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201화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홀쭉한 외모의 중년인이었다. 듬성듬성 새치가 보이는 머리에 땟국물이 묻은 앞치마. 면도를 한 뺨에 나 있는 희미한 흉터가 사내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강함’이었다. 아무리 봐도 ‘경호’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일렌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사내를 보더니,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당신이 [경호관]이라고?” “일단은 그래.” “······진짜로?” “안 그래도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걱정했어.” 중년인의 말에, 아일렌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아일렌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내가 말했잖아. 근처에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경호관]은 아까 내게 안주를 만들어 주었던 선술집의 주인장이었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그가 경호관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멸살법’에 나왔던 [경호관]의 외양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나를 구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애초에 ‘혁명가 선언’을 하지 않았겠지. 아일렌이 물었다. “왜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죠? 당신이 정말 [경호관]이었다면, 몇 번이나 사람들을 구해줄 기회가 있었잖아요.” “포인트를 아껴야 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경호관이 살릴 수 있는 횟수는 하루에 한 번씩 총 다섯 번뿐이야.” “그건 그렇지만, 다섯 번을 전부 쓰지만 않으면······.”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을 살렸다면.” 주인장은 내 쪽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저 ‘혁명가’는 죽었을 거야.” “꼭 혁명가가 나타날 줄 알았다는 말투군요.” “늘 기다리고 있었지. 모두가 아일렌 당신처럼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지금 말 다했어요?” 분위기가 격앙되려는 듯하자, 장하영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자자, 아일렌. 주인장. 그만들 싸우고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생각하자고. [경호관]이 제 발로 나타났으면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거잖아?” 나는 그 능숙한 화제 전환 솜씨에 내심 감탄했다. 장하영은 ‘멸살법’ 안에서 손에 꼽을 만큼 눈치가 비상한 인물이다. 여기서야 웅크렸던 욕구가 폭주해서 ‘욕쟁이’로 불리고 있지만, 본래 이 장하영은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탁월한 중재가였다. 장하영은 헛기침을 하는 주인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여간, 나도 놀랐어 주인장. 요리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우리한테 귀띔해줄 수도 있었잖아?” “좋은 요리사는 비밀이 많은 법이지. 그러고 보니 혁명가, 아까 내 요리는 어땠나?” “안타깝지만 먹어보질 못했어. 누가 다 먹어버려서 말이지.” 장하영이 실눈을 뜬 채 나를 노려보자, 주인장이 킬킬 웃었다. 간신히 나아지려는 분위기에 다시 찬물을 끼얹은 것은 아일렌이었다. “벌써 동료가 된 것처럼 희희낙락하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 알고 있겠죠?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장하영이 탁월한 중재가라면, 아일렌은 노련한 책사다. ‘드러누운 드래곤’급은 아니라 해도, 그녀는 ‘혁명가’가 반드시 의심해야 할 지점을 짚어준다. “알고 있어.” 실제로 그녀의 조언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혁명가 게임’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다. 「같은 편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혁명가’는 이 지점을 돌파하지 못해 자멸하고 마니까. 내 시선을 받은 주인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혹시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가 공작의 끄나풀일 거라고?” 나는 말없이 웃었다. 주인장이 경호관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제스처는 내가 아닌 다른 일행들을 위해서였다. “우선 통성명부터 할까?” “마르크라고 하네. 그쪽은?” “난 유중혁이다.” “유중혁? 흠.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구’의 시나리오 영상이 퍼졌다. 그러니 마계에서도 ‘지구’의 유중혁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손을 좀 써둬야겠는데. 마침 가진 설화 파편도 몇 개 있고······.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난 공작의 끄나풀이 아닐세. 이렇게 말해도 솔직히 바로 믿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야.” “아니, 믿어.” “믿는다고?” “그래. 당신은 [경호관]이 맞아.” 내 말에 마르크가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군?” “맞아. ‘혁명군’에 들어온 것을 축하해.” 그 급작스런 결론에 아일렌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잠깐만요!” “이 자는 내가 ‘혁명가 선언’을 하고 난 뒤 바로 찾아왔어. 공작의 끄나풀이었다면 이 정도로 빠르게 대응하진 못했을 거야. 마지막 ‘혁명가 시나리오’는 무려 30년 전이었으니까.” 내 빠른 해명에 아일렌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근거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해.