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223화
지금 당장 길로바트 공단으로 데려다 달라는 내 말에, 아일렌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길로바트 공단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이틀은 넘게 걸려요. 초월적 존재의 도움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사절단이 타고 온 운송 기관이 있을 거 아냐. 그걸로도 무리야?”
“그걸 썼다고 가정했을 때 이틀이에요.”
이틀이라니······ 내겐 두 시간도 너무 길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해야 유중혁의 시체 쪼가리라도 건질 수 있을 텐데.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방법을 떠올렸다.
“‘초월적 존재’의 도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헤르메스’였다.
그 성좌의 가호가 있다면 이틀의 거리쯤 몇 분도 되지 않아 주파할 수 있겠지.
문제는 녀석이 <올림포스>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뒈지면 뒈졌지, 그놈들 손을 빌릴 수는 없고.”
“네?”
놀란 아일렌에게 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냥 혼잣말이야.”
물론, 일부러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왜냐하면.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감춘 정보를 궁금해합니다.]
바로 이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그들의 메시지를 무시한 채 아일렌을 향해 운을 뗐다.
“다른 방법은 없어? 워프 포탈이라든가, 그런 건······.”
“여긴 73번째 마계에요. 대마계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라고요. 그런 고급 운송 기관이 있을 리 없잖아요.”
“······역시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누가 죽게 생겼어.”
“누가요?”
“이 공단의 주인이 될 사람.”
그러자, 예상대로 내 메시지 로그는 폭발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폭발이라기엔 아직 소소한 수준이긴 하지만, 채널에 성좌가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저 성별 바꾸기 뭐시기는 또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긴고아의 죄수. 혹시 도와줄 수 있으십니까?”
내가 성좌에게 직접 말을 걸자, 치료실의 일행들은 깜짝 놀란 표정들이었다. 나는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괜찮다면 근두운을 좀 빌리고 싶습니다.”
제천대성의 성유물(星遺物) 중 하나인 근두운.
그것만 있다면, 여기서 길로바트 공단까지 최단 시간 내에 직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문제는 저 까다로운 제천대성이 개연성을 무릅쓰고 그 성유물을 빌려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나 때문에 한차례 개연성을 낭비한 상황에······.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왜 ‘근두운’을 필요로 하는지 묻습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말을 잘 해야 했다.
“제가 유중혁을 좀 사칭했거든요. 그리고 유중혁은 저를 사칭했고······ 아무튼 그것 때문에 시나리오 오류가 발생했는데, 문제가 좀 생겨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짜증을 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복잡한 것을 싫어합니다.]
나는 제천대성의 인내심에 맞게 상황을 요약하기로 했다.
“저 때문에 유중혁이 죽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고 도와주겠지 싶었는데, 제천대성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스트레스로 머리를 한 움큼 뽑습니다.]
“잠깐만요.”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빗을 찾으러 떠납니다.]
“저기요?”
사라진 제천대성에게서는 응답이 없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이 상황을 즐거워합니다.]
[1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망연히 허공을 올려다보는 내게, 아일렌이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공단의 새 주인이 될 사람이 위기에 빠졌다 이거죠?”
“······맞아.”
“왜요?”
“마왕이랑 만나게 생겼거든.”
“마왕이라고 꼭 포악한 자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어요.”
“그렇기는 한데······.”
문제는 그 ‘마왕’이 하필 아스모데우스라는 것이다.
원작에서, 아스모데우스는 유중혁이 회차를 건널 때마다 늘 가장 큰 고비가 되는 숙적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유중혁은 이미 지난 회차에서 아스모데우스에게 죽은 적도 있다.
그 녀석을 상대로, 유중혁이 무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초조한 눈으로 내 모습을 보던 한명오가 물었다.
“지금 그 꼴로 가서 뭘 할 수 있겠나?”
사실 그것도 문제긴 했다.
가더라도 이미 걸레짝이 된 내가 유중혁과 힘을 합쳐 ‘아스모데우스’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죠.”
