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200화 세이스비츠 공작의 집무실 앞. 악마 백작 시로크는 초조한 심경으로 벌써 몇십 분째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집무실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백작 ‘한’ 때문이었다. ‘한’. 놈의 본명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모두가 ‘한’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뿐. 작위는 시로크와 같은 ‘백작’이었지만, 출신 성분 자체가 남다른 녀석이었다. 녀석은 무려 32 마계의 마왕인 ‘격노와 정욕의 마신’과 끈이 닿아 있었으니까. 아마 세이스비츠 공작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녀석을 곁에 두는 것이리라. 시로크는 내심 위축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 긴히 전할 말이 있다.” “말해. 내가 전하도록 하지.” “그건 곤란한데.” “공작님께서는 지금 [길로바트] 사절단과 긴급회의 중이시다.” “언제 끝나시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시로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녀석에게 전하면 분명 모든 공을 앗아가겠지. 때문에, 시로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됐어. 급한 일도 아니니까 기다리지 뭐.” 그 말에 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로크는 그런 한의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개자식, 계속 궁금해 해라.’ 사실 시로크가 보고할 내용은 단순했다. ―공민가에 [길로바트]의 후작으로 추정되는 ‘악마 귀족’이 나타났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이 사건에는 이상한 지점이 많았다. 잠시 생각하던 시로크는 공작의 집무실 쪽을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저 안에는 [길로바트]의 후작님도 함께 계신가?” “그렇다.” “다른 곳을 통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오셨나 보군.” “사안이 사안이니까.” 그 사무적인 대답에, 시로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모르긴 몰라도, [길로바트]의 사절단에 후작이 둘씩이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후작급이면 최소 사절단을 이끄는 단장직을 맡았을 테니까. 말인즉, 공민 거리에서 악마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그 녀석은 [길로바트]의 후작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의 보고는 ‘보고’로서의 가치가 생겼다. 큰 건수가 아니라 해도, 실적에 약간의 도움은 되겠지. 머뭇거리는 시로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이 물었다. “계속 얼쩡거리는 걸 보니, 너도 다음 ‘마왕’이 누가 될지 궁금한 모양이군.” “아, 뭐. 그렇지.” 물론 오해였지만, 기왕 오해를 받은 거 그에 관해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역시 [길로바트 사절단]이 방문한 건 마왕 출현의 소문 때문인가 보군?” “자세한 것까진 말해줄 수 없지만, 비슷하다.” “이제 와서 마왕이라니, 조금 웃기는 이야기로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출처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소문. 그 소문 하나에 ‘73번째 마계’ 전체가 이렇게 들썩이다니. 시로크는 내심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세이스비츠. 길로바트. 멜레돈. 베르칸. 지난 수백 년간 73번째 마계는 이 네 명의 공작에 의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수백 년씩이나 유지된 평화가, 겨우 소문 하나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어쩐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은 시로크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왕’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뭐? 그걸 어떻게 알지?” “<베다>가 [멜레돈 공단]과 손을 잡았다더군.” “<베다>?” 시로크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안전하게 <스타 스트림>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이름 중의 하나였으니까. 때문에 시로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성운>이 직접 움직였단 말인가?” “정확히는 <베다>의 설화급 성좌 중 하나가 [멜레돈]과 접선했다고 한다.” 성좌와 마왕은 <스타 스트림>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 앙숙들이다. 그런데 성좌들이 마왕의 반발을 무릅쓰고 ‘73번째 마계’의 일에 간섭했다. 아직 그 규모는 크지 않은 것 같지만, 정말로 <성운>이 나선 것이라면 이 일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성운들이 관심을 가지다니. 정말 ‘마왕’이 나타날 거란 말인가······?” 시로크는 약간 멍해진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왕이라니. 마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시로크로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작께서 저렇게 바쁘신 거였군.” “지금으로서 ‘마왕’에 가장 가까운 분이시니까.” 악마 귀족들 중 하나가 ‘마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건 명확했다. 다른 72 마왕의 사례만 봐도, 악마가 아닌 존재가 마왕위에 오른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공장] 전체를 울리는 가벼운 경고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열렸습니다!] [제 24회차 ‘혁명가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문득 들려온 메시지에 시로크는 깜짝 놀랐으나, 놀란 한의 표정을 보며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한이 먼저 물었다. “이게 무슨 메시지지?” “아, 넌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겠군. 여기서야 가끔 있는 일이야. 이곳의 메인 시나리오지. 혁명가 게임.” “혁명가 게임?” “아마 숨어있다가 [처형관]에게 덜미가 잡힌 모양이군 그래. 재수 옴팡지게 없는 놈이구만.” ‘혁명가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숨어 있던 ‘혁명가’가 나타났다는 뜻. 하지만 이 공단에서 정말로 혁명가가 나타났을 리는 없었다. 30년 전, 마지막으로 혁명가가 나타났을 때 녀석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공단의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크가 웃으며 덧붙였다. “별일 아니니 걱정마라.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처형관]들이 놈의 목을 베어 올 거야. 간만에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그래.”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게임 종료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한 하급 귀족이 나타났다. 시로크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녀석은 숨은 [처형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헐레벌떡 집무실 쪽으로 달려오는 그를 향해, 시로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했습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로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누가?” “새로운 혁명가입니다!” “그러니까 그놈 이름이 뭐냐고.” 하급 귀족이 더듬거리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로크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일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이 반색하며 물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예, 분명 ‘유중혁’이라는······.” “그놈이 자길 유중혁이라고 했다고?” 