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211화 갑자기 숨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지금껏 테이프로 내 입을 막고 있다가 주욱 뜯어낸 기분이랄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세이스비츠 공단’을 바라봅니다.] 시야가 넓어지며, 화신체로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본 [공단]은 거대한 원형의 돔을 닮아 있었다. 중심부에 위치한 [공장]을 중심으로 퍼진 원형 도시. 그 도시의 화신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채널이다! 채널이 열렸어!” 아마 임시 채널의 개방 메시지가 그들에게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도깨비들이 온 거다! 드디어 우리 마계도 주목을 받는 거야!” 마치 감격이라도 한 듯한 얼굴들. 그럴 법도 했다. 이곳은 시나리오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한때 성좌들과 코인을 증오했던 화신들은, 마계에 와서 누구보다도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야! 괜찮아? 너도 방금 메시지 들었어?” 나는 장하영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자리에 섰다. [임시 채널 입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화신체의 붕괴가 지연됩니다.] 안도의 한숨이 놓였다. 채널은 이야기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요한 장치다. 실제로 채널 입장만으로도 전신의 설화들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물론 추방자 신세를 완전히 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로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설화 붕괴를 막기 위해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세요.] 추방자인 내가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진짜 혁명가’를 죽여야만 한다. 나는 시험 삼아 부서지던 팔과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다행히 아직 핵심 설화는 무사한 듯했다. 망가진 부분이야 어떻게든 수선하면 된다. [현재 화신체의 설화 훼손이 심각합니다.] [수선을 위해 새로운 설화가 필요합니다.] 아직 목록 확인은 제대로 못했지만,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설화들이 다수 있었다. 대부분은 역사급이었고, 전설급도 하나쯤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임시 채널이 닫히기 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나는 멀리서 다가온 아일렌을 향해 물었다. “다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요.” 아일렌의 표정이 어두웠다. 얼핏 둘러봐도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들이 수십을 넘었다. 치명상을 입은 공민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봐서, 상당수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도깨비 보따리.” 내 말과 함께 허공에 익숙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이게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돈이 있는데도 못 쓰는 부자의 기분이 이런 거겠지. 나는 그간 쓸만한 물건들이 들어왔는지를 간단히 점검한 뒤, 3만 코인 정도를 지출해 ‘엘라인 숲의 정기’를 다량 구입했다. “이걸 사람들한테 나눠줘.” “이, 이건······ 이걸 대체 어떻게 구하신 거죠?” “자세한 건 묻지 말고.” 깜짝 놀란 아일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기를 받아들었다. 놀라기도 하겠지. 엘라인 숲의 정기는 오직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채널이 없는 마계에서는 귀품일 수밖에 없다. [임시 채널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품 속에서 [도깨비의 알]을 꺼냈다. 알의 표면에는 실금이 가 있었다. 부화의 징후. 임시 채널은 아기 도깨비들에게 있어 일종의 태동(胎動)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숨쉬기 연습이랄까. 쩌저적. 가볍게 알을 쓰다듬자, 껍질 안쪽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곧 ‘도깨비의 알’이 부화합니다!] [건강한 설화를 섭취시키세요.] 나는 재빨리 설화 파편들을 몇 개 꺼내 알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알이 부르르 떨며 뀨륵, 하는 소리를 토했다. [‘도깨비의 알’이 만족합니다.] [‘도깨비의 알’이 부모의 온기를 원합니다.] 정말 까다로운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비형이 당부한 말이 있었다. ―혹시 알이 부화할 때를 대비해서 말해주는 건데, 부화 직전이 되면 꼭 알을 품어줘야 해. ―뭐? 왜? ―나도 확실히는 몰라. 근데 그렇게 해야 건강한 도깨비가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우리도 다 그렇게 해. 도깨비가 그런 미신을 믿는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서 ‘미신’이라는 게 존재나 할까 싶기도 했다. 모든 설화가 현실이 되는 세계니까.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공장] 쪽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후작이 죽었으니, 세이스비츠 공단은 이제 완전히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양팔을 꺾어 놓은 데다 마지막에 경고도 제대로 해뒀으니, 이제 [공장] 쪽에서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어차피 지금 몸 상태로는 녀석들과 대적하기 무리니까······ 뭐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티겠지. “아일렌. 지금부터 공민가를 폐쇄해.” “네?” “어차피 당분간 귀족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쪽도 쉬면서 준비를 좀 해보자고.” 나는 점점 태동이 심해지는 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공작]만이 문제가 아니다. 채널이 열리면 진짜 괴물들이 나타날 테니까. 그때까지, 몇 가지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일행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의원실 안에 마련했다. 내 몸 상태를 점검하던 아일렌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움직이지 마세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알겠어.” “건성으로 말하지 마세요. 당신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역사급 설화를 다섯 개나 수선용으로 쓰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정말 가성비가 좋지 않은 몸이다. 설화를 덕지덕지 발라야 간신히 살아날 수 있다니.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아직 전설급 설화도 있으니 괜찮아.” 