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내가 가진 식량은 거의 동났다. 정희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편의점 봉투를 탈탈 털었다.
“맙소사, 그게 다 팔렸어요?”
“네.”
“하, 웃기네 진짜. 다들 눈치만 보더니 그걸 전부······.”
“아뇨, 소외 그룹만 사간 건 아닙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은 소외 그룹의 인원들뿐만이 아니었다.
“김독자 씨,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하시는군요.”
그 중에는 천인호도 있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내가 가진 식량의 절반 이상은 주류 그룹이 가져갔다. 물론, 셈은 정확히 치렀다.
이야기를 들은 정희원이 노발대발했다.
“잠깐만요. 그럼 결국 주류 그룹이 다시 식량을 독점하게 됐단 얘기잖아요?”
“그런 셈이죠.”
“아니, 그럼 어떡해요! 사람들 사이의 거래를 촉진시켜서 주류 그룹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거 아니었어요?”
예상 밖의 통찰력이군.
나는 조금 감탄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 의도였어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길 바랐죠.”
“그런 거면 주류 그룹한테 식량을 팔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상황이 변하는 게 없는데!”
“변했죠. 저한테 코인이 생겼잖아요.”
“네?”
그것도 무려 1450코인이 생겼다.
하룻밤 장사치고 아주 짭짤한 소득이다.
“아니······ 독자 씬 대체 뭔 생각인 거예요? 상아 씨, 우리 이 사람 믿어도 되는 거예요?”
갑자기 자신에게 타깃이 돌아오자 유상아는 잠시 움찔 하더니, 이내 밝게 웃었다.
“전 믿어요.”
부담스럽구만 그거.
“독자 씨, 그래도 본인 먹을 식량 정도는 남겨 놓으신 거죠?”
“아뇨, 다 팔았는데요.”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그때, 누군가가 내 뺨을 쿡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막대 과자가 그곳에 있었다.
“응? 나 먹으라고?”
끄덕끄덕하고 귀엽게 움직이는 머리. 나는 웃으며 과자를 받아 이길영의 입속에 도로 넣어 주었다.
“됐어, 너 먹어. 아,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말씀 드리는 건데······ 여러분, 각자 어제 구입하신 식량들 남으셨죠?”
“예, 남았습니다.”
“저도 조금 남았어요.”
“왜요, 도로 사 가시게요? 난 비싸게 팔 건데.”
정희원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비스킷을 흔들었다.
“아뇨, 그거 지금 다 먹어두시라고요.”
“네?”
“오늘이 지나기 전에 모두 먹어두세요. 꼭 그러셔야 합니다.”
나는 반복해서 강조했다.
“아니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
“왜요? ······ 아니, 잠깐만. 상아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저 사람 말을 듣는 건데?”
“독자 씨가 저렇게 말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니까요.”
벌써 하나 남은 비스킷 봉투를 뜯은 유상아가 생긋 웃었다.
이현성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지만 일단 식량을 뜯었고, 이길영은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벌써 다 먹어치운 뒤였다. 말을 잘 듣는 아이다.
“아, 찝찝한데······ 난 이거 하나만 남겨둘래요.”
“말리진 않겠습니다.”
정희원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후회는 자기 몫이니까.
그리고 점심 무렵이 되어, 주류 그룹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플랫폼의 중앙에 사람들을 모은 천인호가 말했다.
“오늘부턴 식량 배급량을 제한하겠습니다. 배분은 1인당 비스킷 세 조각입니다. 그리고―”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뭐? 비스킷 세 조각?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지금!”
“맞아! 정찰대 새끼들은 배급량보다 더 많이 처먹잖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튀어 나오는 욕설에도 천인호는 차분히 웃을 뿐이었다.
“말씀들 잘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정찰대는 더 많은 배급을 받습니다. 그러니 식량을 얻고 싶다면 정찰대에 지원하시기 바랍니다.”
“정찰대에 지원해서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잖아! 늘 돌아오는 건 철두파 놈들뿐이고!”
“지금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야?”
과격한 시민들의 반응에도, 천인호는 그저 태연했다.
“그 사람들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바깥은 몹시 위험하거든요. 불만이시면 직접 식량을 구해 오시는 건 어떨까요?”
“그, 그건······.”
사람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지금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천인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물론 정찰대가 되지 않으셔도 식량을 얻을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거래입니다. 무엇이든 저희가 판단하기에 가치가 있는 거라면 식량과 교환해드리겠습니다. 사람마다 줄 수 있는 건 모두 다르니까요. 그렇죠?”
