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94화 Episode 37. 마계의 풍경 “제4의 벽은 말했다. 여 기가 어 디지.” 「따 라하 지 마.」 나는 이야기의 지평선을 걷고 있었다. 정확히는, 벌써 나흘 째 걷기만 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쓰레기의 산만 거닐다 보면 누구라도 벽이랑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들 것이다. 나는 길에 떨어져 있는 설화 파편을 향해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저걸 주워야겠어.”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의 공간 여백이 꽤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주워든 설화들을 여백 속에 모조리 쑤셔 넣었다. 그러자 [제4의 벽]이 대답했다. 「멍 청 이.」 그나마 혼잣말이 아니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제4의 벽]이 대체 뭘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게 적의를 가진 녀석은 아닌 게 분명했다. 오히려, 나를 [추방자 패널티]로부터 지켜주기까지 하는 녀석이니······. 「졸, 리, 다.」 “조금만 참아. 네가 뭐라도 말 해야 움직이기가 편하다고.” [추방자 패널티]는 화신체를 얻은 지금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고, 여전히 쓰레기의 산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고통은 시나리오에 복귀하기 전까지 계속되겠지. [흡수한 일부 설화들이 구성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비교적 부작용이 적은 진화계 특성인 [라마르크의 기린]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화신체의 설화 균형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전투를 하거나 불필요한 행동을 한다면 또 다시 화신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거참, 쉽게 풀리는 게 없구만. 이래서 언제 성운들에게 복수할까 싶지만, 뭐든 마음을 급하게 먹으면 안 된다. [시나리오 지역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일단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마계]의 시나리오를 손에 넣는 것이다. 혹부리 자식들은 나를 대충 내던졌지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대강의 계획도 이미 세워놨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루트는 유중혁의 111회차와 동일하다. 때문에, 도중에 특이한 변수만 없다면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다. ······그러고 보면 유중혁의 111회차 때 많은 일이 있었지. ‘멸살법’ 작가가 잠깐 슬럼프에 빠졌을 때가 그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대략 1천화를 좀 넘기던 시점이었는데, 내가 댓글로 조언이랍시고 여러 가지를 달았던 게 기억이 난다. 내 댓글 때문인지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나오고 이야기 시점이 바뀌었었지······. 부르르르. 품속에 넣어 두었던 [도깨비의 알]이 갑자기 꿈틀거렸다. 나는 설화 파편 몇 개를 알에게 흡수시킨 후, 알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그래, 귀여운 것.” 내가 구한 영혼이 새로운 생명체로 깨어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아마 늦어도 한 달 안에 알은 부화할 것이다. 그때 내 계획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부화하고 나서도 계속 ‘신유승’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텐데······ 이름을 뭐라고 짓지? 「그때, 김독자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 나는 쓰레기산 뒤쪽으로 몸을 웅크리며 숨을 죽였다. 느껴지는 기척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많게는 백여 마리에 이르는 개체들. 나는 분위기를 살피다 살짝 머리를 내밀어 상황을 확인했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작들.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생물들이 설화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녀석들의 정체는 명확했다. 저들은, [수거 노예]들이다. 마계를 다스리는 지배자들의 명을 받아, 지평선 인근에서 연료로 쓰일 설화 파편들을 수거하는 녀석들. 놈들은 이지(理智)가 거의 없기 때문에 먼저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공격당할 일은 없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수거 노예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근처에 ‘공단’이 있다는 뜻이다.」 [공단]은 이곳 마계의 도시 같은 곳이었다. 부서진 설화 파편들을 갈아 넣어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과, 그 공장을 둘러싼 주거지역이 있는 곳.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공단은 [세이스비츠 공단]일 것이다. “빨리 빨리 움직여! 오늘 치 연료가 밀렸단 말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쓰레기 산 뒤쪽으로 숨었다. 작은 날개와 외뿔을 가진 악마가 날개를 퍼덕이며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단의 감독관이었다. 녀석이 같이 왔다는 건, 이번 ‘수거’의 규모가 꽤 크다는 뜻. 그때, [수거 노예] 하나가 길을 잃었는지 내가 숨어 있던 쓰레기 산 뒤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피할 틈도 없이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르르······?” 멍청한 눈으로 나를 보는 [수거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침팬지의 외양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마 자신의 행성이 멸망하고, 이곳 마계로 납치 당한 종족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잃고,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서 살아가게 된 존재들. 녀석의 팔에 찍힌 [6424]라는 낙인이 보였다. [특성 ‘마왕 후보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마왕 후보자]. 그것은 내가 ‘73번째 마왕’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얻게 된 특성이었다. 그러자 알아들을 수 없던 녀석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만, 하, 고, 싶, 어. 뭐? ―죽, 여, 줘. 마치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듯, 그만 해방시켜주길 바라는 눈동자. 