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222화
이번 회차에, 녀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흘렀다.
······설마, 아니겠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유중혁이 ‘녀석’이라고 칭할 만한 녀석은 많으니까.
이전 회차에서 유중혁이 만난 ‘녀석’만 몇 명인데, 그게 나일 리가······.
그러나 종종 등장하는 유중혁의 사유들을 읽으며,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회차를 반복한다고 나아진다 생각하지 말라 했었지.’」
「‘이번 생은 이번 생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겠다.’」
제기랄, 이건 아무리 봐도 내가 한 말이잖아.
나는 페이지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다른 장면들을 훑었다.
‘그 녀석’이 남겼다는 말들은 그 후에도 왕왕 등장했다. 한 번도 ‘김독자’라는 이름이 표기된 적은 없었지만, 언젠가 내가 녀석에게 건넨 듯한 말들이었다.
물론 나도 내가 한 말들을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봐도 나 말고 유중혁에게 이런 말들을 건넬 인물은 없었다. 누군가 그런 건방진 말을 했다면, 진즉에 유중혁에게 목이 달아났을 테니까.
“······정신병 걸리겠네 진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혼잣말을 궁금해합니다.]
나는 제천대성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뜻밖에도, [제4의 벽]이 나를 도와주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요컨대, 현재 상태란 이런 것이었다.」
그래, 말해봐.
「하나, ‘멸살법’의 1차 수정본이 도착했고.」
「둘, 수정본은 유중혁의 4회차부터 시작하고 있었으며.」
「셋, 4회차 유중혁의 회상에 ‘김독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했다.」
참으로 일목요연한 정리였다.
그리고 그 세 가지가 방증하는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유중혁의 ‘3회차’는 실패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나와 유중혁이 이 세계의 결말에 도달했다면, 유중혁이 4회차로 넘어갈 턱이 없을 테니까.
즉, 가장 합당한 추리는 이것이었다.
내가 개입한 3회차는 실패했고, 그 실패 이후의 회차가 이 ‘멸살법’의 수정본에 새롭게 기록되었다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이미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 세상이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멸살법’의 텍본을 다시금 살폈다.
하나의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또 다른 의문들이 잔뜩 산적해 있었다.
나는 [제4의 벽]을 통해 일단 떠오르는 의문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왜 유중혁의 ‘4회차’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내가 등장인물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4회차부터는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내가 좀 더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두 번째였다.
「만약 ‘1차 수정본’이 미래의 일을 서술한 거라면, 내가 앞으로 하는 행동에 따라 ‘2차 수정본’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 ‘1차 수정본’이 ‘확정 미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높은 확률로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만약 이것이 ‘확정된 미래’라면, 작가가 굳이 이걸 나한테 보냈을 리가 없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는 이 ‘수정본’을 통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대로 가면 3회차는 실패로 돌아가고, 4회차의 유중혁은 홀로 또 다시 회귀를 반복하게 된다고.
그런 경고를 보낸 셈이다.
물론 작가가 지독한 악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어차피 생각해 봐야 답도 없으니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이걸 다 읽어야 한다는 건데······ 골통 깨지겠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멸살법’을 계속해서 읽어갔다.
바뀐 부분도 있었고, 그대로인 부분도 있었다.
하여간,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 속으로 수많은 감회가 교차했다.
‘유중혁 이 자식, 내가 그 지랄을 했는데도 또 이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과.
‘어? 이것봐라. 그래도 좀 달라졌네?’
하는 생각들.
또는······.
‘그랬지, 여기 참 재밌었지. 이 부분 좋았는데.’
‘시발, 존나 설명 많네 진짜······.’
‘······아니, 그래도 문장이 좀 단정해진 것 같은데? 작가가 성장했나?’
