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224화 “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아일렌은 카테터를 뽑아버리고 드러누운 김독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찢어진 붕대 사이로 연신 흘러나오는 설화 파편들. ―지금으로선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진짜 쓰고 싶지 않지만. 아일렌은 황급히 용기를 가져와 그 파편들을 쓸어 담으며, 다른 쪽 팔의 이야기 맥을 짚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져 가는 김독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화 팩을 더 가져와요! 빨리!” 아일렌의 외침에 곁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명오가 치료실 밖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아일렌은 죽어가는 김독자의 얼굴을 보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딱 한 시간 정도만 죽어있게 해줘. ―아, 물론 진짜로 죽는 건 안 되고. 간신히, 죽을 듯 말 듯한 정도로만. ―이번에 죽으면 진짜 김남운 그 자식 보러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믿을게. 알겠지? 삐― 삐― 환자 감시 모니터에 비치는 설화 안정도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김독자를 보며, 아일렌은 조용히 이야기 맥에 새로운 링거를 꽂았다. * 다행히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는 무사히 연결됐다. 아일렌이 제대로 일을 처리해줬다는 뜻이겠지. ······그건 그렇고. 쿠구구구구······. 눈앞에서 타오르는 아스모데우스의 기파. 기세등등하게 소리친 것과는 달리, 사실 나는 바짝 쫄아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바로 그 ‘아스모데우스’다. 처음부터 너무 인상 깊은 말로 시작했나 싶어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지만, 이제와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구원의 마왕?] 나는 유중혁의 얼굴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의 한 귀퉁이에서 유중혁의 영혼이 발버둥 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억지로 녀석을 잠잠하게 재웠다. 지금 유중혁이 튀어 나와서는 될 일도 안 된다. [내가 구원의 마왕이다.] 츠츠츠츳! 진언 사용으로 인해 과도한 개연성이 소모되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여기서는 일부러라도 진언을 써서 기세에서 밀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강해 보이기 위해 반말 기조를 유지한 것은 덤이었다. 의외라는 듯 나를 보던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물었다. [······그자가 정말 당신의 ‘화신’인가요?] [그렇다.] 기절한 유중혁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동안 뼈도 못 추릴 발언이었지만, 어차피 뒤를 생각하고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임기응변으로서 이보다 나은 대답이 없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당신에게 그런 화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생각보다 그쪽 정보가 느린 모양이군. 이 녀석은 내 화신이 맞아.] 놈은, 분명 나와 ‘대화’를 하러 왔다고 했다. 그 말의 신빙성은 가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것만이 유중혁이 살아날 방법이었다. 정말로 놈이 ‘대화’만 하러 왔다면, 적어도 내 화신을 건드리는 불필요한 짓은 않을 테니까. [흐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아스모데우스의 기파가 점차 거세졌다. 나는 속으로 내가 알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정보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미쳐버린 탐미주의자.」 「미식협(美食協)의 일원.」 「올림포스의 명계(冥界)와 약간의 친분이 있음.」 「비뚤어진 성욕의 소유자.」 몇 가지 도움이 될 법한 것도 있었지만, 당장 쓸 만한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이 대치 상황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겠지. 나는 최대한 은밀히 감각을 끌어 올려 주변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탐색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작은 봉제 인형뿐이었다. ······이건 또 뭐야? 유중혁 이 자식, 의외로 이런 걸 모으는 취미가 있었나? 그때, 갑자기 인형이 나를 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감동의 코피를 흘립니다.] ······잠깐만. 설마 이 인형······.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볼을 부빕니다.] 말랑한 인형의 감촉이 유중혁의 뺨에 부벼졌고, 유중혁의 몸으로 강림해 있는 나도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나는 패닉에 빠졌다. 대체 왜 여기에 ‘우리엘’이 있는 건데?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내 ‘격’에 크게 위축되지 않는 걸 보니, 소문이 맞기는 한 모양이군요. 10번대 시나리오에서 ‘설화급’에 올랐다더니······ 설마 사실이었을 줄이야.] [모르지. 소문 이상일지도.] 나는 우리엘의 인형을 끌어당겨 재빨리 품속에 숨겼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이상한데 우리엘까지 나서서 엄한 짓을 하면 곤란해진다. 그러자 아스모데우스가 입맛을 다셨다. [후후, 혀끝이 길다는 이야기도 사실인 듯하군요. 꼭 내 취향이야.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죠? 성좌 녀석들의 농간으로 죽었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지.] [······난 비밀이 많은 것도 좋아해요.] [난 비밀을 굳이 캐내려는 녀석을 싫어해.] [그 자는 이번에 새로 들인 화신인가 보죠? 당신 취향은 어린애라고 들었는데.] [무슨 헛소리지?] [애써 이렇게 준비를 한 보람이 없어서 하는 말이에요.] 나를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은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내려다보았다. 예쁘장한 어린아이의 외형. 한명오의 말이 맞다면, 저 화신체가 바로 한명오의 딸일 것이다. 