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196화 “잠깐만, 넌 아까······!” 나를 알아본 미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나 미소년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눈치 빠른 아일렌이 재빨리 내 코인을 받았다. “5만 코인. 좋아.” “지, 진짜 5만 코인이잖아······?” 경악한 미소년이 입을 딱 벌린 채 아일렌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5만 코인은 시나리오 전역으로 보자면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마계]기준으로는 상당한 액수였다. 이곳은 마왕의 영향 때문에 성좌들이 좀처럼 방문하지 않는 지역이니까. 물론, 내 기준에서야 5만 코인은 푼돈이었다. [행성 ‘피스랜드’에서 ‘김 도게자 전설 1부작’이 완성되었습니다.] [지역의 선구자들이 당신에 대한 신앙을 설파합니다.] [15,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는 실시간으로 코인이 들어오는 곳도 있다 이 말씀. 이게 바로 성좌의 좋은 점이다. 후원을 받지 않아도, 그저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이 되니까. 황망히 굳어 있던 악마 귀족들이 뒤늦게 반응해왔다. “넌 누구지?” 나는 녀석들의 정보를 살폈다. 하나는 [악마 백작 시로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악마 남작 멜렌]. [세이스비츠 공단]에서는 제법 유명한 징수원들이었다. “말했잖아, 손님이라고.” 평소였다면 예의 바르게 굽신굽신 해줬겠지만, 이런 녀석들에게 예의범절은 역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가진 게 없어도 많이 가진 것처럼 굴어야 겁을 먹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니까. “네놈, 지금······!” 내 말투에 악마 남작 멜렌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만둬라, 멜렌.”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시로크가 멜렌을 만류했다. 역시 백작쯤 되면 눈칫밥을 좀 먹는 모양이다. [등장인물 ‘악마 백작 시로크’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등장인물 ‘악마 백작 시로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그러자 시로크의 생각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5만 코인을 쉽게 지불할 수 있는 녀석이다.」 「일개 공민은 절대로 낼 수 없는 금액이야. 게다가 저 여유. 분명 5만 코인 정도는 푼돈으로 여긴다는 거겠지.」 「누구지? 이 구역에서는 처음 보는 녀석인데. 잠깐, 저 마기는······.」 「설마······?」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세이스비츠 공단]은 새로운 마왕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고 있다. 그렇다면 이쪽 녀석들이 적당히 오해할만한 정보를 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내 유중혁 같은 말투에 시로크의 안색이 급변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녀석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왔다. “귀마(貴魔)께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혹시 [길로바트 공단] 쪽에서 방문하신 분이십니까?” “그래도 귀는 제대로 달린 모양이군.” “하지만 이쪽 구역에 방문하신다고 따로 통보를 주신 적이······.” “너희 같은 말단한테까지 내 방문 경로를 알려야 하나?” “그건······ 죄송합니다.” 내 짧은 대답으로 녀석은 모든 것을 납득한 듯했다. 「통보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권한. 최소 후작 이상이라는 뜻이겠지.」 「[길로바트 공단] 측과 얽혀서 좋을 건 없다.」 멋지게 오해를 마친 시로크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멜렌에게 턱짓했다. “그만 가자.” “예? 하지만······.” “우린 받을 것만 받으면 돼.” 상관의 냉정한 판단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멜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멜렌은 아일렌에게서 5만 코인을 챙긴 후, 사나운 목소리로 지껄였다. “이번엔 운이 좋았군.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라 생각지 마라, 아일렌.” 두 악마 귀족은 그 말을 남기고 시계점에서 사라졌다. 아마 저 시로크라는 녀석은 즉각 이 일을 상관에게 보고하겠지. 상관은 없다. 거기까지 생각을 안한 건 아니니까. 한 차례 풍파가 지나간 시계점은 휑한 기운으로 들어찼다. 분위기를 깬 것은 미소년이었다. “······꽤 하네? 넌 대체 누구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을 향해, 나는 가만히 웃어주었다. “의뢰는 맡아주는 거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일렌이 나를 보았다. “저······ 그런데, 귀족이십니까?” 하긴, 악마들도 오해를 해버렸는데 아일렌이라고 오해를 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악마종이 아냐.” “그럼······?”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외투를 벗었다. 그러자 스파크와 함께 부서진 설화 조각들이 흘러 내렸다. 내 몸을 확인한 아일렌이 대경한 얼굴로 다가왔다. “······추방자? 설마, 특별 의뢰라는 게······!” “맞아.” 그저 얼핏 살핀 것만으로 내 설화의 규모를 짐작한 아일렌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하, 하지만 난 이 정도 규모의 설화를 이은 적은 없어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 [세이스비츠 공단]에 제대로 된 ‘설화 전문가’는 당신 뿐이잖아.” 설화 전문가, 라는 말에 급격하게 흔들리는 아일렌의 표정. 