나는 그 애처로운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 뿐인 것 같군.」 * 잠시 후, 나는 [공단]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다른 수거 노예들과 함께 서 있었다. 아공간 코트를 비롯한 아이템들은 들고 온 설화 더미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즉, 나는 지금 발가벗은 상태였다. 최대한 ‘수거 노예’와 비슷한 행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왼쪽 팔에도 죽은 ‘6424’의 낙인을 설화로 엮어 놓은 상태였다. “다음!” 내 계획은 단순했다. 많은 수거 노예들 사이에 끼어들어 공단 안쪽으로 진입하는 것. 노예들의 검열은 다른 여행객들만큼 까다롭지 않다는 것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뭐야, 오늘 수확량이 영 변변찮은데?” 하지만 빌어먹게도, 감독관 녀석이 내 생각보다 까탈스러웠다. 퍼어억! 내 바로 앞에 있던 ‘수거 노예’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어이, 거기. 이 자식도 같이 담아가. 연료 통에 처넣으라고.” 마치 기계 부품을 대하듯 수거 노예를 들통 쪽으로 던진 감독관이 킬킬 웃었다. [악마 남작 체체펜]. 고작해야 [암흑성]에서 만났던 하급 귀족 수준의 녀석이었다. [암흑성] 놈들 보다는 가진 설화의 가짓수가 많을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남작은 남작. 마음 먹고 달려든다면 못 죽일 녀석도 아니었다. “다음! 6424!” 문제는, 놈을 죽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이다. [공단]의 주인은 마계의 최고위 ‘공작’들이었고, 공단의 감독관을 직접 해치우게 되면 ‘공작’이 알아챌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화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지금 마계의 최고위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뭣하면 [마왕 후보자]의 특성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괜스레 시작부터 주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수거품 바구니를 내밀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일이 꼬인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다. “오, 뭐야! 제법 많이 가져왔잖아?” 다행히 내가 가져온 수북한 설화 파편을 본 감독관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혹시 파편 더미를 뒤져 숨겨둔 아이템들을 발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만큼 꼼꼼한 녀석은 아닌 듯했다. 체체파리처럼 힘껏 날갯짓을 한 감독관이 내 등짝을 팡팡 두드리며 외쳤다. “다들 이 녀석을 본 받으라고! 응? 최근 수확량이 영 변변찮다는 거 다들알고 있지? 이대로면 다음 연료는 네놈들이 될 거야!” 감독관의 엄포에 수거 노예들의 눈빛에 공포가 스쳤다. 아무리 이지를 상실했다고는 해도, 생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 있는 것이다. “잘 했어 6424! 들어가 봐!”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 나는 감독관의 눈을 피해 적당한 길목에서 노예 무리를 이탈했다. 수거품을 뒤져 아이템들을 하나 둘씩 착용한 뒤 필요한 것은 지니고, 버릴 것은 버렸다. 적당한 대로변으로 나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주변을 서성이는 인간들. 엘프나 아인종들, 간혹 악마종으로 보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마계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혹부리의 말은 맞았다. 각 차원에서 들어온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종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 물건을 파는 행상인들도 있었고, 그것을 흥정하는 이들도 보였다. [낙원] 이후, 간만의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이야기가 모이는 곳. 나는 문득 ‘멸살법’의 묘사를 떠올렸다. 「거대한 흉벽으로 둘러 쳐진 시가지. 불균형한 스카이 라인을 만들고 있는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 간혹 증기 기관을 갖춘 운송기들이 대로를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다양한 층위의 문명이 뒤섞인 듯한 도시의 정경. 대부분의 성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무대라곤 해도, 이곳 또한 삶의 터전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장소. 이곳이 바로 [공단]이었다.」 확실히, 묘사 그대로의 정경이었다. 마계의 [공단]을 처음으로 목격한 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름이 ‘마계’인데, 이렇게 평화로운 정경이 말이 되냐고. 여기는 ‘인간’이 모여 살아가던 지구와 너무 흡사하지 않으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멸살법’에 나오는 문장을 꼭 들려주고 싶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건, 인간들의 세계가 그만큼 끔찍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 문장. 나는 모처럼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리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73번째 마계의 [세이스비츠 공단]. 여기서 나는 함께 성운들에 대항하기 위한 인물들을 만나야 했다. 물론 본인들은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겠지만······. [흡수한 일부 설화들이 구성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빨리 이동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설상가상으로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제4의 벽]까지 맥 빠지는 소리를 냈다. 「졸, 려.」 어? 야, 잠깐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일시적으로 침묵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하필 여기서? 한기가 급격하게 전신으로 스며들더니, 화신체의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추방자 패널티]로 인해 화신체의 위상이 불안해지자,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내 존재를 눈치챘다. “추, 추방자다!” 마치 감염원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황급히 내 곁에서 물러서는 사람들. 나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대로변을 벗어났다.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이곳에서, 나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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