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220화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나타난 거무튀튀한 거신병의 몸체.
원작에서는 명왕의 무기였지만, 후반 회차부터는 유중혁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병기. 신화 속에서 거신을 때려 잡던 그 궁극의 병기가, 지금 나와 제천대성의 개연성으로 눈앞에 소환되고 있었다.
한바탕 피를 게워낸 나는 엉망으로 흔들리는 시야 속에 플루토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화신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시끄러워.
아직은 의식을 유지해야 한다.
적어도, 녀석에게 명령을 할 때까지는.
[뭐야? 여긴 어디야?]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목소리.
역시 이 녀석, 마지막 재료로 ‘자신의 영혼’을 사용했구나.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김남운.”
그러자, 플루토의 둔중한 몸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지하철 메뚜기남?]
“······맞아.”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 김남운이 웃었다.
[하하하하! 뭐야, 진짜 그 시동어 쓴 거야?]
거신병을 소환하는 시동어는, 김남운이 내게 직접 알려준 것이었다.
―알겠어? 시동어를 이걸로 할 테니까 잘 기억해두라고. 제대로 부르면 한 번은 도와줄지도 모르지.
설마 정말로 그 말을 시동어로 할 줄은 몰랐지만.
하긴 죽었다고 해서 특성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역시 네가 직접 들어갔구나.”
[하하하, 당연하지! 기분 째진다고 이거!]
본래 모든 거신병에는 메인 시스템을 총괄할 영혼을 심는다.
그리고 김남운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거신병의 소프트웨어로 심은 것이었다.
[좋아, 특별 서비스다. 타 봐 아저씨. 내가 좋은 구경 시켜줄게.]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 없어······.”
[뭐야? 왜 그 꼴인데?]
나는 힘없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플루토가 고개를 내 손가락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플루토의 입가가 기묘하게 절그럭거렸다. 나는 짓씹듯 입을 열었다.
“끝내버려.”
할당받은 개연성으로 거신병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30초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려움에 질린 공작이 이쪽으로 [공장]을 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어째서, 어째서 진짜 거신병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연마기가 플루토의 외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뭐야, 이 허접한 장난감은?]
쉬익― 쩌저적.
그저 간단히 휘두른 손동작에, 공작이 자랑하던 연마기와 연삭기가 한꺼번에 찢겨나갔다. 마치 종잇장을 찢는 듯 싱거운 손동작이었다.
[겨우 이런 거 부수라고 나 부른 거야? 진짜 너무하네.]
······소환 해제까지 25초.
[존나 짜증나게.]
불평을 이어가면서도 플루토는 착실히 움직였다.
20초.
콰아아앙!
간단히 내뻗은 주먹으로 [공장]의 양팔을 박살냈고.
15초.
휘두른 수도(手刀)로 공장의 활동부를 완전히 마비시켰으며.
10초.
퍼거거걱!
간단히 찍은 니킥으로, 공장의 주요 동력장치를 박살내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공장]이 엄청난 양의 설화를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안쪽의 공작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플루토의 몸체가 내쪽을 돌아 보았다.
[이제 끝났지? 하하, 그럼 이제 뭐하지?]
“······.”
[아저씨. 지금 나랑 붙어볼······.]
엄청난 개연성의 후폭풍이 플루토를 휘감았다. 일대의 시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에 김남운의 목소리가 묻혀갔다.
거신병 플루토의 몸체가 마치 기화(氣化)라도 하듯 가루로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할당된 개연성을 모두 소진해 강제 귀환 조치가 된 것이다.
······1초.
[젠장. 명계에서, 만, 나······.]
빌어먹을 자식.
거긴 다시 안 간다 멍청아.
츠츠츠츠츠!
[‘거신병 플루토’의 소환이 해제되었습니다.]
허공에서 거신병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민들 중 다수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기절해 있었고,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지금 이곳의 화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사신(死神)을 목격한 셈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완파된 [공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전인화]로도 찢을 수 없었던 [공장]의 외피는, 마치 흉폭한 맹수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관절부가 모조리 꺾이고 동력부가 파괴된 [공장]은 움직임이 없었다.
고작 30초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거신병이 저지른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공장을 기어 올라가, 콕핏 쪽에 앉아 있던 존재를 찾아냈다.
꽈드득.
금이 간 콕핏의 뚜껑을 열어젖히자, 피범벅이 된 늙은 악마종이 그곳에 있었다.
“쿨럭, 쿨럭!”
그가 바로 세이스비츠 공작이었다.
공작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네놈. 네놈은 대체······.”
[공장]은 공작의 주력 설화.
그 설화가 작살나버렸으니, 공작이라고 무사할 턱이 없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녀석을 겨눴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혹부리들에게······ 네놈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이미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공작은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불행한 성좌여, 나를 죽여도 너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놈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녀석의 심장을 향해 검을 꽂았다. 그러나 남은 기력이 없었던 까닭에, 검을 꽂은 그대로 녀석의 몸과 함께 공장 아래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끔찍한 통증이 닥쳐왔고,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려온 아일렌이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공작은?”
“죽었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마 공작 세이스비츠를 처치하였습니다.]
