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21화
일행들은 잘 싸웠다.
사실 조금 놀랄 정도였다.
특히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와 함께 전위로 나온 이현성과, 그에 보조를 맞춘 정희원의 판단이 아주 주효했다.
전투는 자연스럽게 전방의 우리 셋, 그리고 후방을 담당하는 나머지 셋의 구도가 되었다.
투콱!
전투가 시작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땅강아쥐 몇 마리가 목이 꿰뚫린 채 바닥에 늘어졌다.
달려드는 또 한 마리의 땅강아쥐를 제압한 이현성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종합 능력치만 올려놓는다면, 인류는 그리 약하지 않다.
그렇다고 쳐도, 이현성의 정신력은 이 세계에서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괴물과의 조우에서 저렇듯 태연할 수 없다.
괜히 그가 훗날 ‘강철검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희원 쪽이었다.
“생각보다는 패턴이 단순한데요?”
깨갱!
과연 [검도] 스킬이 허투루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인지, 그녀의 칼끝이 닿을 때마다 땅강아쥐들은 다리든 꼬리든 하여간 어딘가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하아압!”
정희원은 최근에 쌓은 코인을 모조리 근력에 투자한 케이스였다. 지속력은 떨어지지만,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생각보다 쓸 만했다.
휘익!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칼이 허공을 그었다.
“젠장, 한 마리 흘렸어요! 부탁해요!”
숨이 벅찬지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래도 체력 레벨이 낮아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게 그녀의 유일한 약점일 것이다.
그르르르!
상처를 무릅쓰고 일행 사이로 난입한 땅강아쥐는 제법 영리했다. 대열을 흩트리는데 성공한 녀석은, 사냥꾼의 본능으로 가장 약해보이는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맡겨 두세요.”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땅강아쥐는 알지 못했다.
퍼억!
이길영의 작은 양손이 휘두른 둔기가 땅강아쥐의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인 까닭에 타격력은 부족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마무리는 다른 이들이 도와줄 수 있었으니까.
푸욱!
날을 세운 유상아의 창극이 땅강아쥐의 몸통을 꿰뚫었다. 땅강아쥐가 몇 번인가 몸을 뒤틀었다. 유상아는 곤혹스런 얼굴이었지만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끼이잉······.
기력이 다한 땅강아쥐가 축 늘어졌다.
솔직히 유상아는 적응이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의외였다. 보통이라면 저기 서 있는 한명오처럼 패닉에 빠지는 게 정상이니까.
“으, 으으으······.”
일행들이 분투하는 중에도 한명오는 그저 뒤쪽으로 숨기 바빴다. 그나마 제대로 숨지도 못해 정강이 부근을 물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깨갱······ 찍!
내가 꽂은 가시에 마지막 땅강아쥐가 꿰뚫리며, 이내 주변은 잠잠해졌다. 나는 가시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일행들을 살폈다. 한명오를 제외하곤 다들 작은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훌륭한 첫 승리였다.
긴장이 풀린 유상아와 이길영이 자리에 주저앉았고, 이현성도 창을 바닥에 꽂은 채 이마의 땀을 닦았다. 주변에 늘어진 땅강아쥐들의 숫자를 세던 정희원이 탄식했다.
“······독자 씨, 대체 혼자 몇 마릴 잡은 거예요?”
“네 마리요.”
“쳇, 난 두 마리인데.”
“저도 세 마리 잡았습니다.”
뿌듯하게 창극을 들어 보이는 이현성을 보며,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곤 해도 한 마리밖에 차이가 안 나다니.
나는 스킬을 발동해 이현성의 특성창을 훔쳐보았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현성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강철의 주인
전용 특성 : 불의를 외면한 군인(일반)
전용 스킬 : [총검술 Lv.2], [위장 Lv.1], [인내심 Lv.1], [정의감 Lv.1], [무기 연마 Lv.2]
성흔 : [태산 밀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 Lv.12], [근력 Lv.9], [민첩 Lv.9], [마력 Lv.6]
종합 평가 : 특성 진화의 계기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에 대한 해당 인물의 신뢰도가 상당합니다. 해당 인물의 배후성이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허, ‘스타터 팩’이라니.
이러니까 강할 수밖에 없지.
