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226화 당황한 마음에 손까지 떨렸지만, 나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니다. 그 유중혁이 그렇게 죽었을 리 없다. 무엇보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현재 다음 메인 시나리오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중혁은 ‘추방자 패널티’를 받아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유중혁 또한 나처럼 새로운 시나리오로 진입했을 테니까. 비록 개인별로 시나리오의 편차가 존재한다고는 해도, 내가 공작이 되었듯 녀석도 공작이 되었다. 그렇다는 건, 유중혁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왕 후보자’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현재 <스타 스트림> 시스템의 오류로 보상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바로 저 메시지였다. <스타 스트림>에서 ‘사칭’을 통해 설화나 업적을 획득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 유중혁은 아예 서로를 사칭해서 서로의 이름으로 업적을 쌓았다. 만약, 이것 때문에 <스타 스트림>의 메인 시나리오가 꼬였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무사히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했지만, 유중혁은 진입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추방자 패널티’가 시작된 거라면? “괜찮아요?” “······혹시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 나를 잠시 못 미더운 눈으로 바라보던 아일렌이 말했다. “갔다 올 동안 또 카테터 뽑으면 안 돼요.” 아일렌이 치료실 밖으로 사라진 후, 나는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아직 유중혁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해제되기 직전 ‘추방자 패널티’가 시작되었던 걸로 봐서는 죽었을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스타 스트림>에서 그런 절대적인 확신은 금물이었다. 일단은 유중혁의 생사부터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비유.” 현재 비유는 [길로바트] 쪽까지 채널을 확장 시켜 놓은 상태. 비유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성좌의 시선으로 그쪽 동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유. 들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비유의 응답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성좌들의 메시지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없는 동안 비유에게도 무슨 일이······. 새근새근. ······응? 새액새액.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새근거리는 비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비유의 몸체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이 놓였다. 만약 비유에게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정말로 절망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나는 비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멸살법’에 따르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도깨비는 하루의 절반을 자야 한다. 그간 나 때문에 잠이 밀렸을 테니, 비유가 곯아떨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체력이 방전된 비유를 혹사시킬 수는 없는 상황.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젠장, 역시 이것도 안 되나. 아무래도 유중혁과의 링크가 끊어지면서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결국, 다시 내가 집어든 것은 스마트 폰이었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유중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소설을 읽는 것뿐이라니.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정신차리라고 김독자. 넌 지금까지 이 소설 덕분에 살아남았던 거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다시 ‘멸살법’ 파일을 열었다. 모든 건 이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니, 답도 이 이야기에 있을 것이다. [특성 효과로 ‘읽기 속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문장 한 줄까지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눈을 부릅뜬 채 책을 읽었다. 「‘그때, 우리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와 유중혁이 이번 일로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졌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에 녀석이 빅엿을 먹이기는 했어도 어쨌거나 우리 쪽에 협력하는 듯한 뉘앙스였으니까. 그러니 이 문장만으로 유중혁이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13회차. 14회차. ······. 유중혁의 회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일렀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이어지는 회귀 속에서 녀석의 정신은 조금씩 닳아갔다. 「‘힘들다.’」 18회차. 「‘이젠 그만두고 싶다.’」 21회차.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 유중혁의 절망을 읽으며, 나 역시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회차가 지날수록, 유중혁은 다시 원래의 염세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대해진 자아와 날이 선 원칙만으로 꾸역꾸역 매 회차를 살아 나가는 회귀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유중혁의 중후반 회차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멸살법’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내가 영향을 끼친 초반부 회차를 제외하면, 유중혁은 또 다시 비슷한 실수를 했고 비슷한 성향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대체, 몇 번을 더······.’」 내가 유중혁과 보낸 몇 개월의 시간은, 고작해야 원작에 이 정도 영향 밖엔 미치지 못했던 거구나. 좌절하는 유중혁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그곳의 유중혁은 내가 닿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25회, 26회, 27회······ 끊임없이 회귀를 반복하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어느새 읽는 것을 멈추고 있었다.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원래 ‘멸살법’이 이런 이야기였던가. 원래의 나는, 대체 어떻게 3149편을 모두 읽었던 것일까······. 불규칙적인 호흡 때문인지, 가슴에 붙어 있던 비유가 몸을 불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기억해둔 뒤, 스크롤을 맨 아래로 내렸다. 당장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부담스럽더라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유중혁은 ‘1차 수정본’에서 제대로 된 결말에 도달했을까. 작가는, 과연 ‘에필로그’를 써 두었을까? 스마트폰의 성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화면이 심하게 버벅거렸다. 그렇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 스크롤을 얼마나 내렸을까. 나는 마침내, 본래의 ‘결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달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그저 거대한 공백뿐이었다. 「현재 수정 중입니다. ㅠㅠ」 그리고 한 줄의 메시지······.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감정에서 오는 고양감에 휩싸였다. “······하하.” ‘수정 중입니다’의 바로 뒤에 붙은 이모티콘에서 오는 장난스러움이 나를 분노케 했고, 그럼에도 ‘수정 중입니다’라는 메시지에서 오는 어떤 가능성이 나를 흥분케 했다. 