천인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대개는 어제 우리에게 찾아와 식량을 사 간 사람들이었다.
[등장인물 ‘천인호’가 스킬 ‘선동 Lv.2’을 발동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까진 안 하려고 했습니다만, 어제 저기 있는 김독자 씨가 좋은 걸 알려주셨죠. 맞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식량을 가지고 싶으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죠.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하하, 좋은 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독자 씨.”
······이것 봐라?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대개는 원망 섞인 눈빛이었다.
“저 자식 때문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멍청이가 되었나 싶었더니, 역시나 천인호는 [선동]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웬만한 그룹 리더면 다 가지고 있는 스킬이긴 하니까.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또 나한테 적의를 돌릴 줄이야······.
나는 방수포를 친 아지트로 돌아가는 천인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다. 충무로나, 서울역에 있을 그놈들에 비하면 말이지.
벌써부터 방수포 앞쪽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흥정을 시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코, 코인으로 사겠습니다. 얼마면 됩니까?”
“200코인.”
“예? 하지만 그렇게 많은 코인은 없는데요.”
“그럼 꺼지던가.”
200코인에 식량 하나라. 도깨비도 기절할 법한 폭리다.
아지트 앞에서 식량을 팔던 철두파 중 하나가 나를 보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은 걸 보니 어제 나한테 당한 놈들 중 하나인 듯했다.
“어제 내가 고맙다고 말했던가요?”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정희원이 가까이 서 있었다.
“들었던 것 같네요.”
“그래도 한 번 더 고맙다고 해둘게요.”
뭔가 싶었는데, 정희원의 눈이 절름발이 철두파에게 꽂혀 있었다.
“저기 다리 저는 새끼, 어제 나 강간하려고 했던 놈이거든요.”
“······그랬군요.”
“저 새낀 직접 내가 죽여 버릴 거니까 건드리지 마요. 알겠죠?”
눈빛에 이글거리는 살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면 배후성의 선택을 받았을 법도 한데, 특성이 늦게 개화한 편인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스킬을 사용하고서 잠깐 걱정이 되었다.
이 여자도 내가 살리지 않았으면 죽을 운명이었을 텐데, 등장인물 등록이 되어 있으려나?
<인물 정보>
이름 : 정희원
나이 : 27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3개의 성좌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웅크린 자 (일반)
전용 스킬 : [귀살 Lv.1], [검도 Lv.1]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4], [근력Lv.4], [민첩Lv.7], [마력Lv.4]
종합 평가 :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웅크린 자’입니다. 아직 특성이 개화하지 않아 특성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인물 정보는 떠올랐다.
유상아나 이길영, 한명오와는 다른 경우라 이거지.
원래 쓰임새가 있었는데 버려진 인물일까?
그나저나, 상당히 흥미로운 전용 특성이다.
‘웅크린 자.’
이름만 보면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저 특성은 멸살법 안에서 몇 안 되는 ‘초진화형 특성’이다. ‘웅크린 자’는 일반 특성이지만 어떤 계기를 맞이하느냐에 따라 ‘희귀’는 물론이고 ‘전설’급 특성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멸살법 최강의 100인중 하나인 ‘광기의 도살자’도 결국 ‘웅크린 자’에서 진화했다.
정희원.
그냥 지나가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동료로 삼는 걸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전용 스킬에 있는 [귀살]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 여자는 잘만 키우면 강력한 히트맨이 될 테니까.
“근데 독자 씨는 굉장히 침착하시네요.”
침착하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평소에 소설에서 이런 상황을 많이 봐서 익숙하거든요.”
“네? 그게 말이 돼요? ······잠깐만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플랫폼 아래로 내려갔다. 정희원이 함께 내려오려는 눈치라, 나는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정희원은 가볍게 플랫폼 아래로 착지했다.
나는 철길을 걸어 약수역으로 향하는 터널 길목을 살폈다. 짙은 어둠으로 둘러 싸여 있어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독한 냄새가 났다. 피비린내였다.
“저기로 가려는 건 아니죠?”
정희원이 물었다.
“저쪽으로 간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깡패든 뭐든. 저 안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죽어요.”
그녀의 말은 틀렸다.
모두가 죽은 건 아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이미 저 길을 뚫고 다음 역으로 나아갔을 테니까.
우리는 다시 플랫폼 위쪽으로 올라왔다.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식량을 거래하기 위한 사람들의 줄은 여전히 길었다.
주류 그룹에게 항의하던 몇몇 사람들은 두들겨 맞았고, 일부는 비정상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식량을 구매했다.