아무래도 강철의 주인은 이현성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스타터 팩은 화신의 평균 종합 능력치가 10레벨 미만일 때 사용할 수 있는 코인 패키지였다.
사용 즉시 종합 능력치 레벨을 1씩 올려줌과 동시에, 초반에 유용한 숙련 스킬인 [무기 연마]를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아이템 팩.
대부분의 화신들이 스타터팩은커녕 무과금으로 착취당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현성은 대단히 운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독자 씨,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만······.”
“아, 아뇨.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조금 부럽기는 하다만······ 뭐, 나도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건 아니다. 안 사는 거지. 종합 능력치 평균이 10을 훌쩍 넘긴 지금 사봤자 나만 손해니까.
젠장, 도깨비 보따리를 조금만 일찍 열었어도.
“일단 잡은 땅강아쥐를 모아 보죠. 오늘 치 식량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으음······ 근데 이걸 어떻게 조리하죠? 이대론 못 먹을 텐데.”
“지금은 못 먹지만, 방법이 있을 겁니다.”
너무 태연하게 대꾸한 것일까.
일순 일행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현성이었다.
“저기, 실은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네?”
“독자 씨는 혹시······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겁니까?”
아차 싶었다.
“그게······.”
문득 지금껏 읽어온 소설 속의 회귀자들이 떠올랐고, 이어서 유중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거였구나. 회귀자들의 기분이라는 건.
보통 회귀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말했더라.
몇 가지 레퍼토리가 떠오른다. 그냥 “감입니다”라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경우가 있었고, 내가 유중혁에게 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대답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감히 독자 입장에서 말하건대, 가장 좋은 대답은.
“으, 으어어억!”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계속 만드는 것이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었어요!”
정희원이 외쳤고, 이현성이 달렸다. 하지만 숨어 있던 땅강아쥐의 행동은 누구보다 빨랐다. 다른 녀석들보다도 월등히 덩치가 큰 녀석이었다.
텁―
“사, 살려줘어어······!”
한명오의 다리를 낚아 챈 땅강아쥐가 파고 나온 땅굴로 그를 끌었다. 제일 가까이 있던 유상아가 창을 휘둘렀지만, 공포에 질린 한명오가 그녀를 덥석 껴안는 바람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거 잡아요!”
뒤늦게 이현성이 창의 손잡이를 뻗었지만, 그의 창은 애꿎은 바닥만을 헤집고 말았다.
이미 땅강아쥐와 두 사람은 바닥 속으로 사라진 뒤였던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예정된 고구마에 분개합니다.]
정희원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 나 저 아저씨 때문에 암 걸릴 줄 알았다니까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늦어 버려서.”
이현성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쫓아가야 할까요?”
나는 놈이 사라진 굴을 살폈다. 평범한 굴이 아니었다. 만져지는 공기에 촉감이 있다. 마치, 어둠을 곱게 갈아 넣은 듯한 느낌.
나는 생각하는 척 뒤쪽으로 물러서며 슬며시 스마트폰을 켰다.
남은 배터리는 5% 남짓. 새벽에 소외 그룹 사람들에게 식량 하나와 맞바꾼 충전량이었다.
[특성 효과로 읽기 속도가 상승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원하는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땅강아쥐들이 서식하는 [어둠 자락]은 마계의 나무인 [어둠 뿌리]로부터 방출되는 일종의 아공간(亞空間)이다. 산소 대신 검은 에테르를 호흡하는 땅강아쥐들은 [어둠 자락]의 근처가 아니면 자생하지 못한다······」
대강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복습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렇군.
이곳이 [어둠 자락]의 입구다.
나는 그와 관련된 부분을 마저 읽은 후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독자 씨?”
이현성이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갑니다.”
“아, 그러면······.”
“하지만 많은 인원이 들어가기엔 위험 부담이 큽니다. 이현성 씨와 정희원 씨는 이곳에서 사주경계를 서 주세요.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란 정희원이 물었다.
“설마······ 길영이랑 둘이서 들어가시게요?”
“놈을 쫓는 데에 길영이의 능력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가 강하게 반발하려는 찰나, 나는 손을 들어 이현성을 불렀다.
“그리고 이현성 씨. 정희원 씨 상태가 좋지 않으니, 부디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이현성도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난 괜찮다고요!”
