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188화 쏟아지는 불길을 받아내며, 전신으로 조금씩 고통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프다. 정말로, 아프다. 고열에 피부가 갈라졌고, 안구가 익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을 삼키며 나를 향해 난도질을 반복하는 정희원. 악을 멸하는 불길이 상처를 헤집고 그 안의 살을 모조리 태우고 있었다.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졸도해버렸을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내 몸은 부서지지 않았다. 경악한 정희원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몸이에요?” “······아무래도 공격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체력이 깎이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은 시간 안에 나를 죽이기엔 무리였다. 정희원이 나서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어쩌면 내가 ‘설화급’ 판정을 받은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당신의 고통에 즐거워합니다.] [남은 공략 시간은 10분입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축배를 듭니다.] 심지어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당에 커다란 충격파가 퍼져 나가더니, 내 몸이 또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73번째 마왕’이 세 번째 페이즈로 진입합니다.] [당신의 육체가 더 단단해집니다.] 어차피 세 번째 페이즈까지 올 것은 어느 정도 감안했던 일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외쳤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순서 기억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이 능숙하게 포메이션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발출하는 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까닭인지, 조영란의 [기문진법]이 조금씩 무너지는 게 보였다. 쩌저저적. 결국 조영란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예상보다 이 시기가 빨리 와버렸다. 마기가 전당 전체를 메우기 시작하면, 디버프에 걸린 일행들은 더욱 약해질 것이다. 이제는 빌리고 싶지 않은 손이라도 빌려야만 한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내 메시지를 받은 신유승이 파들파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내 화신인 신유승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결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저씨, 안 돼요. 제발.’ 나는 그런 신유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좌와 화신의 관계란 이렇다. 백 마디의 말을 전하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깊이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전달된 그 감정의 폭력에, 결국 신유승이 울음을 터트렸다. ‘알겠어요.’ 그 순간 아이의 작은 심장에서 고통스럽게 울려퍼지는 소리를, 성좌인 나는 누구보다 크게 들을 수 있었다. 신유승은 곁에 있던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일어섰다. “길영아. 가자. 우리가 해야 해.” 신유승의 눈동자가 노랗게 빛났다. [비스트 마스터]의 특성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전당 전체에 커다란 진동이 울리더니, 이윽고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틈을 열고 거대한 괴수의 주둥이가 나타났다. 크롸라라라―! 키메라 드래곤. 훗날 멸망종(滅亡種)이 될 괴수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전당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본 키메라 드래곤은, 공격하는 대신 주춤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2급 괴수종, ‘키메라 드래곤’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2급 괴수종, ‘키메라 드래곤’이 ‘73번째 마왕’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신유승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직 2급 괴수종을 혼자서 컨트롤하기는 무리겠지. 나는 이길영을 보며 말했다. “길영아. 이번만큼은 게임이라고 생각해도 돼.” 나를 올려다보는 이길영. 아이의 조그만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언젠가 어둠 속을 걸으며 나눴던 말들을 떠올렸다. 금호역에서 [어둠 자락]을 함께 거닐며 나눴던 대화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순간들이, 소중한 편린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형 죽어도 다시 살아나. 약속할게.” 그 이야기들이, 나를 죽이는 힘이 된다. “······으아아아아아!” 이길영이, 울부짖으며 [길들이기] 스킬을 발동했다. [남은 공략 시간은 9분입니다.] 크롸라라라라! 두 아이의 [길들이기]에 제어당한 키메라 드래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슈우우우우! 키메라 드래곤의 거대한 들숨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급기야 나의 마기마저 빨아들인 키메라 드래곤이, 내 쪽으로 거대한 주둥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새카맣게 몰린 마력. 흉흉하게 돋아난 송곳니 사이로 거대한 빛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괴수종의 정점이라 불리는 용종(龍種)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브레스(breath)였다. 콰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마력의 숨결을 받으며, 나의 몸은 다시 한번 찢겨 나간다. 정신이 모조리 망가져 버릴 것 같은 충격. 하지만 그만한 충격을 받고도, 여전히 내 몸뚱이는 살아있었다. 몸뚱이 곳곳이 찢겨 나간 비참한 몰골에, 일행들이 침음했다. 하지만 멈춰서는 안 된다. 나는 짓이겨진 입술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계속······ 하세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희생을 눈치챕니다.] 츠츳, 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의지에 경악합니다.] 후욱후욱 숨을 내쉬는 키메라 드래곤은 브레스의 사용으로 지쳐버렸는지 거대한 몸을 바닥에 뉘었다. 다행히 키메라 드래곤이 내가 발출한 마기를 모두 빨아들인 덕에 최악은 면했지만, 일행들의 공격력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젠장, 마력이 부족해요!” [남은 공략 시간은 5분입니다.] ‘73번째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내 준비는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다. “김독자.” 