“허, 자네가 이렇게 열정적인 줄은 몰랐네. 회사 다닐 적에는······.”
“죽을 만큼 열심히 해도 정직원 하나 달기 어렵던 그때랑은 다르니까요.”
“······험.”
상황은 나빴지만, 나는 가능한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내가 가지 않아도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 유중혁이 엄청난 각성을 할지도 모르고, 아스모데우스가 갑자기 착한 놈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젠장, 그럴 턱이 있나.
나는 스마트폰을 열어 ‘멸살법’의 수정본을 다시 펼쳤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으니 이거라도 읽어서 해답을 궁구해야 했다.
“갑자기 뭘 하는 거죠?”
“쉿, 조용히 하게. 저게 저 친구가 제일 잘 하는 거야.”
나는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멸살법’의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그렇게 12회차쯤 되었을까, 문장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이 생각하기로, 3회차의 실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그런 이유는 빨리빨리 좀 생각하라고 망할 자식아.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은 순간,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지 말았어야 했다.‘」
*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작은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여덟아홉 살쯤 되었을 듯한 작은 몸집.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과, 아역 배우를 연상케 하는 다채로운 표정. 겉으로 봐서는 어떤 위협감도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취향은 여전하군.’
하지만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저 몸에 깃든 거악(巨惡)은, 결코 아동용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저 소녀는 72개로 흩어진 대마계의 정점 중 하나이자, 무시무시한 설화급 성좌들조차 꺼리는 ‘32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 아스모데우스.
그 아스모데우스가, 소녀의 얼굴로 새침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니까.]
쿠구구구구!
그저 진언을 내뱉은 것만으로 일대의 화신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아마 공단 중심가에 있는 모든 화신들이 피를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압박감 앞에, 유중혁은 숨을 참은 채로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츠츠츳.
그러자 피부를 감싸던 압박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초월좌가 된 유중혁조차 이토록 운신을 힘들게 만들 정도의 존재감. 역시 마왕 정도 되면 격 자체가 달랐다. 그런 유중혁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모데우스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유중혁에게 다가왔다.
[흥미롭군요. 마지막으로 권속을 통해 만났을 때는 ‘세이스비츠 공단’에 있었는데······.]
분명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유중혁의 눈에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게 느껴졌다. 진천패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고, 목덜미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그 짧은 사이 ‘길로바트’로 이동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작위를 차지해버리다니······ 정말 대단한 솜씨군요, 구원의 마왕.]
‘구원의 마왕’이라니······.
아무리 봐도, 누굴 찾아온 것인지는 명백해 보였다.
‘빌어먹을 김독자.’
자칫하면 엉뚱한 곳에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짧은 사이, 유중혁은 수십 가지의 생각을 떠올렸다.
‘놈은 불완전한 화신체 상태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무리겠지.’
‘화신체라고 해도, 여기는 마계니까.’
‘그러면 도망칠까?’
‘그것도 무리다.’
‘마음먹고 화신체로 현현한 마왕을 떨쳐낼 방법은 없다.’
본래 ‘마왕’은 이 시나리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
겉으로 드러나는 스파크만 보아도, 실시간으로 무시무시한 개연성이 소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만한 결심을 하고 나타난 상대를 당장 떨쳐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기대할 방법이 있다면, 하나뿐이다.’
‘놈이 개연성을 탕진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아무리 마왕급이라고 해도 하위 시나리오에 오랫동안 화신체를 현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약간의 시간만 끈다면 녀석은 강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이 ‘전투’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
결국, 유중혁은 자존심을 잠시 굽히기로 했다.
“그래, 내가 ‘구원의 마왕’이다. 넌 누구지?”
[······조금 이상하네? 원래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었나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런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얘길 하러 왔다면 용건이나 말해라.”
[후후, 그러죠. 그런데 얘기하기 전에,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이에요.]
“뭐?”
따악― 하며 아스모데우스의 작은 손가락이 튕기는 순간.
츠츠츠츠츠!
가공할 스파크가 몰아치더니, 팔이 반쯤 찢겨 나간 작은 인형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유중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는 마왕.
