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195화 “우와앗! 추방자다!” “뭐야,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러대는 화신들. 나는 그런 인파를 헤치고 도시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츠츠츠츳. [추방자 패널티]로 인해 몸의 곳곳에서 설화 조각이 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팔과 심장 부근은 새로운 설화 파편 흡수로 인해 그나마 안정된 상태였지만,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화신들은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추방자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어디 간 거야? 신고 안 해도 돼?” “뭐······ 저러다 금방 죽겠지. 그만 가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추방자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들이 추방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저 추방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간 골목길에 기대어 숨을 죽이고 있자,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금방 흩어졌다. 부아아앙―! 때마침 나타난 마도기관차의 행렬도 상황을 무마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불길한 검정색 도료로 덮인 마도기관차를 확인한 화신들이 질겁하며 물러났다. “물러서! 귀족의 행차다!” 공단의 중심가로 달려가는 마도기관차.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다른 공단에서 찾아온 손님들인 듯했다. 아마 마계의 고위 귀족들이 탑승하고 있겠지. 최소 [낙원]에서 만났던 라인하이트 못지않은 강자들이 저 기관차에 타고 있는 것이다. 과아아앙―!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급하게 공장으로 가는 것을 보니, 급보인 모양이었다. 길을 지나던 화신들이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내는 기관차. 기겁하여 물러난 평민들이 투덜거렸다. “저거 [길로바트]의 기관차 같은데. 최근 자주 보이지 않아?” “알 게 뭐야. 귀족 놈들의 일 따위.” “이번엔 알아야 하네. 73번째 마계가 통합된다는 이야기가 있단 말일세.” 꽤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나는 청력을 높인 채 떠도는 말들에 집중했다. “마계가 통합된다고? 그 엉덩이 무거운 공작들이 움직였단 말인가?” “그래, [멜레돈]과 [베르칸]이 손을 잡았다지. 그러니 [세이스비츠]도 어지간히 똥줄이 타지 않겠나?” 73번째 마계를 다스리는 공작들의 이름에, 다른 화신들도 하나둘 대화에 끼어들었다. “허! 그 소문이 진짜였어? 하지만······ 우리 마계는 벌써 수천 년째 마왕이 없었잖은가?” “그러니까 이번에 그 ‘마왕’이 우리 마계에서 나온다는 건가?” 쏟아지는 질문에, 제일 먼저 마왕 화제를 꺼냈던 화신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네. 들리는 풍문으로는 마왕들 사이에서 신탁이 돌고 있다는데. 새로운 마왕의 출현에 대한······.” “공작 놈들은 그게 자기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멸살법’ 원작에서도 비슷한 대화를 본 적이 있다. 딱 지금이 그런 종류의 소문이 돌 만한 시기지. 때를 잘 맞춰 찾아온 셈이다. ‘마왕’이라······. 나는 멀어지는 마도기관차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 이 [공단]에도 계급은 있다. 공단을 지배하는 마계의 무리들이 속한 ‘귀족’. 각지의 차원에서 투입된 화신들의 계급인 ‘공민(工民)’. 그리고 그런 공민들이 설화를 잃고 타락한 존재인 ‘수거 노예’. 지금은 그 세 계급뿐이지만, [마왕]이 도래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마왕. 하나의 마계를 통치하는 종주이자, 하나의 세계를 소유한 절대 권력자. 마계의 그 어떤 종족도, 마왕에게 거역할 방법은 없다. 이 마계에서, 마왕의 존재는 설화급 성좌 못지 않게 강력한 위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마 73번 마계의 공작들도 그런 마왕의 출현을 몹시 견제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마왕이 출현하게 되면, 자신들의 권력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니까. 하지만 ‘마왕’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게, 내가 ‘마계’로 온 이유니까. ―두 번째 정보. ‘시계점 에티카’를 찾아라. 때마침 날아온 메시지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혹부리들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혹부리 녀석들이 아주 몰상식한 놈들은 아니었다. 도깨비들 사이에서야 ‘상도덕을 혹부리한테 배운 새끼’라는 말이 관용구로 있을 정도지만, 그거야 도깨비가 혹부리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혹부리의 기척은 또다시 사라졌다. 시계점 에티카. 그곳에 [마계]의 시나리오를 입수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혹부리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멸살법’의 원작에도 그 시계점의 정보는 있었다. 그럼에도 혹부리들에게 정보를 요청한 것은, 불필요한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땅히 개연성에 맞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나 할까. 츠츠츠츳······. 나는 부서지려고 하는 내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시계점으로 간다고 해서 ‘시나리오’를 바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추방자 패널티]를 경감시킬 방법은 있겠지. 시계점 에티카는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아니고. 저 골목도 아니고. 설화가 부서지는 지점이 보이지 않게끔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로, 나는 계속해서 [공단]의 골목을 내달렸다. 