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210화 Episode 40. 부화(孵化) 쿠구구구구! 그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너무 엄청난 기분이라서, 나는 “나는 유중혁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감각에 집중했다. 마치 수십 미터의 시공간 일대가 나를 향해 무릎을 꿇는 느낌. 이것이 성좌들이 느끼는 기분이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당신의 격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합니다.] 임의로 그 수준을 조절했는데도 화신체에 엄청난 부담이 왔다. 애초에 제대로 된 격의 발출도 아니었는데도. [화신체와의 부조화로 당신의 격이 일시적으로 조정됩니다.] [현재 당신의 격은 ‘위인급’입니다.] 설화급 격은 어지간한 화신체로는 감당할 수 없다. 위인급조차 심볼 형태로는 격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내 누더기 화신체로는 턱도 없다는 것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럼에도, 이 정도였다. “끅, 꺽, 커어억······!” 고통스럽게 가슴을 쥐어뜯는 주변의 화신들. 그 광경을 보고서야 나는 재빨리 격의 반경을 ‘후작들’에게로 한정했다. 반쯤 무릎을 꿇은 후작들은, 이미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마계의 누군가가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마계의 누군가가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마계의 누군가가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정말 잠깐 격을 발출했을 뿐인데 무려 세 개나 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 가까운 마계의 마왕들이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녀석들에겐 언젠가 알려질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 정도 격으로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당신의 화신체가 당신의 격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스스스스스. 등 뒤쪽의 설화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각지대여서 후작들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이, 이 기운은······.” “성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스테온 후작이 비명을 질렀다. 곁에 있던 쿠아르테토도 거의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가진 ‘격’에 비해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내 격에 상대방이 기가 죽었을 때 끝내버려야 한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츠츳! 그런데 왜일까. 허공에서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스킬이 강제로 종료되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너무 서둘렀나? [개연성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하였습니다!] [‘추방자 패널티’가 가속화됩니다.] 최근 전투 활동을 지속했으니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화신체의 붕괴가 생각보다도 훨씬 빨랐다. 성좌의 힘을 발출하는 것의 부담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후작들도 슬슬 적응을 시작한 모양인지, 나를 향해 기세를 마주 끌어올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전설급 설화 하나 정도, 혹은 역사급 설화 다수를 보유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후작이니 <낙원>의 라인하이트 정도는 되는 녀석들이겠지. “성좌라고 해도 시나리오 안에서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게다가, 제법 영리하기까지 하다. 스스스스슷. 다시 [처형관]으로 변신한 오스테온 후작이 나를 향해 낫을 뽑아 들었다. 유일한 [투사]인 장하영이 나가떨어진 상황. 지금으로서는 놈을 죽일 방법이 없다. 심지어 상황은 내게 더욱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추방자라고?” “······설마?”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설화 파편이 제법 많아졌는지, 결국 후작들도 눈치채고 말았다. 스킬 제한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쓸 수는 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저 녀석의 설화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다친 맹수를 사냥하려는 하이에나들이, 조심스레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원 병력을 불러! 시간만 끌면 놈은 홀로 자멸할 거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다가오는 [처형관]들의 기척. 추가 병력이 움직였는지, [공장] 쪽에서도 귀족들의 심상찮은 동태가 느껴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후작급을 해치우려면 최소 [전인화]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스킬은 쓸 수 없다.」 시간을 더 끌면, 내 화신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공민들도 위험하다. 「스킬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놈들을 죽여야 한다.」 어떻게?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음을 먹은 내가 발을 내딛는 순간, 다가오던 오스테온 후작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악!” 푸슈슈슈슛! 바닥을 구르는 오스테온 후작의 팔. 처형관으로 화한 그는 통상 공격에 의해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그렇게 방심하고 있으면 안 되지.”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린 것인지, 녀석의 배후에 선 장하영이 악당처럼 웃고 있었다. 아까의 상세를 고려하면, 믿을 수 없는 회복력이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스킬 ‘불사지체 Lv.7’을 사용 중입니다.] ······불사지체? 그건 무림계통의 초재생 스킬인데? 내가 다가가자, 시선을 받은 장하영이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아까 채팅하던 사람들 중에 무림인이 하나 있었는데······.”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리는 장하영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흑염룡이랑만 대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나저나 불사지체라면 ‘파천검성’의 것인데······. “모두 쳐라! 투사부터 죽여!” 다시 [처형관] 상태를 해제한 오스테온 후작이 지원 병력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남은 네 명의 처형관과 더불어 몰려온 귀족들이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백작 셋에 남작 다섯. 개중에는 처음 이곳에 왔던 날 봤던 남작 멜렌이란 녀석도 있었다. “저기다! 혁명가님을 구해라!” 멀리서 격앙된 공민들도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아직 그 숫자가 부족했다. 흉흉한 병장기를 꺼내드는 귀족들을 보며 안색이 창백해진 장하영이 물었다. “방법 없어? 난 얘들은 못 죽여.” [투사]는 [처형관]을 상대로는 최강이지만, 다른 모든 포지션에게 취약하다. 결국, 나머지는 내가 상대해야 한다. “너는 [처형관]만 처리해.” 나는 장하영을 노리는 다른 귀족들을 막아섰다. 무수한 창칼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현재 당신은 시나리오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경호를 받고 있으니 결코 죽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고 하나씩 차분히 처리해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지배자’가 강제로 ‘밤’을 회수하였습니다.] [지배자]. 