[2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당신은 공단의 ‘지배자’를 처치하였습니다.]
[당신은 ‘혁명가’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나리오 진행 루트를 밟지 않아, ‘지배자’ 계승이 취소됩니다.]
[현재 해당 시나리오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존재에게 자동으로 계승권이 전속됩니다.]
[현재 ‘히든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메인 시나리오에 돌입하기 위해 ‘진짜 혁명가’를 죽이세요.]
······역시나. 공작을 죽인다고 해서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마침 나는 유중혁의 이름을 팔고 있었으니, 어쩌면 유중혁에게 공단의 계승권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내 상태는 어때?”
정신없이 내 설화를 수선하던 아일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아요. 내가 고쳐줄게요.”
“······나한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돼?”
아일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말해 줘.”
“10분, 아니······ 5분.”
진즉에 오감은 마비되고 있었다. 입술이 말을 듣지 않고, 손 끝의 감각마저 점차 희미해져갔다.
화신체가 수복할 수 없을만큼 망가진 것인지, 시스템 메시지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마계까지 와서도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일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혁명가를 찾는다고 했죠······.”
“그래.”
“왜죠?”
“그 녀석을 죽여야 내가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이제 숨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일렌이 나를 보았다.
“그렇군요······.”
굳은 결심을 한 듯, 아일렌이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살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혁명가 녀석, 아까 그 대열의 어딘가에 있었겠지. 안 그래?”
힘겹게 토해낸 목소리에 아일렌의 말이 끊겼다.
“많이 숨고 싶었을 텐데, 실은 도망가고 싶었을 텐데도.”
“······.”
“그래도, 나와서 열심히 싸웠을 거야, 분명.”
아일렌은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보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울지 마. 나 안 죽을 거니까.”
나는 힘없이 웃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혁명가’를 죽이면 지금껏 내가 쌓아온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혁명가’가 되지 못해도 방법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듯이.
“아일렌. 전에 부탁한 거 있지? 내가 만들어달라고 한 거······.”
아일렌이 퍼뜩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패널을 장착한 직사각형 모양의 통신기기. 내가 제작을 부탁했던 스마트폰이었다.
“좀 켜줘······.”
패널에 불이 들어오자, 바탕화면에 자동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기기를 획득하였습니다.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동기화가 끝나자, 예상대로 바탕화면에 파일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눈가가 자꾸만 흐려져서 잘 보이질 않았지만, 분명 ‘멸살법’의 텍본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는 ‘독자’다. 모든 답은 이곳에 있어.」
나는 어떻게든 눈을 떠서 텍본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눈가가 자꾸만 흐려져서, 앞이 보이질 않았다.
‘멸살법’을 읽어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텐데, 우습게도 나는 그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대로 끝인 건가.」
마침내 아일렌의 얼굴마저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히든 시나리오― ‘자칭 혁명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환청이 들려왔다.
[당신은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정식으로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였습니다!]
[‘추방자 패널티’가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자동으로 수복되기 시작합니다.]
[붕괴 중이던 당신의 설화가 회복세에 접어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멀어지던 오감이 되돌아오고, 희뿌옇게 물들었던 시야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눈을 떠 곁을 돌아보았다. 아일렌은 무사했다. 장하영도, 마르크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73번째 마계에서 ‘김독자’의 이름이 널리 울려 퍼집니다!]
[길로바트 공단의 모든 악마종들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합니다.]
[길로바트 공단의 공민들이 당신의 ‘혁명’에 동참합니다.]
나는 잠깐 잘못 들었나 싶었다.
······길로바트 공단?
여긴······ 세이스비츠 공단인데?
[‘길로바트 공단’에서 ‘김독자’를 영웅시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습니다.]
길로바트 공단은 세이스비츠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내 이름이 울려퍼질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폭발적으로 들려오는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어떤 희미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희미한 가능성이었다.
[누군가가 ‘길로바트 공단’의 ‘지배자’를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은 ‘길로바트 공단’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존재입니다.]
[시나리오 개연성에 의해 당신은 ‘길로바트 공단’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하······.”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퍼져 나가는 안도가 있었다.
왜일까.
나는 그 순간 아일렌의 손목 시계를 보고 있었다.
거꾸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향하는 시계.
어디로도 되감기지 않고, 착실하게 나아가는 그 시간.
얼마든지 되돌아갈 수 있으나, 이번만큼은 돌아가지 않은 바늘.
“······왔다.”
그 마음이, 너무 기꺼워서 나는 모처럼 녀석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응? 무슨 말이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짜 유중혁이 왔다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이 세계에 놈이 있음을.
굳건한 진천패도를 쥔 채 악마종을 도륙하는 녀석이, 이 땅의 지평선 너머에 지금 막 도착했음을.
나는 그 순간의 감정에 격앙되어 일순 스마트폰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아마도, 김독자는 그 스마트폰을 먼저 확인했어야 했다.」
[제4의 벽]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떨어진 폰을 주웠다.
늘 그렇듯, 화면에는 텍본의 제목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나는 뭔가를 깨닫고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졌다.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텍본의 제목 뒤에 이상한 말이 더 붙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1차 수정본).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