그런 상념들 속에 잠겨 페이지를 내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독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멸살법’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전히 개복치 짓거리를 반복하는 건 비슷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은 내 개입으로 인해 유중혁의 자잘한 실수가 좀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괄목할만한 부분은 4회차의 옥수역에서 나처럼 ‘어룡’을 잡고 시작했다는 것.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 녀석도 여기서 히든 시나리오를 얻었겠지.’」
그리고 8회차와 11회차의 [극장 던전]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선 그 녀석 덕분에 살았었지. 뭐, 내버려뒀어도 어떻게든 살아났겠지만.’」
그 부분을 읽을 때는 거의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자랑할 곳이 있다면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여러분, 보세요. 빌어먹을 개복치 자식이 이만큼이나 성장했다고요.’
물론 ‘멸살법’의 독자는 나밖에 없으므로 자랑할 곳 따위 있을 턱이 없다.
그렇게 한참이나 빠르게 내리던 스크롤이 멈춰선 것은 불현듯 떠오른 의문 때문이었다.
잠깐만, 이 녀석 생각보다 잘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럼 이 다음 내용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은 유중혁은······ 이 세계의 제대로 된 ‘결말’에 도달한 건가?
“뭐야, 멀쩡하네? 아일렌이 다 죽어간다고 그랬는데.”
“김······ 중혁 씨. 몸은 좀 괜찮은가?”
끼익,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장하영과 한명오였다.
그러고 보니 아일렌한테 이 둘을 불러달라고 말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엇, 그거 스마트폰 아냐?”
장하영은 내가 들고 있는 기기를 보자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나는 가볍게 폰을 쥔 손을 바꾸며 대답했다.
“아냐, 저리 가.”
“혹시 문자도 돼? 전화는? 인터넷은?”
“될 턱이 있냐.”
내 냉담한 대답에 장하영이 시무룩해진 눈치로 말했다.
“······그럼 왜 부른 건데?”
“내가 말해준 성좌들한테 계속 연락해보고 있냐?”
“아아, 걔들?”
장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 관심없어 하던데.”
“그래?”
앞으로 닥쳐올 시나리오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은 시나리오를 통해 강림한 재앙이었거나 개별적인 성좌였지만, 앞으로 나를 방해할 녀석들은 그보다는 덩치가 있는 녀석들이다. 가령, 빌어먹을 ‘운명’으로 나를 엿먹였던 <베다> 같은 놈들.
그러니 녀석들과 대항하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성좌나 초월좌들의 동향을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다들 자기 할 일 바빠 보이던데. 대부분은 대답도 잘 안해 줘.”
그런데······ 아직은 너무 일렀나 보다.
본래 장하영이 ‘초월좌들의 왕’이 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원작에서 장하영의 편이 되었던 성좌라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원작’도 바뀌어버린 참이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어. 넌 나가봐.”
“······뭐야? 지가 불러놓고.”
장하영이 투덜대며 자리를 비우자, 치료실에는 나와 한명오만이 남았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한명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이상한 데가 있구만. 회사 다니던 시절부터 알고는 있었네만······.”
“됐고요. 왜 부른지는 아시죠?”
“으흠.”
눈치 빠른 한명오는 역시 내가 왜 부른 것인지 아는 것 같았다.
“······사실, 아직 연락이 안 되고 있네.”
“권속 연결은 회복 됐을 텐데요?”
“회복됐네. 그런데 마왕 쪽에서 응답이 없어.”
얼마 전, 나는 [사인참사검]의 힘으로 한명오와 마왕 ‘아스모데우스’와의 연결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슬슬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접촉해 올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다······.
“짐작가시는 건 없으십니까?”
“이젠 더 이상 나를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데 그 순간, 츠츠츠츳 하는 느낌과 함께 한명오의 표정이 바뀌었다.
“궈, 권속 연결이 됐네!”
나는 순간 긴장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
72 마왕 중에서도 손에 꼽는 힘을 가진 마왕이, 이제 한명오의 눈과 입으로 나를 향해 말을 걸 것이다.
그런데, 한명오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응?”
“뭡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네.”
“무슨 일입니까?”