아직 이 이야기는 바뀔 수 있다. 설령 유중혁이 죽었다고 해도, 방법은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놈을 다시 이 회차로 데리고 와야 한다. 비장한 각오로 스크롤을 서서히 움직였다. 그런데, 결말의 이전 편에 쓰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시나리오의 끝을 앞두고, 유중혁은 죽을 뻔했던 무수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3회차에서 아스모데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죽을 뻔했었지.’」 순간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3회차’라는 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머쓱한 얼굴의 마르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깨어난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오, 혁명가! 깨어났나? 다행이군 그래.” “무슨 일이죠?” “다른 건 아니고, 누가 찾아와서 알려주려고 왔네.” 지금은 바쁘니까 돌아가라고 말하려던 찰나, 마르크가 말을 이었다. “공단 주인이 찾아왔네.” “예?” “공단 주인이 자넬 찾아왔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공단 주인은 난데? “비켜라.” 다음 순간, 누군가가 마르크를 밀치며 치료실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모조리 바꿔 놓는 듯한 존재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유중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 내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차를 내온 아일렌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테이블을 정리한 후 사라졌고, 머쓱하게 서 있던 마르크도 자리를 피했다. 주변이 좀 조용해진 후에야, 생각이 정리가 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언제 온 거냐?” “이틀 전.” 지난 10분간의 내가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걱정했던 놈이 멀쩡히 살아서 심지어는 같은 공단을 걸어 다니고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놈이 죽었다고 온갖 망상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난 거냐?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도움을 좀 받았다.” “누구? 설마 네 배후성?” “그 녀석은 한 번도 날 도와준 적이 없어.” 하긴, 나도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녀석이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멸살법’이 끝날 때까지 녀석이 하는 일이라곤 유중혁을 회귀 시키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간 상처가 꽤 아물었는지, 유중혁의 모습은 꽤 건강해 보였다. “성좌 하나가 나를 도왔다.” “성좌? 누구?” “자세한 건 네놈이 알 거 없다.” “뭘 대가로 바친 거야? 그놈들이 그냥 도와줬을 턱이 없잖아.” “그냥, 약간의 패널티만 감수하면 되는 정도다.” “패널티?” “마계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나는 하루에 10분씩······ 사라진다.” “사라져?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지금 나는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했고, 시나리오 오류도 해결되었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유중혁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해결되긴 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허탈한 심경이었다. 내가 잠든 일주일 사이 나와 관계없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유중혁은 살아났다.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와 공단 지배자로서의 승인도 마쳤다. “······.” 이렇게 녀석과 이야기해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일까. 어색한 정적이 치료실 안에 가득 차올랐다. 무표정하게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유중혁이 멋대로 내 차를 마셨다. 대체 여긴 왜 온거냐, 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앞으론 어쩔 거냐, 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지내냐?” 사실, 유중혁이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고, 시나리오 공략으로만 머릿속이 가득 찬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다른 이들이 뭘 하고 있을지 신경이나 쓸 리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잔소리 좀 하고 싶었다. 제발 인생 좀 혼자 살지 말라고.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시나리오의 종막까지 갈 수 없다고. 그런 소리를 한바탕 해주려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이현성은 군대로 갔다.” 유중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희원과 이지혜는 새로운 화신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앞으로 찾아올 대멸망 시나리오에 대비해 경기 쪽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있지.” “······어?” “유상아와 한수영은 정부 쪽 인사들과 접촉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 두 사람이 같이 다닌다고?” 유중혁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실제로 처음 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씩 녀석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공필두는 성남 쪽에 땅을 사들여서 거대한 성을 짓고 있다. 자기가 정말 왕이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하하, 그 아저씨는 진짜······.” “두 꼬맹이들은 잘 지내고 있다. 심심할 때마다 동전 같은 걸 던지는 것 같더군.” 나는 간간이 피식거렸고, 유중혁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떤 이야기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고, 어떤 이야기는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쩐지 감미롭고 애달픈, 그리고 그리운 기분이 되어갔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나는 기묘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구나. 다들 잘 살아가고 있구나.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의 ‘외부인’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25회차의 유중혁은 말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내가 없어도,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계속할 것이다. 마치 유중혁이 회귀를 반복하는 것처럼. 4회차, 5회차, 6회차······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쉽게 잊혀지겠지. 그리고 사람들은, 결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어떻게든 말해보려 했다. 다행이네. 끝내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들 네 이야기를 한다.”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많이 한다. 네 이야기를.” 나는 양손으로 눈을 덮은 채 작게 웃었다. 겉으로는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웃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양손이 만든 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차를 마시는 유중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지구로 돌아가자,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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