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221화 q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덜덜덜 굴러가는 침대차. 아일렌을 비롯한 의회의 공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나를 어딘가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무슨 중환자라도 모시듯 꽂힌 링거로 잘게 쪼개진 설화 파편들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급박한 상황과는 별개로, 내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지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했다. [현재 당신은 ‘길로바트 공단’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혁명가가 되고, 마침내는 ‘길로바트 공단’의 계승권을 얻게 되었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김독자’가 ‘길로바트 공단’의 지배자를 죽였다.」 얼핏 순환 논증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공단의 ‘김독자’는 이 몸이 아니니까. 즉, 쉽게 말해 누군가가 나를 사칭하여 그곳에서 명성을 쌓고, 마침내는 지배자를 죽여버린 것이었다. [<스타 스트림>이 시나리오 오류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새로운 설화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정신 나간 놈이 둘이나 있을 리 없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은 지금 ‘길로바트 공단’에 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고마움에 들떴다. 아! 우리 유중혁이가 사람 됐구나! 이 자식이 지금 나를 구해주겠다고 그 공단에 쳐들어갔구나! 진짜 별생각도 없이 그런 감격에 한동안 젖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턱이 없었다. 그 ‘유중혁’이 나를 구해주겠다고 ‘길로바트 공단’에 쳐들어갔다고? 애초에 유중혁이 내 위기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노릇이었다. 성좌도 아니고 채널 접속도 못하는 놈이 어떻게 내 위기를 알았단 말인가? 그러니, 유중혁은 나를 구하러 왔다기보다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컸다. 놈은 내가 자길 사칭한다는 걸 눈치채고 나를 족치러 마계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뭔가 일이 꼬여서 ‘길로바트 공단’에 먼저 찾아갔고, 거기서 불필요한 시비를 겪어 공단 전체를 엎어버린 것일 터다.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노를 가지고 있어야 그딴 짓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치료 중이에요. 몸 떨지 마요.” 치료실에서 내 설화를 손보던 아일렌이 인상을 쓴 채 안경을 밀어 올렸다.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미안, 본능이라서. 상태는 좀 어때?” “본인 몸상태인데 남말하듯 하지 마세요.” 아일렌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그렇게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기적이라고 밖엔 볼 수 없네요. 조금씩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어요. 설화의 손상이 너무 커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곤란하지만······ 그래도 정양하면 괜찮을 것 같군요.” 다시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했기 때문인지, 호흡의 감각 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추방자가 되었다가 다시 시나리오로 돌아온 느낌이 어떤 것인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것이 ‘이야기’구나.」 마치 포근하고 거대한 세상이 나를 감싸 안고 있는 느낌. 우습게도, 이제야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런 ‘감각’은 대체 어느 누가 설계한 것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진다. “큿······.”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아일렌의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강한 격통이 찾아왔다. [현재 당신의 설화 구성이 불완전합니다.] 시나리오로 진입하며 회복세에 접어들었다곤 해도, 여전히 내 상세는 심각했다. 하긴, 세이스비츠 공작을 처치하면서 그런 꼴을 당했는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기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전투였으니까. 나답지 않게,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잘 모르겠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려 ‘설화병기’를 소환했으니, 앞으로의 이야기도 대단히 복잡해지게 됐다. 나는 미뤄두고 있던 메시지 로그를 열어보았다. [채널 내의 대다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3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자신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4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간만에 후원금이라니. 어쩐지 감개가 무량하구만. [스무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마계 혁명’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과도한 메인 시나리오 스킵으로 인해 보상 수령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클리어로 인한 설화 수령이 대기 중입니다.]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시나리오 메시지도 제대로 들어왔고.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을 자신의 성운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설화병기에 눈독을 들입니다!] 익숙한 헛소리들도 시작됐다. 왜 저렇게들 날뛰는지는 알 만했다. 「설화병기 플루토」 거신병급의 설화병기는 성좌들조차 탐을 내는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게, 거신병은 거대 설화 중 하나인 <기간토마키아>가 발동했을 때만 볼 수 있는 희귀한 병기니까. 소환자의 탑승 없이도 전설급 설화인 [공장]을 장난감처럼 짓밟을 수 있는 병기. 그런 병기를, 성좌들이 탐을 내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 ‘그분’은 오지 않으신 모양인데······.