하지만 시계점 같은 곳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에서 시계 같은 건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 물건은 인간처럼 짧은 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멸살법’을 읽을 수 있었다면 찾기가 쉬웠을 텐데. 스마트폰이 없어진 상황이라 텍본을 읽을 방도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형한테 미리 스마트폰을 하나 챙겨 달라고 할걸······.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누굴 붙잡고 ‘시계점 에티카가 어딥니까’라고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뭐야, 눈깔 제대로 안 달고 다녀?” “아, 죄송······.” “죄송하면 다야? 젠장, 너 때문에 부품 다 쏟았잖아! 이런 씨바!” 대충 15세 정도 되었을까. 기계 부품처럼 보이는 것을 한 아름 안은 미소년이 묘하게 새침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그게, 미안하긴 한데.” 그런 쌍욕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소년의 말이 나보다 빨랐다. “미안하면 빨리 주워 새꺄!” 나는 그 잘생긴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묘한 폭력성에 압도되어 떨어진 부품들을 허겁지겁 주워들었다. 순간적으로 예전의 ‘김독자’가 불쑥 튀어 나와버린 기분이었다. 너무 열심히 부품을 주운 것일까, 소년이 피식 웃었다. “씨바, 한 번만 봐 준다.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그렇게 부품을 챙긴 소년은 특유의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는 다시 앞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왜일까. 녀석의 얼굴을 본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보다 어린 녀석에게 욕을 얻어먹었다는 한발 늦은 원통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녀석은······. 여느 판타지 소설처럼, ‘멸살법’에는 예쁘고 잘 생긴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그런 예쁘고 잘 생긴 인물들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의 경우, ‘멸살법’에서는 ‘유중혁 뺨치게’라는 관용어를 쓴다. 예전에 [피스 랜드]에서 만났던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그런 경우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그 ‘키리오스’보다도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표현을 쓰냐고? 「그 녀석은, 유중혁의 뺨을 두 번 갈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설명이 덧붙여지는 존재는 ‘멸살법’ 안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는다. “찾았다.” *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가게의 선반이 통째로 부서졌다. 젠장, 이걸로 벌써 세 번째군. 선반 사는 것도 일인데. 시계점 ‘에티카’의 점주 아일렌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특유의 침착한 미소로 사태를 응대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세 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으면 이제 알아들을 때도 됐잖아?” “아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니까 그렇지. 한낱 시계점 주인에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아일렌은 긴장하며 자신의 앞에 선 두 악마를 마주 보았다. [악마 남작 멜렌] [악마 백작 시로크] 제각기 그런 이름을 지닌 두 악마는, 이곳 [세이스비츠 공단]에서는 유명한 귀족들이었다. 서로를 보며 히죽 웃던 악마 중 하나가 길쭉한 팔을 내뻗었다. “큭!” 피할 틈도 없이 턱을 붙잡힌 아일렌이 신음을 흘렸다. 아일렌의 새하얀 피부 곳곳에 남은 흉터를 유심히 보던 악마 백작 시로크가 킬킬 웃었다. “확실히 네가 평범한 시계점주는 아니지. 하지만 우리 공작님이 세 번이나 청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도 아니야. 무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니. 네가 무슨 ‘드러누운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냐?” “······그게 누구 수식언인진 모르겠는데, 부탁한 건 지난번에 만들어 줬잖아? 이번에는 도와줄 수 없어.” 쿠구구구. 그 한 마디로 시계점 안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악마 귀족들이 힘을 끌어올린 것이다. 파르르 떨린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순간. “뭐해 아일렌? 사채라도 썼어?” 누군가가, 시계점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의 미소년을 확인한 악마 백작 시로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계점의 욕쟁이로군. 처형당하고 싶으냐?” “저놈은 제가 맡지요.” 악마 남작 멜렌이 미소년의 목을 잡고 가뿐히 들어올렸다. 미소년은 목을 잡힌 채 멜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제법 예쁘군요.”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넌 정말 역겹게 생겼어.” 멜렌의 왼손이 소년의 배를 갈겼다.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에도, 소년의 눈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든다는 듯 멜렌이 웃었다. “이 정도 미색이면 공작님의 첩실에 들기엔 충분한데 말이죠.” “거긴 시급 얼마나 주는데? 여기보다 더 주면 못 갈 것도······.” 다시 한 번 퍼어억, 하는 소리가 울렸다. 피를 흘리는 소년의 입술을 보며, 아일렌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 애를 인질로 잡아봤자야.” 