다행히도 한명오랑은 전혀 안 닮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헛소문이 꽤 많이 퍼져 있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신유승을 화신으로 들여서 그런 소문이 퍼진 듯했다.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스모데우스가 유중혁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하긴, 그 정도로 아름다운 화신체라면 취향을 굽힐 법도 하죠.] 이쯤 되면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게 확실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진언으로 이야기하는 건 그만두지. 주변의 화신들이 남아나질 않겠어.” [왜죠?] “여긴 이제 내 ‘공단’이야. 함부로 내 공민들을 해하는 건 그만둬줬으면 하는데.” 공식적으로 길로바트가 ‘김독자’에게 죽었으니, 이곳은 내 공단이 되었다. [당신은 공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메시지도 떠오르고 있었고 말이지. 츠츠츳. 물론 실제로는 ‘진언’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게 버거웠기 때문에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흐음, 그러네요. 제가 실례를 했군요.” 아스모데우스는 늘 반쯤 정신이 나간 녀석이지만 자신의 목적이 있을 때는 예의를 지킨다. 어디까지나, 목적이 충족될 때까지는 그렇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내가 예언자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당신에게 ‘아스가르드의 예언자’와 비슷한 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저건 아마 안나 크로프트 얘기겠지. 대체 내 이야기가 얼마나 와전되어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소문이야 어찌됐든, 슬슬 이쪽에서 밑천을 깔 때가 된 건 확실해보였다. “아마 ‘마왕 선발전’ 때문에 온 거겠지.” 정답이라는 듯 아스모데우스가 싱긋 웃었다. 별로 어려운 추리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공단이 함락된 직후, 내 귓가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현재 73번째 마계의 ‘마왕 후보자’입니다.] [현재 새로운 시나리오가 대기 중입니다.] “그쪽도 새로운 마왕위를 노리고 있나?” “음? 나는 이미 32번째 마왕이에요. 하급 마계의 마왕위를 재획득하는 건 무의미하죠.” “그러면 뭐지?” “나는 당신이 새로운 마왕이 되는 걸 돕고 싶어요.” 역시, 예상은 했다. 한명오도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까. ―마왕은······ 내 손으로 직접 ‘73번째 마계의 왕’을 만들라고 했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 지금으로서는 선발전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지만 당신에게 거부권은 없을걸요? 공작이 된 이상, 당신은 선발전에 참가해야만 해요.” “혼자 힘으로 이겨낼 수 있어.” “글쎄, 지금까진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그럴까요?” “······.” “멜레돈과 베르칸의 공작들도, 과연 당신과 생각이 같을까?” 이미 그쪽에 성운들이 들러붙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내게 명백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성운들이. 아스모데우스가 사이하게 웃었다. “당신은 내 도움이 필요해. 거절하면 죽어.” 그 죽음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죽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빌어먹을 놈들. 기껏 이리저리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발목을 잡겠다고?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비유에게 ‘채널 확장’을 부탁한 탓에, 성좌들도 내 선택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왕’은 대부분의 성좌들이 꺼리는 존재.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내 이야기도 결정될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거대 설화’가 목적인 거냐?” 내 직언에 아스모데우스의 눈동자에 일순 파문이 일었다. “······벌써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눈 깜빡할 사이 코 베어 가는 놈들만 있는 곳이니까.” 나는 쓰게 웃었다. 거대 설화.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설화들이 일반적인 [설화]의 범주였다면, 이 <스타 스트림>에는 ‘거대 설화’라는 새로운 영역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올림포스의 <기간토마키아>나, 아스가르드의 <라그나로크> 같은 것들. ‘거대 설화’의 작은 지분을 쌓는 것만으로도, 성좌들은 막대한 힘과 개연성을 얻을 수 있으며 큰 지분을 차지할 시에는 하나의 세력을 일굴 수도 있다. 대멸망 시나리오가 덮칠 때마다 성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마계의 ‘마왕 선발전’ 또한 그런 거대 설화 중의 하나였다. 비록 <기간토 마키아>에 비빌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설화들과 비교하기에는 그 스케일이 큰 설화.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거대 설화의 ‘지분’이 필요해요.” 아스모데우스는 이미 마왕인데다 상위 시나리오에 소속된 존재기에 이 선발전에 참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를 돕고 그 대가로 설화의 ‘지분’을 일부 받아갈 수는 있는 것이다. 본래였다면 이쯤에서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마왕 선발전’을 통해 쌓을 수 있는 거대 설화는 앞으로 내가 성운들과 대적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바탕이 될 테니까. 여기서 애먼 녀석에게 설화 지분을 내준다면, 자칫 죽도 밥도 안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유중혁이 수정본의 12회차에서 중얼거린 말이 걸렸다. 「‘그때, 우리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유중혁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지만, 기절한 이 자식은 12회차는커녕 이제 겨우 3회차인 애송이니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 마왕의 손을 잡을 것인가, 잡지 않을 것인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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