나는 아까 후작 하나를 죽이고 획득한 ‘전설급 설화’를 확인했다. [전설급 설화 ‘주사위의 신’을 보유 중입니다.] 전설급 설화 ‘주사위의 신’. 참고로 ‘멸살법’에 따르면 이 설화는 대충 이런 느낌이다. 「‘도박의 제왕’이 가지고 있던 설화 중 하나. 이 설화의 주인은 첫 번째로 던진 주사위의 눈금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끔 왜 ‘전설급’ 설화가 된 건지 알 수 없는 녀석들이 있다. 전설급 안에서도 격이 나눠진다 해도, 어떻게 이런 설화가 내 ‘왕이 없는 세계의 왕’과 동급이라는 건지······. 아일렌이 어이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전설급’을 수선용 파편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진 건지는 알고 있는 건가요?” “······.” “아니,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예요? 말로만 듣던 ‘이야기의 가호’가 따르기라도 하는 건지······.” 이야기의 가호라······. 그거, 도깨비들이 자주 쓰는 인사말이었지. “잔소리는 그만. 어차피 이 녀석 때문에 오늘은 못 움직이니까.” 나는 품속의 알을 매만지며 말했다. 앞으로의 모든 계획은 이 녀석이 잘 부화해야 실행할 수 있다. 내 품속을 유심히 바라보던 장하영이 물었다. “그거 뭔데?” “알이야.” “알? 무슨 알?” “도깨비 알.” 내 말에, 장하영을 비롯한 일행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 진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을 내려다보았다. 웅웅. 알에서 간간이 태동이 발생할 때마다 ‘임시 채널’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현재 채널에 입장한 성좌 : 1명] 지금은 외로운 숫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채널은 포화상태가 될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잠깐만! 이거 진짜 도깨비 알이라고? 농담 아니고?” “농담으로 보여?” “······혹시 채널이 열린 것도 이 녀석 때문이야?” “그래.”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만 뻐끔거리는 장하영과 달리, 아일렌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게 정말 도깨비라면······.” “마계에도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야. 언제까지 공단의 노예로 머물 수는 없잖아.” 슬그머니 깨문 아일렌의 입술에서 오기가 느껴졌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구태여 그 마음을 지적했다. “다음 시나리오가 더 최악일까봐 두려운 거야?” 시나리오의 다음에는 언제나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보다 나을지, 아니면 더 최악일지 알 수 없는 시나리오가. 아일렌은 인정하기 싫다는 투로 말했다. “최선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불확실한 차악만을 택하는 삶이 더 최악이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혁명을 일으켜준 건 무척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거기까지 말하던 아일렌은 순간 말을 멎은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마주침에서 그녀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당신은 대체 뭘 위해 이렇게 하는 거죠?” 다만, 그녀는 그렇게 물었고.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보고 싶어서.” 나는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그건······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이야긴가요?” “비슷해.” 그러자 아일렌이 중얼거렸다. “종말의 구도자······.” “······?” “고향 행성의 성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을 추구하는 성좌들이 있다고.” ‘종말의 구도자’라. 그러고 보니 <스타 스트림>에는 그런 녀석들이 있었지. 아직은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기가 아닌데, 아일렌의 고향에서는 벌써 이야기가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일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그 사이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얘도 ‘도깨비’면 결국 우리가 아는 그 녀석들처럼 되어버리는 거 아냐?”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도깨비라고 모두 똑같은 이야기꾼이 되는 건 아니니까.” “하긴,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지. 근데 이 알은 어떻게 구한 거야? 혹부리들도 이런 걸 갖고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망설이는데, 문득 곁을 보니 한명오가 나와 알을 번갈아 보며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말 못 할 고충이 있었나 보군. 출산은 괴로운 일이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내가 낳은 게 아닙니다.” “이해하네.” 아무래도 불편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았다. 나는 마왕의 저주 따윈 받은 적 없다고 제대로 설명을 하려는 순간. 토도돗. 알의 균열이 강해지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도깨비의 알’의 부화가 임박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스타 스트림>이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을 지켜봅니다.] 그 순간만큼은 한명오도, 마르크도, 장하영도, 아일렌도, 그리고 나도 똑같은 마음으로 알을 깨고 나오는 생명체를 내려다보았다. 생명의 탄생에는 그처럼 경이로운 데가 있다. 부서지는 껍질 사이로 슬그머니 보이는 조그만 등. 새하얀 솜털이 덮인 그 등을 보며, 장하영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나 도깨비 진짜 싫어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하지만 이 탄생은, 그렇게 축복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태어난 도깨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는 듯이. 나는 언젠가 ‘멸살법’에서 ‘도깨비 왕’이 말했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들어라. 탄생과 함께 운명을 부여받아,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가엾은 존재들아.”」 막 태어난 도깨비가 울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야 했고, 이런 세상에도 이야기가 있고, 자신은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하므로. 그래,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러니 나를 원망해. [아기 도깨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기 도깨비가 당신을 부모로 인식합니다.] [아기 도깨비의 영혼이 당신과 교감합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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