“정희원 씨, 자신감은 좋지만 만용은 부리지 마세요.”
“······.”
숨을 고르지 못하는 정희원의 모습. 그녀는 아직 맹독 안개의 중독에서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나는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이길영을 데리고 굴속으로 들어섰다. 분명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파고 내려간 굴이었는데도, 굴속에 들어간 순간 중력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서서 걸을 수 있었다.
[어둠 자락]이 방출하는 마력 때문이었다.
“이쪽이에요.”
한 치도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 속이었기에, 나는 오직 이길영의 손끝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에테르는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손전등도 의미가 없었다. 이길영의 [다종 교감] 능력이 없었다면, 또 코인을 사용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저기, 형.”
이길영이 나를 불렀다.
“아까 일부러 그런 거죠?”
“······뭐가?”
“저 괴물이 누나랑 아저씨 잡아갈 때, 일부러 놔준 거잖아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닿은 이길영의 손끝이 낯설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기도 전에 이길영의 부연이 이어졌다.
“그때 형 얼굴을 보고 있었거든요.”
그 짧은 사이에도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건가. 정말 무서운 꼬마다. 이 정도로 눈치가 빠른 녀석에겐 애써 숨겨서 좋을 것이 없다.
“그래, 맞아.”
대답하기가 무섭게, 머릿속으로 메시지 폭탄이 날아들었다. 하긴, 성좌 놈들에겐 이것도 요긴한 구경거리겠지.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잔혹함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눈을 빛내며 당신을 채근합니다.]
“왜 그랬어요?”
“땅강아쥐의 습성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답해주기로 했다.
“땅강아쥐들은 자신들의 포획물을 한 곳에 비축해 두는 습성이 있어. 먹이뿐만 아니라, 진귀해 보이는 물건들도 꽤나 모으는 편이지. 가령 아이템이라든가. 그런데 녀석들의 비축 장소는 길이 매우 복잡해서, 놈들이 직접 뚫은 길을 따라가지 않고서는 찾아낼 수가 없어.”
이길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한명오를 데려갈 건 예상했어. 유상아 씨까지 딸려 간 건 예상 못했지만.”
“그럼 형의 목적은 누나랑 아저씰 구하는 게 아니라, 아이템인 거죠?”
“그래. 실망했니?”
“아뇨.”
이길영의 작은 손이 내 손가락을 꽉 쥐는 것이 느껴졌다.
“형은 거짓말을 잘 못해요.”
“······.”
“형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지하철에서도 날 구해주지 않았겠죠. 난 형을 믿어요.”
이길영은 아이 답지 않은 녀석이지만, 그럼에도 아이일 뿐이다.
이길영은 모른다.
어른스러운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걸.
[일부 성좌들이 감동하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2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어른스러움’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비열한 어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굴은 생각보다 길어서,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저, 형.”
“응.”
“형은 혹시 신인가요?”
“······뭐?”
“아니면 ‘주인공’인가요?”
아이들은 가끔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비유와 실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 살기 때문일까. 이길영은 자신의 질문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난 신도 주인공도 아냐. 오히려 늘 주인공을 부러워했었지.”
“그래도 형은 이 세계에 대해 뭔가를 알고 계신 거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맞아.”
“그럼 하나만 물어 볼게요.”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이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나요?”
“소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그런 보상이 있잖아요. 이 이야기의 끝에도, 그런 게 있는 거죠?”
어둠 속에서 이길영의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문득 죽은 엄마를 보던 이길영의 표정이 떠오른다.
이 세계에 적응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앓는다. 누군가는 광기로, 누군가는 광신으로, 또 누군가는 비합리적인 낙관으로.
“그래, 있어.”
나는 이곳이 짙은 어둠 속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왜냐하면 이길영은 지금 내 표정을 절대로 볼 수 없을 테니까.
“거의 다 왔어요, 형.”
주변의 검은 에테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어둠 뿌리]가 근처에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긴장하며 가시를 뽑아 들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숨을 죽입니다.]
어디선가 바닥을 쑤시는 땅강아쥐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공간감은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어둠 사이로 누군가가 피워 놓은 듯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불빛 너머에 놓여 있는 거무튀튀한 상자 하나.
제대로 왔다는 확신이 든 순간, 귓가에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서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땅강아쥐의 보물 창고’에 입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