낸 우리엘의 ‘인형’은 이미 너덜너덜한 넝마 조각이 되어있었다. 곧이어 축 늘어진 인형에 이어져 있던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유중혁의 눈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와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졌습니다.] [개인 시나리오가 자동으로 해지되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유중혁이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엘이 ‘마계’에 개인 시나리오를 지정했고, 유중혁은 그 시나리오를 받아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 막 그 ‘시나리오’가 강제로 해지되었다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츳! 피부 사이사이로 번지는 선연한 스파크.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엘! 정신차려요!” 필사적으로 인형을 흔들어 보았지만, 우리엘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상징체가 지나치게 망가져서 진체와의 연결이 강제로 해지된 모양이었다. 츠츠츠츠츳! “제기랄.” 유중혁의 단단한 육체에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당신은 ‘메인 시나리오’에서 이탈했습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라면, 유중혁은 반드시 죽는다. [‘추방자 패널티’가 시작됩니다.] 나와는 다르다. 유중혁에게는 [제4의 벽]이 없다. 추방자가 되고 나서 지켜줄 녀석이 없단 말이다. “이봐! 아무라도 좋으니까!” 나는 다급히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유중혁의 전신은 망가져가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다리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목까지 번져 성대를 마비시켰다. 밤하늘의 성좌들에게 도움을 청할 힘조차 앗아가는 패널티. 마치 이대로 이야기를 모두 빼앗아 말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전 우주가 유중혁의 죽음을 강렬하게 바라고 있었다. ······여기까지라고? 그럴 수는 없다. 이 녀석이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무수한 페이지에 적힌 활자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고, 나는 그 활자들 중 제일 먼저 손에 닿는 것을 골라 집었다. 그래, 그 방법 밖에 없다. 나에게는 없지만, 유중혁에게는 있는 것. 그 녀석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유중혁의 배후성을 바라봅니다.] 진언을 쓰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힘에 부쳤다. 부디, 내 이야기가 그 존재에게 닿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 어딘가 익숙하고, 익숙한만큼이나 낯선 시선.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까마득한 느낌이 나를 덮쳐왔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해제되었습니다.] *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언젠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별자리의 연회에서 퇴장하던 때의 일이었나. 【■■...】 【바꿀 방법은...】 【...없다】 빌어먹을, 그게 대체 무슨 소리― * “허억!” 나는 마치 양수를 토해내듯 숨을 토하며 자리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목에서는 컥컥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눈자위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살았다. 아일렌이, 제대로 나를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도하기보다는 다급한 심경이었다. 나는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치료실 바깥을 향해 외쳤다. “아일렌!” 내 외침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일렌이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카테터를 쥐어 뽑은 나를 보며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빨리 날 일으켜 줘. 어서 길로바트 공단으로 가야돼.” “무슨 소리예요?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외치면서도, 속으로 수십 가지의 생각이 교차했다. 제천대성에게 도움을 청하자. 만약 안 된다면, 헤르메스라도 부르자. 정말 싫지만 설화 지분이라도 떼어 준다면 가호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당장 길로바트로 가는 거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간다면―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던 사람이 대체 무슨······ 절대 안 돼요! 적어도 앞으로 이주는 더 쉬어야 몸이 안정될 거라고요!” “······뭐?”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환청 같은 것이 들렸다. 내가 읽어온 세계의 활자들이 일제히 무너지는 듯한 소리. 제자리를 잃은 활자들이 일제히 밀려들며 나를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일주일이요. 당신, 일주일 째 기절해 있었어요.” 나는 잠시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아일렌이 만들어 준 스마트 폰을 집었다. 허겁지겁 패널을 켜고, 파일을 확인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1차 수정본).txt 텍스트 제목은 변하지 않았다. 2차 수정본은 오지 않았고, 유중혁의 대사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렇게 절망스러운 순간이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유중혁이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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