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207화 「김독자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잘 있을까 모르겠군.」 혹시나 스크린 패널에서 또 지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했지만, 딱히 보여지는 영상은 없었다. 하긴 혹부리들도 그렇게 쉽게 도깨비들 채널 영상을 빼돌릴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밤은 빠르게 다가왔다. 며칠째 숙면을 거의 못 취했지만, 틈틈이 아일렌이 설화를 수선해 준 덕에 화신체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단 임시로 손보기는 했는데, 외부 활동엔 주의해야 해요. 알죠? 당신은 어쨌든 메인 시나리오 이탈자니까.” “꼭 의사처럼 말하네.” “지금은 시계를 다루는 게 아니니까 시계공처럼 말할 수는 없잖아요?” 아일렌이 나를 흘겨보며 수선 장비를 가지고 일어섰다. 이틀 사이에 그만한 일들이 있었는데도, 그녀는 딱히 현재 상황에 불만은 없어 보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아일렌은 줄곧 시계공으로 살아갔겠지.」 유중혁이 마계에 오지 않은 많은 회차에서, 실제로 아일렌은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다. 조용히 고향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만들고, 사라진 행성의 시간을 홀로 반추하면서. 가끔 장하영과 투닥거리고, 마르크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서······ 어쩌면, 아일렌에게는 그쪽이 더 행복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그거 알아요? 요 며칠 사이 시계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언뜻 고개를 들자 아일렌이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단체로 시계가 고장나기라도 했나?” “원래 [공단] 사람들은 시계를 쓰지 않았어요.” “왜지?” “시간 같은 걸 알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기 때문이죠.” ‘멸살법’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그것 때문에, 누군가가 마계를 두고 ‘시간을 잃은 도시’라고 지칭했던 것도 생각났다. “하지만 [밤]의 시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밤]이 오는 시간을 안다고 죽을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너무 오래된 공포는 하나의 법칙이 된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 [공단]에서 [밤]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흘에 한 번 누군가가 죽고, 그가 가진 설화는 공장의 비료로 쓰인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든, 또 어떤 내일을 살아갈 것이든,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다시 누군가가 없는 사흘을 살아간다. “그런데 아무도 죽지 않는 [밤]이 나타났어요. 당신 때문에.” “······.” “사람들은 다시 밤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내일을 생각하며 살아도 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라고요.” 문득 시선을 내리자, 아일렌의 손목에도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오늘 [밤]이 다가오기까지는 이제 세 시간······. 흐르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아일렌도 나도 침묵했다. 아마 [공단]의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시계를 보고 있을 것이다. 아마 오늘 밤은 어젯밤보다 더 치열하고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왜일까. 열심히 움직이는 초침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조금쯤 위로 받은 기분이 되었다.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닌데도. “고마워.” “······딱히 당신 좋으라고 들려준 말은 아니에요. 그냥, 혁명가가 침울해져있으면 보기 안 좋으니까.” 아일렌이 홱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아일렌을 향해 쓰게 웃다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잠깐만.” “······뭐죠?” “시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다른 것도 만들 줄 알아?” “다른 거 뭐요?” “스마트폰······ 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뭐죠? 마도 기관인가요?”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대략적인 스마트폰의 특징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아일렌이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통신기기 같은 거죠? 작은 패널이 달린?” “맞아.” “그런데 여기는 도깨비들 채널이 없어서 통신이 불가능할 텐데······.” 어차피 지난 경험을 반추해 보면 통신이 꼭 이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쥔 폰은 자동으로 동기화가 이루어져서 텍본이 생성되니까. “그건 걱정 말고. 오늘 안에 만들 수 있어?” “하루는 무리고, 적어도 사흘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일단 노력은 해 보죠.” “알겠어. 그럼 수고해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일렌의 공방에서 나와 선술집 쪽으로 향했다. 거리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묘한 눈길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내게 눈인사를 해왔고, 양손을 가볍게 모으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목에는 아일렌의 말처럼 손목시계가 하나씩 채워져 있었다. 「그 시계들을 보며, 유중혁은 외로워졌다. 그들은 시간을 되찾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 유중혁은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저 무수한 시간들 중 어디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젠가 마계를 구한 유중혁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내가 ‘멸살법’에서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문득, 조금이지만 녀석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회귀자 유중혁에게 이 모든 세계의 시간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회귀가 가능한 인생에, 현재의 시간이 의미가 있을 턱이 없으니······. 이 일이 끝나면, 아일렌에게 시계나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런 거라도 있으면, 그놈도 이 세계에 더 정을 붙일지 모른다. 어쩌면 회귀 우울증이 좀 나아질 수도 있고······. 