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199화 Episode 38. 가짜 혁명가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마계]의 무수한 시나리오들 중에서도 혁명가 시나리오의 위상은 크다. [공단]의 최정점인 [공작]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혁명가. 그 존재는 공민들의 희망이자 전설이었고, 동시에 절망이었다. 때문에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들. “뭘 그렇게 놀라? 혁명가를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내 뻔뻔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은 당혹에서 경악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나에게만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은 ‘혁명가’가 아닙니다.] 당연한 메시지였다. 지금 나는 시나리오 바깥의 추방자니까. 애초에 시나리오조차 없는 존재가, 마계 메인 시나리오의 중추가 되는 [혁명가]가 될 수 있을 턱이 없다. 본래라면 그래야 했다. [당신의 선언이 ‘세이스비츠 공단’의 메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스타 스트림>이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개연성’이다. 그르르르륵. [혁 명 가 라 고 ?] 굵은 사슬이 휘감긴 낫이 서슬퍼런 살기를 드러냈다. [처형관]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나로서도 [처형관]을 죽일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래야 했다. “그래, 내가 혁명가다.” [왜 스 스 로 를 드 러 냈 지 ?]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군가가 죽을 테니까.” 장하영을 비롯한 공민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처형관]을 보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슬슬 효과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다수의 공민들이 당신의 용기에 탄복합니다.] 됐다. [당신의 고결한 용기가 시나리오의 전개에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은 시나리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나리오가 임시로 당신에게 지위를 할당합니다.] [당신은 ‘자칭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기존의 ‘혁명가’가 사망할 시, 당신은 그 지위를 양도받게 됩니다.] 이것으로 나도 [시나리오]에 한 발 걸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히든 시나리오― ‘자칭 혁명가’를 획득하였습니다!] 시나리오 획득 메시지가 이렇게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메인 시나리오]가 아닌 기간제 [히든 시나리오]였지만, 당분간 버티기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73번째 마계의 히든 시나리오. 유중혁의 무수한 실패가 없었더라면, 나도 알 수 없었을 비밀이다. “당신! 잠깐만! 진짜 혁명가야?” “이봐!” 참지 못한 사람들이 공포를 억누르고 테이블을 박찼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마침내 [처형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카만 연기가 [처형관]의 입에서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내 몸을 휘감았다. [세이스비츠의 ‘처형관’이 당신에게 죽음의 표식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밤’의 희생양으로 지목됩니다.] 내 주변에 떠오른 표식을 본 순간 사색이 된 사람들이 소리쳤다. “모두 피해!” “우와아아악!” 콰아아아앙! 부서진 테이블 조각이 허공으로 비산했고, [처형관]의 낫이 앞쪽의 공간을 베어내며 떨어졌다. 나는 간발의 차로 낫을 피했다. 화신체를 수선받지 못했다면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추방자 패널티’가 일부 완화됩니다.] 쓰읍, 하고 들이켠 숨에 온기가 묻어 있었다. 전신에 온화한 기운이 깃들며 한기가 한결 가셨다. 나는 기민해진 움직임으로 이어진 [처형관]의 공격을 연달아 피해냈다. 역시, 시나리오를 얻고 얻지 않고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 비록 메인이 아닌 히든 시나리오지만, 이야기 속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존재의 생동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혁 명 가 ?] 내 움직임에 조금 놀랐는지, [처형관]의 기세가 바뀌었다. [해당 공간이 일시적으로 폐쇄됩니다.] [당신은 ‘선술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강자들이 [처형관]에 대항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공단] 안에 있는 한 [처형관]으로부터 도망갈 방법은 없다. 어디 그뿐인가? “피해 멍청아!” 장하영의 목소리와 함께 [처형관]의 낫에서 불온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어떤 [공민]도 [처형관]에 대항할 수 없다.」 [처형이 집행됩니다.] 녀석의 특수 기술인 [처형]은, 상대방의 모든 방어를 무시하고 일격필살의 공격을 가한다. 아무리 강한 [공민]이라 해도, 이 시나리오 안에서는 결코 [처형관]의 낫을 받아낼 수 없다. 스가가가가각! 처형관의 섬뜩한 낫이 내 몸을 베어내려는 순간. 기이이이잉! 내 손에서, [신념의 칼날]이 거칠게 울었다. “미안하지만 난 공민이 아니야.”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 울컥 마력을 토해냈고, [백청강기]의 도도한 흐름이 내 손끝에 휘감겼다. “말했잖아. 