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206화 ‘심연의 흑염룡’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장하영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장하영을 보고 있다가 살짝 핀잔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그냥 얘 말하는 게 웃겨서.” 저 드높은 대성좌를 친구처럼 말하는 장하영도 희한한 녀석이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답신을 보낸 심연의 흑염룡 쪽이다. 이 자식은 한수영한테나 신경 쓸 것이지, 왜 엉뚱한 메시지에 답장이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흑염룡을 변호하듯 장하영이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처럼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뭔 헛소리야. 그새 그놈한테 넘어갔어?” “생각보다 말하는 것도 젠틀하고.” “젠틀? 젠틀한 놈이 ‘15세 여중생입니다’라는 말에 답장을 하냐?” 내가 그 추잡한 맥락을 굳이 설명해줘야겠냐고 쏘아붙이려는데, 장하영이 대답했다. “내가 그냥 열다섯 살이라서 답장했을 뿐이라는데.” “뭐? 열다섯 살이라서 답장을 해? 완전 쓰레기 새끼네 이거.” 심연의 흑염룡이 잔혹하고 맛이 간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취향이 그런 쪽이라니 갑자기 한수영이 조금 걱정될 정도다. “왜 그렇게 흥분해? 얘는 그냥 친구 생겨서 좋다는데. 자기도 열다섯 살이래.” “뭔 개소리야! 그놈이 진짜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열다섯 살짜리 성좌가 있을 턱이 있냐?”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설정이 있었다. 「유구한 <스타 스트림>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성좌들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일정한 틀 안에 자신을 가두는 데 익숙하다. 개중 대표적인 것이 ‘나이’인데, 그들은 특정한 생명체의 특정한 나이대에 자신을 이입하여 자신이 그 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설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5살에 이입한다고? 진짜로? ―끄아아아아아악! 의원실 안쪽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한명오의 것이었다. 나는 그쪽을 향해 몸을 틀며 놀란 장하영을 향해 말했다. “잠깐 얘기하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알겠어. 뭐 물어보면 돼?” “걔는 그냥 내버려 둬. 어차피 걘 [투사]도 아닌데. 차라리 다른 애한테 말 걸어. 아까 내가 말해준 명단 있지? 또 말 걸어봐.”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녀석의 표정이 불안했지만 괜찮겠지 싶었다. 원래 저 녀석 능력이기도 하고. 원작보다 ‘정체불명의 벽’의 각성이 조금 빨라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벽의 도움이 없다면 [공단]의 혁명은 불가능하니까. 의원실의 문을 열자, 깨어난 한명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왜 기절했지?” 나는 조용히 의원실 문을 닫으며 말을 받았다. “출산의 고통을 상기하다가 실신하셨습니다.” 기절한 사이 악몽이라도 꿨는지, 한명오는 이마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나?” “아스모데우스 욕도 좀 하신 것 같고.” “그 개새끼······.” 이전보다 마왕에 대한 증오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사인참사검]의 힘으로 아스모데우스의 시선 밖에 있으니 욕 좀 한다고 죽진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다시 들어보죠. 애를 낳은 건 뭐고, 아스모데우스의 총애를 받은 건 뭐 때문입니까?” “······일단 내가 왜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하네.” “대충 짐작은 갑니다. 전에 싸웠던 ‘어둠 파수꾼’ 때문 아닙니까?” 헤어지기 직전, 한명오는 [어둠 자락]에 있던 [어둠 파수꾼]에게 촉수 기생을 당했었다. 보통 그런 짓을 당한다고 곧장 악마종을 수태하는 건 아닌데, 한명오는 직빵이었던 모양이다. “계기는 그렇지. 하지만 아이를 가지게 된 건 그놈 때문이 아냐.” “그럼······.” “저주 때문이지.” 당시 한명오는 ‘어둠 파수꾼’의 최종 타격에 기여해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를 받았었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는 대상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일’을 실현시키는데 개연성을 소모한다. 말인즉······. “알만하군요. 근데 그게 가능합니까? 남성의 몸으로 출산을······.” “그 부분은 묻지 말아주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할 경험을 한 연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도, 내가 한명오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이군.」 멸망이 오기 전, 내가 ‘회사원 김독자’였던 시절만 해도 한명오는 내게 그저 어려운 사람이었다. 기피하는 상사 1순위 중의 하나.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3천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에 일희일비하고, 매달 들어오는 월급 명세서에서 남은 젊음을 헤아려야 했던 시절. 