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경호관]이라는 걸 확신해.” “어떻게요?” “당신이 린드버그의 마도공학자라는 걸 확신하듯이.” “그러고 보니 당신, 어떻게 그걸······.” “그리고 저기 있는 ‘아슬란’의 본명이 ‘장하영’이고, ‘지구’ 출신이라는 것을 확신하듯이.” “야! 남의 프라이버시를······!” 씩씩대는 장하영의 표정을 확인한 아일렌의 표정이 변했다. “당신······ 혹시 특성 정보를 엿볼 수 있는 건가요?” “필요한 만큼은.” 실제로 나는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해 이미 마르크의 특성 정보를 모두 확인한 상태였다. 아일렌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어렵사리 납득한 듯했다. “희한한 스킬을 가지고 있군요. 지금까지 포지션 정보까지 엿볼 수 있는 탐지 스킬 보유자는 없었는데.” “내 스킬은 특별하거든.” “······당신에게 그런 스킬이 있다면 다행이군요.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는 상황은 아닌 듯하니.” “매우 희망적이라고 해야지.” 아일렌은 반쯤 체념한 기색으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걸로 ‘가짜 혁명군’ 결성이군요.” “······가짜 혁명군? 무슨 소리지?”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상황은 좀 복잡했다. 일단은 설명을 좀 해줘야겠군. 그래도 이 넷은, 내가 이번 시나리오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람들이니까. 나는 약간의 시간을 들여, 내가 진짜 혁명가는 아니지만 반드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는 언어로 전달했다. “뭐어어어어?!” “······‘혁명가’가 아니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하긴, 생각해 보니 나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마다 좋은 평가를 못 들었었지. 나 때문에 포인트를 소진해버린 마르크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미쳤군. 가짜 혁명가에, 불쌍한 경호관에, 공민회 의장에, 덜떨어진 꼬마애 하나······ 이게 애들 장난인줄 아나?” “덜떨어진 꼬마애? 이봐, 말이 심하잖아 마르크!” “그만 싸워. 어차피 상황은 터졌고,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이 다음이야.” “그래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가짜 혁명가 양반?” “몇 가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 나는 일행들에게 간단히 내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마뜩잖은 얼굴로 내 말을 듣던 일행들도, 이야기를 할 수록 진지한 기색이 되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어느새 가짜 혁명군의 일원이 된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 필요한 조치들이긴 하군.” “참여할 건가?” “어차피 나한텐 선택권이 없어. 어떤 것부터 먼저 할 거지?” “내 얼굴부터 바꿔야 돼.” 나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설화 파편,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얼굴 가죽」을 꺼내며 씩 웃었다. 마르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 그런 건 계획에 없었잖······.” “원래 제일 중요한 건 계획에 없는 법이거든.” “왜 하필 얼굴인가?” “기왕 혁명가를 하려면 잘생긴 게 좋지 않겠어? 약간만 손을 좀 보자고.” * 같은 시각, 악마 백작 시로크와 한은 공민 거리로 내려가고 있었다. 시로크는 거리를 걷는 내내 한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이봐, 한.” “뭐냐.” 시로크는 그 까칠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격노와 정욕의 마신’과 끈이 닿은 존재. 기왕 걸음을 함께하게 된 거, 약간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보니까 원래 ‘악마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출신이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의외로 한은 순순히 대답했다. “지구라는 곳이다.” “지구! 아,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군.” “그렇겠지. 요즘 유명한 행성이니까.” “격노와 정욕의 마신님의 가호까지 받을 정도라면, 너도 거기서 한가락 했던 모양이지?” “한가락만 했겠어?” 순간 한의 표정에 떠오른 자부심에 시로크는 조금 놀랐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원래 뭐였나? 소드마스터? 아니면 대마법사?” “비슷하지.” “뭐였는데?” “나는 대기업의 부장이었다.” “대기업? 그게 뭐지?” “끙······ 그걸 모르는 거냐?” 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설명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성운’과 비슷한 집단이겠지.” “······성운이라고!” “어디까지나 비유하자면 그렇단 얘기야.” “그럼 자네는 ‘성좌’였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비유하자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 자네 굉장한 존재였군.” ‘기업’이라든가 ‘부장’ 같은 말이 뭔지 모르는 시로크로서는 한의 설명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한이 어떻게 격노와 정욕의 마신와 연이 닿아 있는지 이해할 것 같은 심경이었다. “······저건 뭐지?” 귀족가에서 공민가로 넘어가는 길목에,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다. 의도가 명백해 보이는 철책이었다. 시로크가 짜증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지금 뭐하는 거냐!” 그러자 열심히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공민 하나가 답했다. “아, 귀족 나리.”