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205화 안타깝게도, 한명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필 한명오가 아스모데우스와의 계약 내용을 일부 발설하는 바람에, 기절 패널티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때마침 흥미진진해지던 파트에서 끊어졌던 터라, 조금 기분이 시들해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마왕들과 성좌들이 이쪽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거지.」 버려진 시나리오의 땅, ‘마계’. 오래도록 성좌들의 외면을 받아왔던 이 세계가,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놈들에게 이길 수 없어! 녀석들에 비하면 우린 그냥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명오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그새 마계에서 몇 달을 굴렀기 때문인지, 그는 악마종의 고위 귀족들과 마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절망감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저 유중혁조차 이 ‘마계’에서 굉장히 고전했으니까. 물론 그건 유중혁의 이야기고, 나는 아니다. 꼬르륵. 밤새 깨어 있었기 때문인지, 간만에 배가 아우성을 쳤다. 나는 선술집으로 나가 마르크에게 간단한 요리를 부탁했다. 테이블에는 멍한 얼굴의 장하영이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녀석에게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히익!” “넌 매번 그런 소릴 내더라.” 아니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장하영이 소리를 질렀다. “왜! 왜! 또 뭔 시비 걸러 온 건데!” “왜 그렇게 시무룩해 있냐?” “······신경 꺼.” “왜, 무슨 일인데.” 장하영은 내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지 않고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요리를 깨작거렸다. 재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기다렸다. 마르크는 그런 나와 장하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쪽으로 느끼한 윙크를 날려댔다. 잠시 후,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왜 날 ‘혁명군’에 끼워준 거야?” “뭐?” “난 [경호관]도 [혁명가]도 아니잖아. 하다못해 아일렌처럼 공민회 의장도 아냐.” [등장인물 ‘장하영’이 ‘무기력 Lv.4’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자기혐오 Lv.10’을 발동합니다.] 젠장, 시작이구만. 잠깐 잊고 있었다. 유중혁이 ‘회귀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녀석이라면 이 녀석은 철저한 ‘자기혐오’로 점철된 녀석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 ‘멸살법’의 주인공들 중 제정신인 녀석이 하나도 없다 싶다. 떨리는 작은 어깨. 그 어깨를 두들겨 주면 내 기분이야 나아질지 모르지만, 실제로 녀석이 위로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등장인물 ‘장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장하영은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어제의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아일렌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장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이 또 올 거야. 그때도,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어?” “아마 무리겠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라고 모든 [처형관]을 알지는 못해. 내일 밤이 되기까지 녀석들을 모두 잡는 건 무리야.” 아직 내가 못 잡은 처형관은 일곱이나 된다. 그 일곱이 마음먹고 사람들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면, 내일 밤은 그야말로 피의 축제가 되겠지. 나는 장하영이 실의에 빠지기 전에 덧붙였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냐. [투사]를 찾으면 되니까.” 투사. 밤의 [처형관]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포지션. 그 포지션을 찾을 수만 있다면, 분위기를 다시 이쪽으로 가져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요리를 내오던 마르크가 끼어들었다. “······안됐지만, [투사]는 아마 없을 걸세.” “뭐? 마르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전대의 [투사]에게 스킬을 전승받은 이가 아무도 없거든.” 게임의 다른 포지션들과는 달리, [투사]는 오직 ‘물려주기’를 통해서만 전승이 가능하다. 마르크가 말을 이었다. “전대 [혁명가]를 지키던 [투사]가 죽은 뒤, 그의 후임이 아무도 없었네.” 나도 이미 아는 정보였다. 실제로 이 [공단]에는 [투사]가 없고, 원작에서의 유중혁도 그 때문에 무척 곤혹을 치렀었다. 나는 마르크가 내온 샌드위치를 한입 깨물며 말했다. “없으면 만들면 돼. 다른 투사에게 포지션을 물려 받으면 되잖아.” “하지만 내가 알기로 73번째 마계에 남은 [투사]는 없네.” “마계에서 찾지 않을 거야.” “뭐?” 나는 장하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때가 되긴 했지. 나는 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장하영을 쿡 찌르며 말했다. “야, ‘벽’한테 말 걸어봐.” “무, 무슨 소리야?” “네가 갖고 있는 ‘벽’ 있잖아. 매번 네가 뭐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못 배우게 막는 ‘벽’.” “그, 그 ‘벽’을 네가 어떻게 알아?” 깜짝 놀란 장하영이 나를 향해 다그쳤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지만, 장하영에겐 ‘벽’이 있다. 정확히는, [정체불명의 벽]이라고 불리는 ‘벽’이. 그리고 지금껏, 그 벽은 장하영의 성장을 막아왔다. “그 벽 때문에 지금까지 스킬이라든가, 뭐 아무튼 그런 거 아무것도 못 배웠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된 거잖아. 무기력증에, 자기혐오에······.” “뭐, 뭐?” “네가 그걸 네 ‘재능의 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근데 그건 ‘재능의 벽’이 아냐. 그건 전혀 다른 용도라고.” “아니,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그걸······!” “아무튼 빨리 말 걸어 봐. 너 그 ‘벽’이랑 대화할 수 있잖아.” 벽과 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장하영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걱정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차피 나도, 벽이랑 말하는 건 같은 처지니까. 망설이던 장하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빨리.” 잠시 후, 장하영이 스킬을 발동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정체불명의 벽 Lv.1’을 발동합니다!] 장하영의 동공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장하영의 시야는 새하얀 벽들로 둘러 싸여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새하얀 벽. 스킬을 배우려 할 때마다 그런 벽에 가로막힌다면 정신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장하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벽님?” 장하영이 그 말을 한 순간, 놀랍게도 메시지는 나에게도 들려왔다. [‘정체불명의 벽’이 인상을 구깁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한테도 ‘벽’ 비슷한 게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잘됐다 싶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자신의 주인을 바라봅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아직 너는 자격이 없다.’] 역시, 원작대로 까칠한 놈이로구만. 각오하고는 있었다. “야, 그러지 말고 허락좀 해줘. 네가 안 도와주면 얘 죽는다고.” 내 갑작스런 말에 깜짝 놀란 장하영이 나를 보았다. 다음 순간, ‘정체불명의 벽’이 말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넌 뭐냐?’]