“지, 직접 왔네!”
“예?”
“마왕이 직접 왔다고!”
가슴 속 한 편이 차가워졌다.
마왕이 직접 왔다. 그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직접 끌고 이 시나리오 지역을 방문했다는 것.
나는 비유를 통해 채널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으며 물었다.
“이 근처에 왔답니까?”
“이, 이미 그가 자넬 찾은 것 같네······.”
이미 나를 찾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감각을 키워 보아도, 마왕의 느낌은 없었다.
정말로 이 근처에 마왕이 왔다면 채널의 성좌들이 모조리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화신체가 행사하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인해 일대의 화신들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잠깐, 설마······?”
생각해 보면, 나는 이곳에서 ‘유중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채널에 들어오지 않아 주변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다른 마왕들은, <스타 스트림>의 유명세를 통해 내 위치를 짐작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에 따르면, 지금 내 위치는······.
“이런 제기랄.”
“가, 갑자기 왜 그러나?”
“한 부장, 여기서 [길로바트 공단]이 어느 쪽입니까?”
유중혁이 위험하다.
*
“김독자님!”
“김독자님 만세!”
“공단의 독립이다!”
길로바트 공단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으며, 유중혁은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중혁은 자신의 손에 죽어버린 ‘길로바트 공작’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츠츳, 츠츠츳.
초월좌로서 쌓아온 힘을 과도하게 개방한 탓에, 유중혁의 신체 곳곳은 스파크로 새카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개방할만한 힘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월형 1단계를 개방하기엔 너무 일렀다.’
하지만 그 힘을 개방하지 않고서 단 시간 안에 마계의 공작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성좌들에게도 일부러 숨겨왔던 힘이었는데, 하필이면 한 녀석에게는 들켜버린 셈이 됐다. 유중혁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우리엘 인형을 보며 생각했다.
‘정작 이걸 본 녀석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업적에 흐뭇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에 감동합니다.]
“······공작은 코인을 많이 준다. 그래서 죽였을 뿐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히죽 웃습니다.]
유중혁은 그 메시지에 따로 대답하지 않고 공작의 집무실에서 흘러 나오는 패널 화면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혹부리들이 녹화한 듯한 저화질의 시나리오 영상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유중혁이다!
―내가 바로 유중혁이다!
어이가 없는 장면이었다. 수백의 군중들이 너도나도 자기가 유중혁이라고 외쳐대는 꼴이라니. 제일 꼴같잖은 것은 그 중심에서 제일 큰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허여멀건한 녀석이었다.
―유중혁이다! 유중혁이다! 와아!
유중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뺨에 은은한 홍조가 어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서 김독자를 만나러 떠나자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걸 확인 했으니 됐다. 개인 시나리오는 그만 취소하고,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라.”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직 개인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개인 시나리오의 내용은 김독자를 만나서······.]
“그딴 개인 시나리오를 진짜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어깨를 덜덜덜 떠는 우리엘 인형은 <에덴>이 멸망했다고 해도 짓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그 꼴을 보고 있던 유중혁이 가벼운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보다 네놈은 괜찮은 거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듭니다.]
“나는 이걸로 마계의 공작이 됐다. 그런데 넌 대천사고. 같이 다니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당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기랄.”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은 유중혁이 앞으로 이 대책없는 대천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찰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고합니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엄청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가공할 기운에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진천패도]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적은 칼 한자루를 뽑아들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나의 정수(精髓)처럼 모여드는 새카만 심연.
이 마계의 가장 깊은 어둠이 눈앞에 현현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이 어둠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쳐라. 네 상징체를 지켜줄 수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유중혁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우리엘 인형이 당황한 기색으로 유중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떨림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그 두려움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유중혁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녀석에게 한 번 죽은 적이 있다.”
다음 순간, 주변의 화신들을 모조리 터트려버리는 엄청난 아우라와 함께 어둠의 본신이 드러났다.
[이런 곳에 있었군요, ‘구원의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