겨우 [은둔자의 망토] 정도로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왜 이곳에 ‘대천사’의 상징체가 있는 겁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신가요? 이래도 말인가요?]
츠츠츠츠츳!
강렬한 스파크가 몰아치자, 우리엘의 인형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상징체를 보아하니, 대충 누군지 알겠군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봅니다.]
[대천사 우리엘. 당신의 형제 라파엘은 잘 있습니까? 그에게 진 빚을 아직 잊지 않았다고 전해줬으면 좋겠군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노호성을 토합니다!]
[물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에요.]
유중혁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곳은 마계. 아무리 우리엘이라고 해도 간소화 된 상징체로 화신체인 마왕과 대적할 수는 없다. 유중혁은 망설이지 않고 기운을 발출했다.
“그만둬라.”
여기서 우리엘의 상징체를 잃는 것은 곤란했다.
만약 여기서 우리엘을 잃게 되면, 그는 자칫 시나리오의 미아가 될 수 있었다. 끓어오르는 유중혁의 마력압에,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에 경이가 스쳤다.
[흐음? 이 기운은······ 강하군요. 하지만······.]
다음 순간, 아스모데우스는 유중혁의 코앞에 있었다.
[어디서 한낱 필멸자가 별의 흉내를 내는 건지.]
순식간에 뻗어진 작은 팔이 유중혁의 턱을 붙잡았다.
“큭······!”
[역시 그대는 ‘구원의 마왕’이 아니야. 그렇지?]
유중혁은 다급히 그 손을 뿌리치며 [진천패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패도는, 아스모데우스의 손에 너무도 쉽게 붙들렸다.
[이렇게 예쁜 얼굴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처음부터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까가강!
그 말과 함께 [진천패도]가 우그러지며 반으로 두 동강 났다.
[나를 두려워하고 있구나. 귀여운 아이야.]
“크윽······.”
[그렇게까지 반항하면, 내가 대화할 마음이 사라지잖아.]
새카만 그림자들이 아스모데우스의 뒤쪽으로 몰려들었다. 보는 것만으로 질식할 듯한 어둠이 허공으로 집약되며 거대한 뿔을 가진 괴수의 형상을 빚었다.
[짓밟고 싶어라.]
유중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월좌인 그를 짓누를 정도의 강대한 설화.
그 아득한 존재감 앞에서, 유중혁은 조용히 ‘초월형 1단계’를 준비했다.
승산은 없었지만 유중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단 한 순간만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놈을 꺾을 수는 없어도 ‘지구 시나리오’로 귀환할 시간은 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투콰아아앙!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는 것으로, 유중혁은 모든 육신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관절이 꺾였고, 배를 두드리는 마력에 서 있을 힘조차 모조리 빼앗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넝마가 된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런 유중혁을 들어 올린 아스모데우스가, 유중혁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믿을 수 없군요. 한낱 인간이 이렇게 숭고한 절망을 가지고 있다니.]
“개······ 자······ 식.”
[페르세포네가 말하길 분명 ‘김독자’라는 이야기가 최고일 거라고 했는데. 후후.]
고요히 입맛을 다시는 아스모데우스.
유중혁은 그런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김독자.’
이젠 방법이 없었다. 다음 회차를 기대하는 수밖에.
천천히 눈을 감은 유중혁의 시계가 뒤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초침이, 분침이, 그리고 시침이.
거대한 태엽이 지금껏 걸어왔던 방향의 정반대로 움직이려는 그 순간.
「그러니까, 제발 일찍 좀 생각하라고 했잖아.」
갑자기, 유중혁의 시계가 멈췄다.
*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거대한 스파크가 유중혁의 주변에서 튀어 오름과 동시에, 깜짝 놀란 아스모데우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유중혁의 내부에서, 뭔가 다른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나였다.
[당신은······.]
츠츠츠츠츳!
[성좌, ‘구원의 마왕’이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새파랗게 일렁이는 눈으로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 화신을 건드리지 마라, 아스모데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