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보면 모르겄소? 길을 막는 거지.” 그 뻔뻔한 목소리에 시로크는 살짝 기가 질렸다. “누가 이런 짓을 시킨 거냐?” “의장님 명령이오. 당분간 귀족 나리들은 공민가로 넘어올 수 없소이다.” “무슨 헛소리냐. 의장이 무슨 권리로······ 당장 바리케이드를 치워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당장에 두 쪽 내버리겠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그 목소리에 질겁한 공민이 흠칫 물러섰다. 하지만, 곧 공민들의 뒤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자신 있으면 그래 보시든가.” 그 말을 한 공민은 다른 공민들과 달랐다. 전신에서 강력한 기세를 발출하는, 이름 모를 공민. 시로크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대부분의 공민은 귀족들보다 약하다. 하지만, 모든 공민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엄연한 차원이동자였고, 개중에는 악마 귀족들 못지 않은 강자들도 섞여 있었다. “네놈들, 겨우 ‘혁명가’ 하나 나왔다고 이러는 거냐? 우리가 그놈을 못 죽일 것 같으냐?” 지금껏 공민들이 귀족들에게 대항하지 못했던 것은, [밤]의 처형관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을 기점으로,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어제 보니까 못 죽이시던데.” 공민들이 서로를 보며 히히덕댔다. 시로크는 분한 마음을 삭이면서도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 없었다. 당장 혼자서는, 저 많은 공민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때, 한이 물었다. “저 녀석들, 지금 파업(罷業)을 하는 건가?” “파업?” “할 일을 안 하고 농땡이 까는 걸 말하는 거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시로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상황이지.” “그렇군. 이런 일은 내가 전문이니까, 내게 맡겨라.” 한의 낯빛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악함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기 주제를 모르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법이지. 일단은, 공포심을 좀 심어주는 게 좋겠군.” * 아일렌은 내가 [라마르크의 기린]을 통해 흡수한 설화 파편을 손봐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성형은 쉽지 않았다.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얼굴가죽」은 그날 저녁이 될 무렵에야 무사히 내 얼굴에 안착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보단 별로지만 이정도면 괜찮은데?」 하지만 시술을 끝낸 아일렌은 영 마뜩잖은 뉘앙스였다. “조금 인상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군요. 왜 이렇게 인상이 흐릿하지······?” ······내가 보기엔 잘 된 거 같은데. 코도 살짝 높아졌고, 볼도 더 팽팽해진 것 같고······. 아일렌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태평해도 괜찮아요? 곧 두 번째 밤이라고요. [처형관]들이 다시 올 거예요.” “괜찮아, 오늘 밤까지는.” “[경호관]의 경호는 무한정으로 가능한 게 아니에요. 알고는 있는 거죠?” “알아.” 가능하면 경호관의 포인트를 안 쓰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두 번째 날까지는 경호관의 도움을 받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세 번째 날부터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수 있으니까. “갑자기 마르크가 타깃이 될 일은 없겠죠? 경호관은 자기 목숨은 지킬 수 없는데······.” “아직 우리 말고는 아무도 그가 경호관인지 모르니 상관없어.” 공작 쪽은 아직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정말로 ‘혁명’이 성공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있겠지.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 “아일렌! 밤이 와!”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장하영이 외쳤고, 나는 아일렌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내가 타깃이 되어 불필요한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혁명가다!” 내 차림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얼굴이 바뀌었는데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섭섭했다. [‘두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거리를 둘러 보았다. 아마 마르크는 미리 거리의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경호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당신은 ‘경호관’의 경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스스스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피리 소리가 들려오며, [처형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대로의 출현이었다. [혁 명 가 가 누 구 냐.] “나다. 어차피 날 못 죽일 텐데, 또 잘들 몰려왔구나.” 그러자 [처형관]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혁 명 가 는 네 놈 이 다.] 그리고 말했다. [하 지 만.] 순간, 느껴지는 낌새가 이상했다. 잠깐, 이거······. 그럴 리가. 벌써 이 전략을 쓴다고? [오 늘 죽 는 자 는.] 일제히 낫을 든 처형관이, 각자 다른 타깃을 향해 낫을 빼 들었다. [혁 명 가 가 아 니 다.] [처형관] 중 하나의 낫이 근처에 있던 장하영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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