놈이 회귀한다고 이 세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이 없으면 남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아하하하핫, 얘 진짜 웃기네.” 선술집 문을 열자, 깔깔 웃어대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멀리서만 보면 그냥 사춘기 중학생 같다. “뭐하냐?” 이번에는 “히익”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장하영은 나쁜 짓을 하다가 부모님에게 들킨 아이처럼 내 눈을 피했다. “네, 네가 시킨 거 하고 있었지!” “[투사]는?” “그게······.” 우물쭈물하던 장하영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사실을 실토했다. “······[투사]들이 아무도 답장을 안 했다고?” “지, 진짜야! 아무도 답신을 안 줬다고!” “대체 뭐라고 보냈는데?” “15세 여중생입니다······.” 이마의 혈관이 불끈거렸다. “야! 그렇게 보내니까 아무도 답장을 안 하지!” “하지만 아까도 먹히길래······.” “전부 흑염룡 같은 놈들만 있는 줄 알아? 몇 통이나 보냈는데?” “다 합쳐서 300통 정도······.” 어쩌면 스팸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차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젠장. “큰일이군. 내가 아는 [투사]들 목록은 그게 전부인데.” 그제야 장하영도 큰일 났다는 걸 깨달았는지, 안색이 변했다. “그럼 이제 어떡해?” 이래서 ‘멸살법’이 필요했던 건데. 텍본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들을 다시 읽으며 [투사]에 대한 정보를 더 검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투사]가 없는지 찾아봐야지. 일단은······.” 나는 당장 떠오르는 성좌들의 수식언을 몇 개 떠올렸다. 성좌들 중에서 우리를 도와줄 만한 녀석. “‘긴고아의 죄수’에게 메시지를 써 봐.” “······그거 엄청 강력한 성좌 아냐?” 녀석이 [투사]와 관련된 스킬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 봐야 하는 시점이니까. 장하영은 뭔가 열심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렸다. 1분, 2분······ 5분. 장하영이 고개를 저었다. “답장이 없는데?” “이렇게 써봐.” 나는 쓸 메시지 내용을 다시 일러 주었다. 그러자 장하영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거 써도 돼?” “일단 주의를 끌어야 하니까.” 제천대성은 천성이 게으른 녀석이다. 그러니 녀석의 답장을 받으려면 이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 장하영이 메시지를 보낸 지 10초도 채 되지 않아, 알림이 떠올랐다.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다, 답장 왔어!” “역시 그렇지?” 참고로 내가 보내라고 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내가 뭘 할 때마다 간접 메시지로 털을 뽑아대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탈모가 왔던 모양이군. 나는 물었다. “걔가 뭐래?”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는데.” “다른 말은?” “너 누구냐고 묻는데? 유중혁이라고 할까?” “······대답하지 마.” 유중혁이라고 하면 재밌기는 하겠지만, 그랬다간 괜히 문제만 커질 뿐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골몰했다. 제천대성 쪽은 글러 먹은 듯하니, 다른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는 마계에서 호출하긴 좀 그렇고,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 그놈은 아직 정체가 뭔질 모르고······.” 고민이 된다.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나 ‘술과 황홀경의 신’은 올림포스가 걸리고······.” 그냥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밝히면, 저들 중 누군가는 도움을 줄 것도 같았다. 문제는 내 정체를 밝히면 성운 녀석들도 내 생존을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난감하네.” 마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부딪친 난관이었다. 이제 [밤]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장하영이 지금 [투사]를 계승하지 못하면, 오늘 밤 내가 세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터. 그때, 장하영이 말했다. “염룡이가 도와줄 수 있다는데?” ‘염룡이’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싶어 나는 잠깐 멈칫했다. “······아직도 그놈이랑 얘기하고 있어?” “응.” “됐어 그놈은. 보나마나 허당일 거야.” “아냐, 얘도 마계에서 [투사]를 잠깐 해본 적이 있대.” ······심연의 흑염룡이 [투사]였던 적이 있다고? 그런 이야기는 ‘멸살법’에 나온 적이 없는데? 하긴, 생각해 보면 심연의 흑염룡을 그렇게 본격적으로 다룬 적도 없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근데 자기는 시나리오 룰이 맘에 안 들어서 다 죽여버렸대.” “뭐?” “공작이고 혁명가고 처형관이고 자기가 다 죽여버렸다는데?”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아마 64번째 마계가 통합될 때였나? 분명, 마계의 역사 중에 그런 미친놈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심연의 흑염룡’이었다고? “혹시 [투사] 스킬을 전수해줄 수 있냐고 물어봐.” 심연의 흑염룡이라면 악 계통의 성좌이니, 마계로 뭘 전송하는 것이 그다지 눈치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상의 상대다. 뭔가를 입력하던 장하영의 안색이 급격하게 밝아지는 게 보였다. “자긴 어차피 쓰지도 않으니 주는 건 문제가 아니래.” “그래?” ······정말이지 뜻밖의 도움이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는데? 사실은 흑염룡도 김남운도 모두 착한 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텍본을 다시 입수하면 녀석들이 나오는 부분을 세심하게 읽어줘야겠다. 그런데 장하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는데?” 그럼 그렇지. 저 꼬장꼬장한 새끼가 그냥 그걸 줄 리가 없다. “어차피 벽을 통한 거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해. 그놈 조건이 뭐래?” “최근에 고민이 있대.” “고민?” “자기 화신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다고······.” “화신이랑?” “화신이 자꾸 자길 무시한다는데.” 심연의 흑염룡의 화신이면······. “심지어는 지금 위기에 빠졌는데도, 자기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한다고······.” ······위기에 빠져? 나는 재빨리 장하영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 이야기, 자세히 말하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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