난 ‘혁명가’라고.” 뭐, 아직은 ‘자칭’에 불과하지만. 카아아아아앙! 백청의 눈부신 마력과 처형관의 낫이 충돌하며 엄청난 스파크가 튀겼다. 화려한 파찰음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은 메인 시나리오 참가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공민’이 아닙니다.] [당신은 ‘추방자’입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처형’ 효과를 받지 않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처형’의 필살 효과가 중화됩니다.] 까드드드드득! 내가 [처형관]의 낫을 흘려내자, 주변의 화신들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처, 처형관의 일격을 견뎌냈다!” “정말 혁명가란 말인가?” 내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의 시나리오 기여도가 커집니다.] [처형관] 녀석도 본격적으로 나를 오해한 모양인지, 가공할 기세를 전신에서 불태우고 있었다. [건 방 진······!] 나는 녀석을 도발하듯 말을 걸었다. “까불지 마. 네가 밤에만 세다는 걸 아니까.” [뭐 ?] “이 밤이 끝나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쥔 손목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일 테니까.” 쿠쾅! 낫이 수십 개로 분영(分影)하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처형]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서 [처형관]이 약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를 처분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그러니,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하기엔 일렀다. “모두를 지켜줄 수는 없으니까 밖으로 나가요!” 나를 제외한 자들은 ‘표식’의 효과를 받지 않았기에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했다. 허겁지겁 선술집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하영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녀석을 잠깐 일별하고는, 조용히 [책갈피]를 가동했다. “4번 책갈피, ‘리카온 이스파랑’을 선택하겠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1)’이 활성화됩니다!] 5번 책갈피에 담긴 [키리오스]의 힘을 쓴다면 보다 쉽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이 싸움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니, 이길 수가 없다. [대상에게 당신의 공격이 듣지 않습니다.] [‘밤’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처형관’을 죽일 수 없습니다.] 휘두른 칼날이 녀석의 옷깃을 베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런 메시지뿐. 놈의 [처형]은 나에게 듣지 않지만, 나의 모든 공격도 공단의 밤 안에서는 녀석을 상처 입힐 수 없다. 작전을 바꿔야 한다. 고오오오오오! 선술집 주변이 초토화되며 바람의 힘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짓쳐드는 수십의 낫 그림자들이 바람의 움직임에 맞물려 둔해지고 있었다. 반면 내 움직임은 더욱 민활해졌다. 속도의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은 늘 나보다 한 박자 느렸고, 내 움직임은 늘 녀석보다 한 발짝 빨랐다. 이것이 극한에 다다른 [바람의 길]의 정수. 공간 일대의 모든 가속(加速)을 통제하는 힘이다. “그렇게 굼벵이 같아서 내가 보이기는 하냐?” [그 아 아 아 아 아.] 분노한 [처형관]의 낫이 마구잡이로 허공을 베어대기 시작했다. 보통은 그런 공격에 맞아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저 망할 <올림포스>의 행운의 여신이 저 녀석에게 웃어주기라도 한 것인지, 우연히 휘두른 낫 하나가 내 사각으로 흘러들었다. “이크.” 불의의 일격이 옆구리에 작렬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 오른팔이 기이한 형태로 뒤틀리더니 그 공격을 받아냈다. [오른팔에 깃든 소드마스터의 재능이 빛을 발합니다!] 까아아아앙!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설화의 파편이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할 줄이야. [불완전한 설화의 사용으로 화신체의 위상이 불안해집니다.] [과도한 전투를 지속할 시 당신의 설화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시금 슬금슬금 밀려오는 한기. 기껏 [히든 시나리오]까지 획득했는데, 겨우 [처형관] 하나를 상대한다고 과도한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계속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최대한 피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빌어먹을 [밤]이 끝날 때까지. [너 는 죽 는 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바람의 길]을 전력으로 발동했다. 고오오오오! 유중혁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초월좌인 녀석의 도움이 있었다면, 이 긴 밤도 버티기 쉬웠겠지.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도. ‘강철검제’ 이현성도. ‘해상제독’ 이지혜도. 내 사랑스런 꼬마들, 이길영과 신유승도 없다. 한수영은······ 뭐, 있어도 안 도와줬겠지만. 까가가가가강! 이곳에는, 나 혼자다. 내가 믿을 것은 내가 아는 정보. 내가 쌓아 올린 이야기. 