슬슬 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을 덧붙였다. “날 고쳐줘. 아일렌 메이크필드.” * 깜빡이는 의식 속에서, 아일렌과 몇몇 낯선 사람들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나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화신이 이만한 규모의 설화들을······.” “대체 누굴까요?” “······규격에 맞지 않는 설화들이 뒤섞였어. 맙소사. 이 설화는 전설급 같은데?” “진짜 화신 맞습니까? 화신의 격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런 위험한 파편을 먹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라마르크의 기린’의 특성 숙련도가 더 높았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화의 흡수율이 높으면 다른 이야기 파편들이 섞이더라도 특성의 효과로 중화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 마치 인체의 면역 반응처럼, 서로 다른 설화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일단 급한대로 이것부터 안정화시켜 보죠······.” 긴장한 아일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일렌 메이크필드. ‘멸살법’의 원작에 따르면, 그녀는 행성 [린드버그]의 마도공학자 출신이었다. 오래도록 마도학을 공부하고, 또 공부한 끝에 이 세계의 본질이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 존재. 비록 ‘초월좌’의 업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이 마계에서 [설화 전문가] 특성을 가진 극소수의 화신이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더 의식이 깜빡였다. 서서히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추방자 패널티]로 인한 한기가 한결 줄어들었고, 화신체의 고통은 차츰 경감되고 있었다. 「불쌍한 소드 마스터의 오른팔」과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다른 설화들과 충돌하지 않고 무사히 내 화신체에 스며들었다. 역시, 아일렌을 찾아온 것은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그렇게 전신의 점검을 마치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곳엔 미소년의 아리따운 얼굴이 있었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예쁜 얼굴이긴 하다. 미소년이라기 보다 미소녀라고 표현하는 쪽이 나을 정도로. “우왓!” 깜짝 놀란 미소년이 순간 소리를 질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는데 웬걸,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세히 보니 내 몸은 수술대 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설화의 힘을 억제하는 술식을 몇 가지 걸어놓은 듯한데······. 주변을 둘러 보니 함께 있는 것은 미소년 하나뿐이었다. 내가 묶여 있다는 걸 알고 조금 안심한 모양인지, 미소년이 다시 말을 걸었다. “어이, 정체가 뭐야?”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이 녀석과 둘만 있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뭘 것 같아? 너 퀴즈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아무튼, 맞춰봐.” 내 말에 미소년의 눈빛에 흥미가 스쳤다. 역시, 잘 걸려드는구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미소년은 대뜸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귀환자야?” “귀환자? 왜 그렇게 생각했지?” “[마계]의 일반 공민이 그런 거금을 갖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괜찮네. 계속해 봐.” “일단 본인 입으로 악마가 아니라고 했고, 평범한 화신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희귀한 설화들을 잔뜩 가지고 있잖아. 어쩐지 강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답은 하나 뿐이지.” “흐음······.” “어때? 내 추리가?” 환하게 눈을 빛내는 녀석을 보며, 나는 어쩐지 녀석을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일단 그 추리가 맞으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해.” “무슨 전제?” “‘세상 모든 귀환자는 강하다’라는 전제.” 내 말에 미소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뭔 소리야? ‘귀환자’가 뭔지 몰라? 다른 차원이나 행성에서 강력한 힘을 얻어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온 존재들이라고. 그런 자들이 약할 리가 없잖아?” “모르지. 너도 세상의 모든 귀환자를 만나본 건 아니잖아?” “그건······.” “가령, 어떤 귀환자는 자신의 행성을 싫어해서 ‘귀환’하지 않으려 할지도 몰라.” 미소년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몇 번이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는데 별다른 능력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수도 있고.” “······.” “새로운 육체를 얻었는데도 그 육체에 아무런 재능이 없을 수도 있고.” “······잠깐만.” “그 재능에 좌절해서, 그냥 적당한 장소에 눌러 앉아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지.” “······너 누구야? 진짜로.”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영아. 마계 생활은 즐거워?” “뭣?”