그것은 이 공단의 주인인 [공작]을 일컫는 포지션. [오늘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밤의 시간은 끝났지만, 여전히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당신을 보호하던 시나리오의 힘이 사라집니다.] “놈의 경호가 풀렸다! 죽여버려!” “굉장한 설화를 가진 놈이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 달려드는 귀족들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 좀 쓰긴 했는데, 그거 실수야.” [밤]이 사라진 이상 [처형관]은 힘을 쓸 수 없다. 그리고 [공단]을 이끄는 핵심 전력인 두 후작은 이곳에 있다. 내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상황이었다. “설화를 개방한다.” 화신체가 불안정해 스킬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싸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급 설화, ‘벌레 학살’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상태로 전설급 이상의 설화를 깨우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전설급’ 설화는 쓸 필요도 없었다. 쿠구구구구구구! 가진 ‘격’의 힘을 최고조로 활용하는 설화. 언젠가 [암흑성]에서 텐타치오라는 악마 귀족이 사용했던 설화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눈앞의 귀족들이 갑자기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만 명의 약자를 학살한 대가로 얻는 [벌레 학살]. 강자를 만나면 형편없이 취약해지는 설화지만, 약자를 상대할 때는 다르다. [당신보다 격이 낮은 모든 존재에게 절대적인 힘을 가집니다.] [해당 설화는 일정 수준 이하의 격을 가진 존재에게만 통용됩니다.] 내 전신에서 배어나오는 무시무시한 기류에, 다가오던 귀족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마, 말도 안 되는······!”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퍼걱! 퍼거거걱!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전신의 근육을 순식간에 팽창시킨 뒤, 오직 주먹만으로 귀족들을 모조리 때려잡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역사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역사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설화들도 하나둘 내 손에 들어왔다. [당신의 화신체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습니다!] 나는 순식간에 남작들의 몸에 바람구멍을 낸 후, 백작들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터트렸다. 순식간에 전황이 뒤바뀌자, 주춤거리며 물러난 귀족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쳐라!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빨리―!” 몇몇은 놓쳤다. 하지만, 중요한 녀석들은 놓치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내게 뒷덜미를 붙잡힌 쿠아르테토와 오스테온 후작이 발버둥을 쳤다. 설화를 끌어 올리려는 기미가 보여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두 녀석의 머리를 부딪친 후 양손으로 심장을 꿰뚫었다. “끄으어어어억······.” 보다 본격적인 반항을 했다면 상황은 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내 ‘격’에 꺾여버린 후작들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새로운 설화를 다수 획득하였습니다!] [악마 후작 ‘쿠아르테토’를 처치했습니다!] [악마 후작 ‘오스테온’을 처치하였습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후작 살해로 인해 마계에 당신의 악명이 퍼집니다!] [마계의 고위 귀족들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업적 보상으로 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소소한 수준의 보상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주변을 돌아보자, 장하영과 나머지도 공민들도 상황을 정리해가는 중이었다. 살아남은 처형관과 귀족들이 공장 쪽으로 진을 친 채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설화, ‘벌레 학살’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순간 시야가 휘청하며 현기증이 찾아왔다. 나는 [공장] 쪽으로 달아나는 잔당들을 향해 외쳤다. “남작 기라트, 남작 사라보스, 백작 모크바!” 살아남은 [처형관]들의 이름이었다. 한명오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처형관들의 이름. 어차피 지금은 장하영도 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녀석들을 쫓거나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나는 너희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다. 네가 누구고 어떤 포지션인지. 그러니, 너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협박을 당한 처형관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공작에게 전해라.”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마계의 하늘에 새벽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너울지는 그림자들 속에서 나는 천천히 말을 맺었다. “[낮]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라고.” 설화의 붕괴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귀족의 잔당들이 공장 쪽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혀, 혁명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혁명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혁명가’ 파트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문장을 떠올렸다. 「밝아오는 새벽빛 속에서, 비로소 멈춰 있던 공단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밤]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의 분노와 절규.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기에, 그런 것이 있는 줄조차 몰랐던 감정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있었다. “혁명가! 혁명가!” “유중혁! 유중혁!” [당신의 영향력이 ‘진짜 혁명가’의 영향력을 넘어섰습니다.] [설화 생성 조건을 만족하여 설화를 획득합니다.] [새로운 설화, ‘은막의 혁명가’가 시작됩니다!] 비형이랑 성좌 녀석들이 이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아깝다. 그랬더라면 코인을 한다발로 받았을 텐데. 그런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의 ‘설화’에 ‘도깨비의 알’이 반응합니다.] [‘도깨비의 알’이 당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품 속의 진동이 강해진다 싶더니, 이윽고 들려오는 메시지. [알의 부화가 임박했습니다.] 쩌저저적, 하고 갈라지는 균열 소리를 들으며,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하긴, 이 무대에 다른 도깨비는 필요 없다. 애초에 이 무대를 이야기 할 도깨비는 정해져 있으니까. [마계에 임시 채널이 생성됩니다.] 마계 시나리오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임시 채널에 입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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