그리고, 나 자신뿐이다. 초조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처형관]의 공격이 조금씩 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뭐야, 지쳤어?” 무적 판정을 받는 녀석이 지칠 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치기보다는 슬슬 짜증이 나고 있겠지.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오히려 내 상태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책갈피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람의 길]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30분이 한계. 애초에 [책갈피]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형관]이 웃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소름돋는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나타난 십여 명의 [처형관]들. 이 밤의 가장 끔찍한 점은, [처형관]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이스비츠 공단]의 모든 [처형관]들이 좁아 터진 선술집 안에 모여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의 실 수 다.] 녀석은 일부러 시간을 끄는 척하면서, 동료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나를 확실하게 이 밤 안에 끝장내기 위해서. 고오오오. 살기를 피우며 나를 포위하는 [처형관]들의 움직임을 보며, 나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설령 [바람의 길]을 쓴다고 해도, 이들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니, 실수한 건 너야.” 30분이나 시간을 끌었으니,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다가오는 낫의 행렬을 보며, 나는 양팔을 벌렸다. 쿠콰콰콰콰! 공기를 통째로 부수며 날아드는 수많은 낫들이 내 몸통을 꿰뚫었다. 몇몇 화신들이 눈을 질끈 감았고, 비통한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의 절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기이이이이잉. 분명, 나를 처참하게 꿰뚫고 찢었어야 했던 낫들. 그 낫들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무 슨 ?] 당황한 [처형관]들이 멍청한 눈으로 허공에 걸린 무기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멸살법’의 문장을 떠올렸다. 「공단의 ‘밤’을 견딜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이 끝날 때까지 ‘처형관’으로부터 도망다니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잊었어? 이 시나리오에는 [혁명가]와 [처형관]만 있는 게 아냐.” 뒤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력을 사용해 당신을 경호합니다.] 「‘밤’에서 살아날 두 번째 방법은, ‘경호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역시. 이렇게 하면 숨어있던 ‘경호관’이 나올 줄 알았지. 아일렌은 말했다. [혁명가]가 누구인지는, 공민회의 의원들조차 모른다고. 그렇다는 것은, 다른 화신들조차 [혁명가]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 즉, 지켜주고 싶어도 누군지 모르니 지킬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혁명가]가 자신을 밝히고 나타난다면 어떨까? [경호가 성공하여 죽음의 표식이 해제되었습니다!] 밤마다 [처형관]이 발호할 수 있는 표식의 숫자는 하나뿐. 표식이 해제되었으니, 오늘의 살행은 끝난 것이다. [처형관]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 이 좋 았 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우리가 만나는 건 ‘낮’일 테니까.” 분한 듯, [처형관]들이 이를 갈며 허공에서 하나 둘 흩어졌다. 음산한 피리소리가 사라지고, 어둠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선술집의 바깥에서 격앙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화신들이 보였다. 도도한 장하영조차 충격에 빠진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머쓱하니 손만 흔들어 주었다. “새, 새로운 혁명가다!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났다!” 공민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마침내 짧았던 밤이 물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민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들 중 누군가가 ‘경호관’일 것이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반드시 ‘경호관’과 함께 수행해야만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간혹 별 같은 것이 몇 개 보이기도 했지만, 너무 흐릿했기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밝기였다. 우리엘이라든가, 제천대성이라든가······. 녀석들이 보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들려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오늘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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