마치 장난이라도 쳤다는 것처럼, 악마가 손을 놓았다. “후후, 누가 그런 짓까지 한댔나? 우린 신사라고.” 그러자 허공에서 추락한 미소년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신음했다. “그래서 제안은 거절하겠다 이거지? 공작님께 그렇게 전하면 되겠나?” “그래. 미안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물러갈 분위기여서, 아일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일만큼은 결코 맡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 일을 맡게 된다면, 또 몇 명의 공민이 희생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자 시로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까지 밀린 세금을 받겠다. 공작님께서 받아오라 하셨거든.” “세금? 하지만 지금까지는 면세 혜택이······.” “지금까진 그랬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역시,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나. 아일렌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얼만데?” “5만 코인.” 5만 코인이라니. 그 막대한 금액에 아일렌은 기가 질렸다. 다른 시나리오 지역이라면 모를까, 이곳 [세이스비츠 공단]에서 코인은 값이 귀한 화폐 중 하나였다. “여긴 성좌들도 거의 없는 곳이야! 그만한 거금이 있을 리가······.” “내놓지 않는다면 이 꼬맹이를 데리고 가겠다. 첩실에 처넣으면 5만 코인 정도는 나올 테니까.” 그 태연한 협박에도 미소년은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5만 코인! 아일렌, 그거 받으면 세금 내지 말고 튀자.” “······그 건방진 주둥이에서 곧 비명이 나오게 해주마.” “그래? 씨바, 아주 기대되네.” 미소년의 호언에도 불구하고, 아일렌의 표정에는 절망이 스치고 있었다. 오래도록 미소년과 사제 관계를 유지해 온 그녀는, 저 아이가 겉으로는 껄렁하게 말해도 속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악마 백작의 입에서 최후의 통첩이 이어졌다. “아일렌 메이크필드. 공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참고로 제안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일렌은 공민의 의장(議長)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정도라면, 저쪽에서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다는 것이었다. 망설이던 아일렌이 입을 열었다. “나는······.” 딸랑. 그리고, 누군가가 시계점에 들어왔다. * “뭐냐?” 제일 처음 나를 반긴 것은, 시계점의 점주가 아니었다. 불청객의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악마 귀족들. 대충 바깥에서 흘러가는 대화의 추이는 들었기 때문에,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증오의 눈길을 불태우며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미소년. 나는 악마 대신 그 미소년을 유심히 노려보며 대답했다. “손님입니다······.” 내 공손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악마 귀족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공민]인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꺼져라. 지금 세금 징수 중이니까.” “세금이라······ 많이 벌면 많이 내고, 적게 벌어도 많이 내는 그거 말이지?” “뭐?” 나는 악마 귀족들을 지나쳐 점주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잠깐!” 당황한 악마 귀족이 나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녀석의 팔은 내게 닿지 않았다. 가벼운 동작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뿌리치는 나를 보며 귀족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나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부서진 선반의 시계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계들 중 하나를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좋은 물건이 많네.” 그 순간, 뭔가를 직감했는지 시계점주 아일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좋은 물건은 늘 있지. 좋은 주인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을 뿐.” 어쩐지 웃음이 난다. 역시, 말투도 ‘멸살법’ 그대로다. 행성 [린드버그]의 마도공학자, 아일렌 메이크필드. 나는 긴장한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일렌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안에서도, 지금쯤 시곗바늘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손님이 이 상황의 동아줄이 될지, 아니면 상황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자충수가 될지를 가늠하며······. 나는 그녀의 고민을 좀 덜어주기로 했다. “좀 특별한 물건을 주문하고 싶은데.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내 말에, 아일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곳에 ‘특별한 물건’을 의뢰하러 오는 손님은, 오직 한 종류뿐이니까. 악마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던 아일렌이 조심스레 물었다. “······의뢰 대금은?” 나는 씩 웃으며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나를 노려보는 귀족들을 한 번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5만 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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