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187화 일행들은 여전히 황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들. 벽에 처박힌 유중혁은 아직 정신을 못차린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전당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광택이 도는 석벽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어깨를 뚫고 돋아난 검은 날개, 머리통 위로 작게 솟아난 뿔. 피부 위에 낙인처럼 찍힌 마기의 흔적. 몸은 평소보다 서너 배 정도 커졌고, 전신의 근육은 힘을 주지 않아도 크게 팽창해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요! 왜 독자 씨가 마왕이······!” “설명도 없이 대체 뭐야 이게! 우리보고 어쩌란 건데!” 유상아와 이지혜가 외쳤다. 정희원, 이현성, 이길영과 신유승······ 심지어는 공필두나 조영란까지.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저를 사냥해야 합니다.” [‘73번째 마왕’의 첫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공략 제한시간은 30분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빨리 시작하세요.” 내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묵묵히 공격을 얻어 맞는다고 해도, 정해진 시간 안에 일행들이 내 체력을 다 깎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의 맷집. 정희원과 이현성이 절박한 얼굴로 나를 보며 외쳤다. “난 독자 씨랑 싸우기 싫다고요!” “그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나라도, 그들과 같은 상황이 되면 망설일테니까. 나는 일부러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왜들 그렇게 심각한지 모르겠군요. 다들 제가 누군지 잊으셨어요? 저 김독자 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요.” 내 말에, 순진한 이현성의 표정이 흔들렸다. “······혹시 이번에도 다시 살아나시는 겁니까?” “네.” “하지만 아까 듣기로는······!” “유중혁 도발하려고 일부러 해 본 소리에요.” 딱히 [선동]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일행들의 얼굴에 갈등이 맺히고 있었다. 아마 나에 대한 신뢰와, 나를 공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일행들의 내부에서 부딪치고 있을 것이다. “믿으세요. 이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일행들은 결국 나를 공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 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곳의 모두가 죽는다. 한수영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신호를 보냈다. ‘한수영.’ 내 입모양을 읽은 한수영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너 밖에 없다. 네가 역할을 맡아 줘야해.’ 나도, 한수영도 알고 있다. 일행들은 어떤 화신들보다 강인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결단력이 없다. 반면 한수영은, 이곳의 누구보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현실적이다. “······항상 그런 식이지, 김독자.” 한수영이 이를 갈 듯 말했다. “나라고 감정이 없는 괴물인 줄 알아?” 한수영은 나를 잠시 바라보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마치, 그녀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리라는 것처럼. 숨을 가볍게 들이켠 한수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모두 정신 차려. 여기서 다들 뒈지고 싶어?” 나는 웃었다. 그래, 잘 한다. “우린 김독자를 죽여야 해.” 그래야 한수영이지. “싫어! 싫어요! 형!” 한수영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길영의 뒷덜미를 낚아 챘다. “멍청한 꼬맹아. 잘 들어.” 이길영이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 쳤다. 한수영은 그런 이길영의 멱살을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징징 거리지 마. 김독자 대신 네가 죽을 거냐?” “아, 아으으······.” “너희들 모두 마찬 가지야. 본인이 희생할 것도 아니면서, 위선 떨지들 말라고. 대신 죽어준다고 하면, ‘아이구 고맙습니다’하고 칼이나 휘두르란 말이야!” 슈우우우우! 수십 개로 늘어난 한수영의 분신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김독자가 살아나든 말든,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야. 앞으로 30분 안에 저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 너희가 알아야 할 건 그게 전부야.” 한수영의 분신들이 붉어진 눈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한수영이 내게 단도를 휘둘렀다. 빗발치는 공격들은 내 육체에 거의 상흔을 입히지 못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서 내 시선을 받은 유상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독자 씨.” 뭔가 결심을 했는지, 그녀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려 있었다. 나는 한수영의 공격을 맞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독자 씨가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뭔가 복안이 있으신 거죠? 그래서,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정말이죠?” 유상아는 울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거겠죠? 늘 그랬듯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다행이라면서. 유상아는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스가각! 단도를 뽑아든 유상아가, 전투에 참전했다. 한수영이 입술을 실룩였다. “······주저 앉아서 징징 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조용히 하세요.” 한수영과 유상아가 휘두른 단도가, 내 어깨와 등에 조그마한 생채기를 내고 지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 둘만으로는 타격력이 부족했다. 벌써 남은 시간은 25분. 포메이션을 실행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나는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이현성 씨. 일행들을 죽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 “이제 다시는 탄피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면서요?” “도, 독자 씨······.” “탄피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현성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떨리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깊이 침음합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뭔가를 결심한 이현성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강철화]가 발동한 이현성의 육체가 내게 돌진했다. 