시로크가 다급히 물었다. “아는 놈이냐?” “알다마다.” ‘한’의 표정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어딘가 뒤틀린 데가 있는 표정이었다. 악마인 시로크조차 마음 한 구석이 선뜩해지는 얼굴. ‘한’이 물었다. “그놈이 나타난 곳이 어디지?” * 밤이 물러간 후, 나는 아일렌에게 다시 불려왔다. 정확히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내 선언으로 인해 공민 거리가 완전히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났다! 거리 곳곳이 그런 구호들로 시끄러웠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아일렌이 나를 의원실에 잡아넣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공민들의 틈바구니에 있었을 것이다. 아일렌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씩씩거리는 동안, 나는 태연한 마음으로 [히든 시나리오]의 정보를 확인했다. + <히든 시나리오 ― 가짜 혁명가> 분류 : 히든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당신은 혁명가를 사칭하여 ‘자칭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진짜 혁명가를 죽이고 그의 직위를 양도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제한시간 : 30일 보상 : 150,000코인,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진입. 실패시 : 사망 + 대충 어떻게 해야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 있는지는 알겠군. 어찌됐든, 진짜 ‘혁명가’를 찾아야만 한다 이거지······. 나는 아일렌 쪽을 보며 말했다. “자, 질문 시작해.” “······미친 사람인가요?” 아일렌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요?” “혁명.” “혁명은 무슨 혁명이에요! 당신 가짜잖아요!” “진짜면?” “그럴 리가 없는······ 혹시······?” 혹시나 싶어서 묻는 표정이 귀엽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자, 아일렌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겠죠!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어요? 이제 모두 끝장이라고요!”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당신도 원하던 전개잖아. 혁명도 하고, 공작도 죽이고.”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어요! 이건 사기극이라고요!” “혁명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 이루어지면 그게 진짜인 거지.” “혁명은 그런 말장난이 아니에요!” “당신 뜻에 찬성해.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혁명가 선언을 한 건 아니야. 이 [공단]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단 말이지.” “그런 식으로 쉽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신 의지가 가볍다는 증거예요.” 아일렌의 목소리엔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당신 혼자 그렇게 나선다고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 “나는 오랫동안 이 [공단]의 혁명을 보아 왔어요. 얼마나 많은 혁명이 실패하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리고······.” “과거의 실패를 경전처럼 여기지 마. 아무것도 안 하면 바뀌는 건 없다고.” “애초에 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고요!” 아일렌의 심정은 잘 이해하고 있다. 사실, ‘혁명가 시나리오’는 [공단] 안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한 시나리오였으니까. 시나리오가 허락하는 유일한 반란의 프로토콜. 그럼에도 [공단]의 [공민]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게임을 포기했다.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아일렌은 계속해서 외쳤다. “내가 ‘추방자’들에게 기대 왔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요. 기존의 시나리오를 통해서는 절대로 공작을 죽일 수 없으니까! 공작은커녕, 저 빌어먹을 [처형관]조차 이길 방법이 없으니까!” “시나리오는 깨라고 만든 거야. 잘 들여다보면 클리어할 방법은 있어.”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당신 때문에.”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그럼 당신이 제일 먼저 죽겠군요.” “안 죽어. 아까도 안 죽었잖아.” “그건······!” 아일렌이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말했다. “그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 ‘경호관’이 또 당신을 지켜줄 것 같아요?” “음, 지켜줄 것 같은데.”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경호관’의 경호는 ‘생명력’을 소진해요. 사용할 때마다 포인트가 감소하고, 결국에는 죽게 된다고요.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 세 번이나 당신을 지켜줄 사람은 없어요!” “뭐든 처음 한 번이 중요한 법이야.” “······.” “아일렌, 당신은 나보다 이곳에 대해 잘 알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네.” 뭔가 말하려던 아일렌이, 처음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마, 말은 저렇게 해도 아일렌 또한 뭔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숨어있던 [경호관]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나를 지켰다. 아마 그런 광경을, 아일렌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을 것이다. 정말로, 오랜만에.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아일렌이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정말로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가능해. 내 실력은 충분히 봤잖아?” 가능할 것이다. 불가능해도, 내가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아일렌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혁명가’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내 말에, 아일렌의 표정이 흔들렸다. “‘혁명가’ 없는 혁명을 만들어 보자고.” 이윽고 뭔가를 결심했는지, 아일렌이 말했다. “······포지션을 모아야 해요.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니까.” “그렇겠지.” “[경호관]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예요. [처형관]을 상대할 [투사]도 필요하고, 숨은 [처형관]들을 찾아낼 [스파이]도 있어야 해요.” “하나씩 모으면 돼. 그 ‘포지션’들, 당신 생각처럼 멀리 있지 않을 테니까.” 나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이미 ‘혁명가 선언’이 울려 퍼졌으니, 각 포지션을 맡고 있는 존재들도 하나 둘씩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를, 스스로 가늠하고 있겠지. “그리고 벌써 하나는 모은 것 같은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의원실의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렸다. 장하영이 눈을 빼꼼 내민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아일렌······.” “뭐야?” “누가 꼭 좀 들여보내달라고 해서······.” “지금 바쁘다고 했잖아! 돌려 보내.” “그게, 좀······.” “왜?” “······자기가 [경호관]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왔거든.” 깜짝 놀란 아일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장하영의 뒤쪽에서 건장한 체형의 중년인 하나가 나타났다. “당신······ 정말 ‘혁명가’인가?” 놀랍게도,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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