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장하영 (아슬란 메이크필드) 나이 : 23세 (15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전용 특성 : 차원이동자(영웅), 고향을 등진자(희귀), 벽의 주인(신화) 전용 스킬 : [정체 불명의 벽 Lv.1], [독설 Lv.3], [투덜거리기 Lv.5], [게으름 Lv.3], [나태 Lv.3], [무기력 Lv.4]······. + 투덜거리기, 게으름, 나태, 무기력······. 누가 이 녀석의 인물 정보를 보고 ‘멸살법’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까. 유중혁이 봤다면 이런 녀석이 같은 주인공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너, 너 어떻게······!” 하지만 장하영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잘 안 됐기 때문에. 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에. 결과가, 과정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아, 여기선 본명을 안 쓰지 참. 그럼 ‘아슬란’이라 불러줘야 하나?” “내 본명을 어떻게 아는 거야!” 깜짝 놀란 장하영이 등을 벽에 찰싹 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작가님. 제 생각인데, 이참에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편이······. 만약 그때 내가 그 댓글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장하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기왕이면 예쁜 여캐로······. 어쩌면 내가 이 녀석에게 책임을 느끼는 것은 그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나 때문에 이 인물을 만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설정은, 흠. 중혁이가 회귀자니까, 얘는 차원이동자 정도면······. 적어도 내가 그때 댓글을 달지 않았더라면, 이 ‘두 번째 주인공’은 최소한 차원이동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넌 재능이 없는 게 아냐. 재능을 모르는 것 뿐이지.” “뭐? 무, 무슨 소리를······!”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뭐야 아슬란? 무슨 소란이야?” “아, 아일렌!” 장하영의 얼굴을 확인한 아일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뭐야? 애한테 무슨 짓 했어?”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일렌의 뒤쪽으로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저들이 [세이스비츠 공민회]일 것이다. 공작의 야욕에 맞서는 이곳 [세이스비츠]의 마지막 양심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장하영 일이야 나중에 해결해도 되니, 일단 이쪽부터 처리해볼까. “세이스비츠 공작······.” “뭐?” “놈은 야망이 크지. 다른 대마계의 고위직을 마다하고 굳이 이런 변방까지 나온 녀석이니까.” 내 말에 공민회의 회원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아일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세이스비츠 공작이 당신한테 거신병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거야. 그렇지?” “어?” “그 녀석, 얼마 전에 명계 견학을 다녀와서 맛이 좀 가버렸거든. 그래서 당신한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거야.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말이지.” “다, 당신 대체 어떻게······!” 말하지도 않은 정보를 내가 줄줄이 읊자, 공민회의 회원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놀란 아일렌의 몸이 뻣뻣이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쪽이 이걸로 세 번째 거절을 했으니, 다음 번엔 강제로 당신을 데려가겠지. 대비는 됐어?” 내 말에 아일렌을 비롯한 공민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렇기도 하겠지. 이들도 나름 자신의 행성에서는 한가락 하는 이들이지만, 마계의 공작에 비견할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나는 그 적막을 적당히 즐기다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조건을 들어주면, 내가 ‘공작’을 막아 주겠어.” 그들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추방자가, 자신들의 정보를 죄다 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도 안 되는 제안까지 하고 있으니. 힘겹게 입을 뗀 것은 아일렌이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그래, 뭐든 간에 여기서부터 시작이겠지. 이참에 ‘나는 김독자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 이름을 밝혀버리게 되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지구의 성좌들이 알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원작대로 가볼까. 나는 원작의 111회차를 떠올리며, 최대한 사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유중혁. 이곳, 73번째 마계의 ‘마왕’이 될 존재다.” * [73번째 마계에서 당신의 악명이 퍼집니다.] 순간 들려온 메시지에, 유중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물론, 하늘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런데 한순간, 유중혁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유중혁은,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하늘을 노려보더니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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