그런데 그 시절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사원도 부장도 아닌 김독자와 한명오가 만나서,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독······ 아니, 유중혁 씨. 아빠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나?” 갑자기 꺼낸 한명오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야 모르죠.” “난 이제 알게 됐네.” 사실 한명오의 경우는 아빠라고 해야 할지 엄마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넘어가기로 했다. 한명오 부장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네.” 그 말은 한명오가 지금껏 떠들었던 백 마디의 헛소리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행복했네.” 나는 한명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끼고 있던 낯선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두 변한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아주 예쁜 딸이었네.” “한번 보고 싶군요. 마계에 와 있습니까?” “지금은 함께 있지 않네.” 금세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뭔가를 예감했다. “그럼······?” “긴 얘기야. 들어줄 수 있겠나?” “일단 해 보세요. 전 얘기 듣는 거 좋아하니까.” 한명오는 곧장 ‘마왕’의 권속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와 일행들이 모르는 곳에서, 한명오의 질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낳은 딸을 데리고, 홀로 시나리오를 돌파했다. 깃발 쟁탈전을. 왕들의 전쟁을. 다섯 개의 재앙들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한명오가 누군가를 위해 그런 헌신을 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더이상 예전의 김독자가 아니듯. 눈앞에 있는 이 사내도, 이제 예전의 한명오는 아니다. 아이를 낳은 게 계기였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또한 변했다는 것이었다. “힘들었겠군요.” “힘들었지. 많이 죽을 뻔했고. 실제로 마지막에는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었네.” 그가 마침내 벼랑 끝에 몰린 것은 당시 정식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던 [암흑성] 시나리오에 빠져버린 순간이었다. 몰려드는 악마종과 악마 귀족들 속에서, 한명오는 이제 자신이 아이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명오는 태어나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누군가 이 아이를 지켜준다면. 이 아이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자신은 뭐든 하겠노라고.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도에 응답한 존재가 있었다. ―예쁜 아이구나. “그게 아스모데우스였네.” “······설마 마왕에게 아이를 빼앗긴 겁니까?” 일순 꺼림칙한 상상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아스모데우스는 격노와 정욕의 마왕. 녀석의 손에 아이가 들어갔다면, 어떤 꼴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얘기였으니까. 그런데 한명오의 표정은 침착했다. “그 아이는 무사할 걸세. 어쨌든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로 태어난 아이니까.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왕은 내 딸을 건드릴 수 없는 처지야.” “그게 무슨 뜻이죠?” “마왕이 내 딸을 자신의 ‘화신체’로 삼았네.” 그제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한명오의 아이를 자신의 화신체로 삼았다. 그러니 그 아이의 부모인 한명오는, 자연히 악마의 귀족 작위를 받았겠지. “······내가 ‘악마종’이 된 것은 그 때문일세.” 이렇게까지 듣고 보니 한명오의 인생역정도 어지간하다 싶었다. 작위를 받았으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이를 빼앗겼으니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야 할지······. 침통한 눈빛의 한명오가 재차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나는 내 딸을 구하고 싶어.” 순간, 나는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뭘 하겠다고? “긴말 안 하겠네. 날 좀 도와줘. 딱 한 번만 도와주면, 두고두고 은혜를 잊지 않겠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혼자 인생극장 열심히 찍더니 이젠 나한테 뭘 도와달라고? “자네는 날 오랫동안 지켜봐 왔으니 잘 알겠지. 난 비겁하려면 한없이 비겁해질 수도 있는 그런 인간이야. 하지만 그런 내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있어.” “······.” “그리고 어젯밤 일은 내 예상 밖이었네. 겁만 주라고 했지, 사람을 해치라고 한 적은 없어. 갑자기 경호관이 나타나는 바람에 흥분한 처형관들이 멋대로 벌인 짓이야.” 한명오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존재 맹세를 했다. 