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셨네, 제기랄.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 다행히 그는 나를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딱히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의 설화병기를 멋대로 사용했으니 화를 낼 법도 한데······. 아니, 애초에 하데스가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인지도 모른다. 무려 저승의 왕인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키득키득 웃습니다.] 빌어먹게도, 저 얄미운 녀석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이제 나름 ‘설화급 성좌’이니 격으로 따지면 어떻게 하데스 발가락에라도 비벼볼 만은 할 텐데, 문제는 지금 내 상태였다. 전신을 칭칭 감은 붕대가 지금의 내 상세를 대변하고 있었다. 화신체는 격의 표현형(表現型). 표현형이 망가져 있으니, 자연히 성좌의 격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렇게 다쳐본 건 난생 처음인데······. 팔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손 안의 스마트폰이었다. 내가 히죽거리자, 붕대를 감던 아일렌이 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있지 말라고 했죠.” “우리 엄마도 항상 그렇게 말했지.”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요.” “나한텐 이거 보는 게 절대 안정이야.” 나는 일부러 자세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설명해도 못 알아 듣거나 죄다 필터링 될 게 뻔하고. “세이스비츠 공단은 어때? 아니, 이젠 ‘유중혁 공단’이라 불러야겠군.” “괜찮아요.” 공작이 죽은 후, 공단은 다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었다. [수거 노예]들과 포로로 잡힌 귀족 잔당들의 처우에 관해서는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일렌은 잘 해내고 있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아일렌이 물었다. “당신, 사실은 ‘유중혁’이 아니죠?”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니야.” “하지만 이 ‘공단’의 주인은 이제 ‘유중혁’이에요.”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실제로 내 메시지에도 그런 언급이 있었으니까. [현재 공단의 주인은 ‘공작 유중혁’입니다.] ‘공작 유중혁’이라······. 이 자식은 정말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나는 아일렌을 보며 말했다. “곧 잘나신 공작님께서 직접 찾아올 거야.” 그 말에, 아일렌의 표정이 묘한 긴장으로 물들었다. “······유중혁은 어떤 악마인가요?” “악마는 아냐. 가끔 악마 같을 때도 있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이렇게 말해주기로 했다. “이번 회차의 유중혁은 좋은 놈이야.” 아일렌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보다 부탁이 있는데, 장하영이랑 한명오 좀 불러줄 수 있어?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알겠어요.” 일단 고비 하나는 넘겼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저 ‘고비 하나’일 뿐이었다. ‘혁명가 시나리오’는 끝났지만, 이어질 시나리오는 ‘혁명가 시나리오’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스케일이 컸다. [몇몇 마왕들이 당신의 행적에 관심을 가집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먹히는 쪽은 이쪽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일렌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망설임 없이 패널 화면의 파일을 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1차 수정본).txt 모처럼 보는 ‘멸살법’이라 그럴까. 벌써 부터 심장이 뛴다. ‘1차 수정본’이란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작가는, 대체 이걸 왜 나한테 준 걸까······. 그러나 파일 화면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일렌이 만든 스마트폰이 유사품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내 구형 폰이 그리워질 정도의 성능이랄지. 파일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열렸다. “······폰이 느린 게 아니라 파일이 너무 큰 건가.” 하긴, 이 정도면 최적화되지 않은 PC에서 로드해도 시간이 걸릴 정도의 크기였다. 간만에 어마어마한 양의 텍스트를 접하자, 나는 조금 기가 질렸다. 젠장, 내가 이걸 어떻게 다 읽었지?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정됐는지 알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읽으며 기억과 대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 열 페이지 정도를 읽었을까. ······바뀐 게 크게 없는 거 같은데? 지하철로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유중혁이 하는 짓도 그렇고······. 게다가 이 자식은 수정본인데도 대사가 왜 이 모양인지. 그런데, 원래의 ‘멸살법’에 없던 문장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놈이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나는 어떤 서늘한 느낌에 멈춰섰다. 「‘그 녀석이 있었다면, 조금 다르게 판단했겠지만...’」 나는 무의식 중에 스크롤을 굴려 다시 앞 페이지로 이동했다. 스마트폰의 성능 때문에 텍스트가 버벅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섬뜩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첫 장면이 같다고?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시작이었다. 나는 ‘멸살법’의 1화의 가장 첫 페이지에 스크롤을 놓은 채, 한참이나 망연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3회차가 아니었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1차 수정본. 나는 그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유중혁의 네 번째 생이 시작되었다.」 1차 수정본은 유중혁의 4회차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이번 회차에, 녀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