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어떻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내가 누군진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허락 좀 해줘. 레벨 1이면 최소한의 기능은 쓸 수 있잖아? 왜 못 하게 막는 건데?” [‘정체불명의 벽’이 인상을 찌푸립니다.] 츠츠츠츠츳! 내 말에 화가 난 모양인지, 장하영의 주변으로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성좌인 내게도 압박감을 줄 정도의 개연성. 역시 신화급 특성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이거 내 예상만큼 이야기가 쉽게 풀리진 않는데. 나는 장하영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갑작스레 허공에서 터진 스파크에 마르크도 선술집의 손님들도 깜짝 놀란 얼굴들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일단 그들을 대피시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까칠하게 나올 거야? 그래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얘 죽으면 너도 새로운 숙주 찾기 힘들 텐데?” 츠츠츠츠츳! 다시 한 번 몰아치는 개연성의 스파크. 성좌도 아닌 단일 스킬의 힘으로 이만한 박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장하영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나는 반드시 여기서 장하영을 각성 시켜야만 한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건방진 놈이군.’] 장하영의 몸 주변에서 터져 나온 스파크가 점점 더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까지 반응이 격렬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자칫하면 여기서 작은 개연성 폭풍이 발생하겠다 싶은 순간.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불어닥치던 스파크가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더 커다란 스파크가 주변의 스파크를 집어삼킨 듯했다.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에게 인사합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깜짝 놀랍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벽’끼리 대화할 수 있는 건가?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에게 반갑게 인사합니다.] 장하영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게 보였다. 분명 녀석도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제4의 벽]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친 구.」 [‘정체불명의 벽’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합니다.] 대체 두 벽 간에 무슨 소통이 오가고 있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단지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장하영 주변의 허공이 불가사의한 형태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너, 넌 뭐······!’] 그러자, 내 주변의 공기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제4의 벽]이,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건 분명. 츠츠츠츠츳!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벽’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화려한 스파크와 함께, 장하영이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쩐지 잔뜩 주눅이 든 듯한 느낌으로, ‘정체불명의 벽’이 메시지를 띄웠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누, 누구 십니까?’] * 장하영에게 왜 이런 ‘벽’이 있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멸살법’에서도 ‘정체불명의 벽’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결말 쯤 가면 알려줄 줄 알았는데······ 물론 그렇다고 이 벽의 정체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짐작컨대, 아마 이 ‘벽’의 존재는 차원이동 전 장하영의 직업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이런 적은 처음인데······.” 장하영은 무척 당황한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화신 ‘장하영’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꽤 까다로운 절차를 밟기는 했지만, [제4의 벽]의 도움으로 장하영은 ‘정체불명의 벽’에게 인정받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장하영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메시지를 보낼 존재의 수식언이나 진명을 입력하세요.] [제4의 벽] 덕분인지, 그 메시지는 나에게도 보였다. 장하영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이게 뭐지? 뭘 입력하라는데?” 사실 내가 ‘장하영’을 꼭 데려가려는 것도, 장하영의 이 능력 때문이었다. ‘장하영’이 가진 ‘벽’의 힘을 빌려야만, 나는 저 빌어먹을 성운들에게 대항할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주는 이름들을 입력해봐.” “······응.” 나는 몇 명의 이름들을 불렀다. 모두, ‘멸살법’의 원작에서 마계의 [투사]로 싸운 적이 있는 인물들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다른 창이 떠올랐다. [보낼 메시지를 입력하세요.] “뭐라고 쓰지?” “‘투사’가 되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그걸로 될까?” “모르지. 일단 해봐.” 장하영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리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1분, 2분. 3분······ 10분. 장하영이 물었다. “이거 제대로 간 거 맞아?” “······실패한 거 같네.” 하여간, 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은 뉴비에 대한 배려가 없다. 이렇게 간절하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아무도 답장 한 통 안 보내다니. 우리는 그 뒤로도 몇 가지 메시지를 더 써서 발송해 보았다. [저를 ‘투사’로 만들어 주실 분을 찾습니다.] [당신이 가진 ‘투사’의 스킬이 필요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하지만 몇 번이나 메시지를 발송해 보아도,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스팸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는 모양인데······ 젠장. 글재주가 없다 보니 무슨 메시지를 보내야 답장을 받을 수 있는지, 전혀 감도 오질 않았다. 이럴 때 한수영 그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 녀석이라면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을 텐데. 눈썹을 찌푸린 채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일단 답장을 받아야 하는 거지? 내가 원하는 대로 써봐도 돼?” “뭔가 생각 나는 거라도 있어?” 장하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시지를 입력했다. [15세 여중생입니다.] “야, 잠깐―” 그러나 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장하영은 메시지 발송 버튼을 눌렀다. [수신 주체를 입력하지 않아 메시지가 랜덤한 성좌들에게 발송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인을 향한 메시지도 아니었다. 나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상대는 성좌들이라고! 그런 게 먹힐 턱이 있겠냐?” “······기다려 봐.”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그런데 다음 순간.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멍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본 후, 답신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답신을 준 성좌는 내가 아는 녀석이었다. [발신자 ― 심연의 흑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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