그렇다면 저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단 이성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스모데우스와 싸울 계획이 없습니다.” 지금 72 마왕 중 하나와 척을 지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혁명도 시작되지 않은 판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셈이니까. 그런데 한명오의 반응이 의외였다. “아스모데우스와 싸울 필요는 없어. 자네는 그냥 하려던 일을 하면 돼. 혁명을 일으키고 공작을 죽이는 것. 그게 나를 돕는 일이야.” “······당신은 공작 편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그랬지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 자네를 돕는 것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드네.”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아스모데우스가 내게 원한 것은 공작을 돕는 게 아니야. 그는 내게 제안을 했네. 자신이 원하는 ‘설화’를 하나 만들어 주면, 내 딸을 돌려주겠다고. 내가 ‘세이스비츠 공작’에게 붙어 있었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 이 부분은 원작에는 완전히 없던 이야기였다. 당연하겠지. 애초에 ‘한명오’라는 존재부터가 원작에 없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마왕이 원하는 이야기가 대체 뭡니까?” “73번째 마계의 왕.” 한명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언젠가 ‘미노 소프트’에 막 입사했던 시절, 면접관으로 나왔던 한명오의 눈빛이 떠올랐다. “마왕은······ 내 손으로 직접 ‘73번째 마계의 왕’을 만들라고 했네.” * 유중혁은 무심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지구와는 다른 별자리들이 보이는 하늘. 진천패도에 비스듬히 기대 그 별들을 헤아리는 유중혁의 몸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피폐해진 상태였다. 피칠갑한 몸에 상처투성이의 얼굴. 그의 눈앞에는 방금 그가 때려잡은 2급종의 괴수가 누워 있었다. “······15번째 시나리오도 끝이군.” 행성 루그라티아. 이계의 성좌들 중 하나에게 의뢰받은 ‘개인 시나리오’를 통해 유중혁은 이곳에 왔다. 본래였다면 지구의 시나리오를 진행했겠지만, 이번 생의 지구에는 강한 동료들이 있었고, 그러니 10번대 시나리오는 남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어차피 지난 인생 회차보다 성장세도 빠른 상황. 비축할 수 있을 때 최대의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 옳았다. 시나리오가 20번대로 돌입하면 이런 여유도 없어질 테니까. ‘더 강해져야 한다.’ 오직 그런 생각 하나로, 유중혁은 11번 시나리오 이후 줄곧 ‘개인 시나리오’로 메인 시나리오를 대체해 왔다. 그것도 가장 어려운 난이도에 가장 보상이 좋은 개인 시나리오만 골라서. 때로는 자신답지 않을 정도로 무모한 시나리오에까지 도전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언제나 그랬듯, 그렇게 몸을 혹사하고 정신을 단련하면 될 거라 믿었다. 그럼 이 알 수 없는 상실감도 조금은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싸우면 싸울수록 허전함은 커져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왜 저 성좌가 최근 이렇게 말을 자주 거는 것인지, 유중혁은 잘 알 수 없었다. 지난 회차에서는 자신과 거의 접점이 없는 성좌였는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왜 김독자를 찾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김독자는 죽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고개를 흔듭니다.] 고작 화신 하나의 죽음에 성좌가 이토록 연연하는 것이, 유중혁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 다음 메시지였다. [73번째 마계에서 당신의 악명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잊을만 하면 떠오르는 메시지. 왜 73번째 마계 같은 애먼 곳에서 자신의 악명이 높아지는 것인지 유중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김독자가 살아 있어서 자신을 사칭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설령 김독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놈에겐 그럴 이유가······. ‘······잠깐. 혹시 김독자가 살아있고, 위험에 빠졌다면?’ 어쩌면, 김독자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빌어먹을 운명을 벗어나, 어떤 시나리오도 없는 저 이야기의 지평선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 남아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기상천외한 수로 자신을 앞지르기만 하던 그 녀석이, 처음으로 위험에 빠져서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채널이 없는 곳에서 도움을 청할 방법은 없으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중혁은 조금 복잡해진 얼굴로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73번째 마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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