콰아아앙! 단단한 육체가 내 전신에 강한 충격을 입히며 부딪쳤다. 시야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가까이 들러 붙어 [태산 부수기]를 퍼붓는 이현성의 모습은, 나를 공격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곰 같은 사나이가 이토록 울부짖는 광경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이어서 들려온 것은 마력 포탑의 발포음이었다. 두다다다다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나는 가만히 웃었다. 역시, 이래서 당신을 미워할 수 없다니까.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린 공필두가 [무장 성채]에서 포탑을 퍼붓고 있었다. 물론, 나라고 그저 맞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당신의 육체를 지배합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육체는 마왕의 페이즈를 발동하고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패턴화된 공격들이었기 때문에, 일행들은 그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지금부터 두 번째 페이즈니까.” ‘73번째 마왕’은 두 번째 페이즈부터 전체 공격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전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특수한 지원이 필요했다. “조영란 씨.” 내 시선을 받은 조영란이 전우치의 힘을 빌어 [기문진법]을 발동했다. 고오오오오오! 마치 환풍기를 통해 공기가 배출되듯, 내가 발출한 마기가 그녀가 만든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왕의 마기를 흘려내는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입술에서 핏줄기를 흘리면서도, 조영란은 내게 물었다. “수경 씨가 슬퍼하실 거다.”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마기의 힘이 수그러들자, 일행들이 재차 내게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격력은 부족했다. 나는 아직까지 참전하지 않은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입술을 꾹 깨문 이지혜가, 결국 칼을 뽑아들었다. “아저씨, 나중에 복수하지마.” “안 해.” 내 말에 이지혜는 힘없이 웃었다. “······어차피 내 공격, 약하니까 별로 안 아플거야. 내 성좌는 겨우 위인급이잖아.” “충무공의 가능성은 그 정도가 아냐. 곧 알게 될거다 지혜야.” [칼의 노래]를 발동한 이지혜의 공격이 내 약점을 노리며 움직였다. 서서히 공격의 중첩이 이루어지자, 조금씩이나마 살갗에 따끔따끔한 느낌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견제는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여기에 결정타를 퍼부을 사람들이 필요하다. “정희원 씨.” 기다렸다는 듯, 정희원이 서서히 칼을 뽑아들었다. “예전에······ 나한테 물었던 거 기억해요?” “어떤 거요?” “나한테, 동료가 되어달라고 말했던 거.” 기억한다. 극장 던전에서, 나는 정희원에게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지금 독자 씨는 그 ‘동료’한테 이런 걸 시키는 거고요.”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동료야.” 칼을 바로 세운 정희원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동료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게, 무슨 동료냐고!” [귀살]을 발동한 정희원이 내 몸을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은 거친 파찰음만 남길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니까, 제 목숨을 맡긴 겁니다.” “······.” “희원 씨, 제대로 해야 합니다.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고 힘껏 찌르세요.” “독자 씨는 진짜······.” 내가 키운 검, 정희원. 그 정희원의 몸에서, [지옥염화]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정희원이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진짜 힘은, [지옥염화]의 불꽃에 ‘멸악의 심판자’의 힘이 더해졌을 때 최고조의 효율을 발휘한다. 마침 ‘마왕’이 된 김독자는, 그 힘의 타깃이 되기에 더할나위 없이 적합한 개체였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대다수가 스킬 발동에 동의합니다.] [단 하나의 성좌가 스킬 발동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당황한 정희원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받아 넘기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심판의 시간’의 발동에 반대했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막습니다.] “······우리엘.” 츠츠츠츠츳! 내가 부른 진명에 응답하듯,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부탁합니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에 동의해주세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세차게 고개를 휘젓습니다.] “하지 않으면, 당신의 화신이 죽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런 짓을 하면 네가 죽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좌들이 당신과 같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우리엘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엘, 아시잖아요. 이건 그런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는 마치 도깨비처럼 말했다. “누군가가 죽는 건, 그동안 많이 봐왔지 않습니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절망합니다.] 메시지만으로도 훤히 그려지는 듯 하다. 연회에서 봤던 그 작고 예쁜 우리엘의 모습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울며 도리질을 반복합니다.] 울면서 도리질을 반복하는, 그 조그만 얼굴. 이 얼마나, ‘악마 같은’이라는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사인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그래야만 이 이야기는 완성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망연히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리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절대선 계통의 모든 성좌들이 ‘심판의 시간’ 발동에 찬성하였습니다.] 마침내, 정희원의 몸에서 핏빛 오오라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난 이 스킬 이름이 진짜 싫어.” 정희원의 전신에서 타오르는 [심판의 시간]의 오오라가, 검극에 깃든 [지옥염화]의 힘과 어우러지면서 어마어마한 마력파장을 만들어 냈다.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는 힘. 고고한 심판의 불길이, 그녀의 검극을 떠나 마왕의 가슴을 베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