정희원이 분노를 터뜨린 것은 소외 그룹의 젊은 여자 몇 명이 몰래 방수포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직후였다.
“아, 짜증나네. 방금 봤어요?”
“봤습니다.”
천인호는 말했다. 식량 교환은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그런데 방금 들어간 여자들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이를 갈던 정희원이 벌떡 일어섰다.
“저런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어쩌시게요?”
“말려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말해줘야죠!”
“그러면 저 여자들이 굶을 텐데요.”
“그럼 저 짓거리를 그냥 보고 있으란 얘기에요?”
“네, 이번에는 그냥 보고 계시는 게 좋을 듯한데요.”
“지금 그거 무슨 뜻이에요?”
나는 경멸적인 정희원의 시선을 묵묵히 받았다.
“정희원 씨, 당장 저 여자들을 말린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여자들을 말려도, 밤이 되면 비슷한 일은 또 벌어질 거예요.”
“······그러면 또 막아야죠. 또 막고, 또 막아야죠.”
“그럼 사람들의 식량은요? 방금 들어간 사람 중에는 아이의 어머니도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굶어 죽게 된다면, 정희원 씨가 그 아이의 죽음까지 책임지실 겁니까?”
정희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표정을 숨기려는 듯,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대체······.”
나는 고개를 떨어트리는 정희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걸로 정희원이 돌발 행동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귀살]을 가진 [웅크린 자].
지금의 정희원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무분별한 살인귀로 진화할 수도 있다.
“정희원 씨, 이 문제의 핵심은 결국 ‘식량’입니다. 그렇죠?”
“······그렇죠.”
“그럼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되겠군요.”
“네?······.”
나는 대답 대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치지지직!
그래, 나타났군.
허공이 갈라지며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이 모든 비극을 개막한 인류의 악몽.
[저어······ 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그간들 많이 무료하셨죠?]
도깨비.
“으, 으와아악!”
아직 도깨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깨비의 등장만으로 패닉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녀석들이 나타나고부터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으니까.
저 강단 넘치는 정희원마저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였으니 이만하면 말 다했지.
그건 그렇고, 비형이 아니군.
본래 이 근방의 채널을 담당하는 도깨비는 비형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생긴 것부터가 다르다. 새하얀 솜털이 돋은 비형과는 다르게, 놈의 솜털은 시커먼 흑색이다.
[워, 원래 이 채널 담당하던 친구가 징계를 먹었거든요······. 그, 그래서 이번 시나리오는 제가 담당하게 됐어요.]
도깨비치고 소심한 말투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 그런데 여러분. 괴, 굉장히 평화로워 보이시네요? 비, 비형 녀석 나한텐 잘난 척 하더니 시나리오 난이도를 이 따위로······.]
“무,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야! 용건부터 말해!”
[히, 히익. 화내지 마세요. 여러분. 아, 아무튼 저는 여러분들 위해서 온 건데에······.]
“우릴 위해서?”
“그, 그럼 먹을 걸 줘!”
[머, 먹을 거요? 아하······ 먹을 거라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깨비의 손이 움직였다.
[시나리오 패널티가 추가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식량 비축이 제한됩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비축 식량이 사라집니다.]
“어, 어어! 뭐야!”
곳곳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먹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주류 그룹이고 소외 그룹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장소에서 ‘식량’이라 부를 법한 것들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헤, 헤헤. 근데 여러분. 그럼 안돼요. 시, 시나리오를 시작했으면 시나리오를 깰 생각을 해야죠.]
파스슥!
통조림, 과자, 칼로리바 등등.
사람들이 모아 두었던 비상식량들이 도깨비의 손짓 한 번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눈앞에서 음식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황망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머, 먹을 거나 밝히고 있으면 되나요? 하여간 지, 지구 쓰레기들······.]
갑자기 변하는 녀석의 말투.
어쩐지 놈의 이름이 기억날 것 같았다.
원작 설정에 따르면 저런 도깨비가 하나 있었지. 말투는 소심하지만, 하는 짓은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도깨비가.
멀리서 천인호가 당혹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그럼 이제부터 재미있게 해 주세요, 여러분. 헤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시나리오 패널티가 추가되었습니다.]
[‘생존비’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매일 밤 자정, 100코인씩의 ‘생존비’를 자동 수납합니다. ‘생존비’를 납부하지 못할 시, 당신은 사망합니다.]
[‘생존비’ 패널티는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클리어 될 때까지 유지됩니다.]
나는 떠오른 메시지들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야 좀 ‘멸살법’ 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