석벽을 헤치고 일어난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곁에 이설화가 탈진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유중혁을 치료한 모양이었다. 마왕이 된 나를 확인한 녀석의 눈빛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게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한 번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어. 잘 알잖아?” 유중혁이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죽는 건 나여야 했다.” 다행히, 유중혁은 유중혁이었다. 녀석은 나를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다. [진천패도]를 꺼내든 유중혁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스각! 콰가각! 놈의 공격 하나하나가 적중될 때마다, 체력이 깎이는 게 느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한 번의 칼질이 이어질 때마다 녀석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은 공략 시간은 4분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절망을 음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슬슬 끝내자 유중혁. ‘그걸’ 꺼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장난치지 마. 네가 일부러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어.” “······이걸 쓰면 너는 부활할 수 없다.” “그러니까 쓰라는 거야. 마왕인 채로 또 살아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 “시나리오 망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그만 끝을 생각해야지.” 유중혁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거냐?」 그렇게 묻는 눈빛에, 나는 그저 웃어주었다. 망설이던 유중혁이 결국 품속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천총운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그것은 언젠가 [피스 랜드]에서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해치우고 얻은 검이었다. 침통한 목소리로, 유중혁이 말했다. “사용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도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절망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깊이 탄식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숨을 죽입니다.] 설화로 얻은 힘은, 결국 설화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나의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은 ‘야마타노오로치’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 이 힘은,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인 신살검(神殺劍)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마 저 검으로 나를 베게 되면, 나는 남은 목숨들을 통째로 잃게 될 것이다. 유중혁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걸로도 확신은 없다. [거신화]의 지속시간이 다 되어서, 지금의 공격력으론 너를 벨 자신이 없으니까.” “그건 걱정마.” 나를 향해 맹렬히 고개를 젓는 신유승이 보인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신의 화신에게 ‘성흔’을 하사했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내가 내린 성흔이 신유승에게 깃들었다. [성흔, ‘희생의지 Lv.1’가 발동합니다!] 강제로 발동한 성흔이, 신유승의 몸에서 환한 빛살을 내뿜었다. [성흔의 주인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숨의 절박함에 비례해 해당 파티의 공격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방금 전까지 탈진해 있던 일행들의 눈빛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려 ‘희생의지’라니. 나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성흔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걸로 이제 내 죽음은 확정이라는 것이겠지. “다들 고마웠습니다.” [남은 공략 시간은 3분입니다.]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현성이, 정희원이, 신유승이. 이길영이. 유상아가, 공필두가, 이지혜가······. 울거나, 절규하거나, 깊은 분노를 참은 채. 모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야가 조금씩 이지러지며, 이내 그 인물들은 모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것이다.」 잊고 있었다. 예언이란 모두 비유라는 것을. 이 <스타 스트림>에서 사람은 곧 이야기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들의 시선 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내 부모였고, 내 친구였으며, 내 연인이었던 이야기. [남은 공략 시간은 2분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멸살법’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멸살법’보다도 더 멋진 이야기였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였다. 푸슈슈슛! 내 심장을 꿰뚫은 유중혁의 검을 보며, 나는 웃었다. [당신의 운명이 실현됩니다.] 서서히 주저앉는 내 몸을, 유중혁이 붙들었다. “김독자.” “정말 멋진 이야기잖아. 안 그래?” 유중혁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그저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천총운검’의 효과로 남은 여분의 목숨이 모두 소멸합니다.] [당신은 이제 부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의 중심에 성운의 무리들이 보였다. <베다>. <올림포스>. <파피루스>······. 나는, 네놈들이 한 짓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이 깜빡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마치 내 의지에 감응하듯,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하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런 녀석들이 있기에, 나는 성좌들을 싫어하면서도 차마 이야기를 증오할 수는 없다. “다시 만나자, 유중혁.” 마왕의 힘이 소멸함과 동시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됩니다.] [서울 돔이 해방되었습니다.] 등 뒤의 허공에 작은 블랙홀 같은 것이 나타났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조금씩 빨려들기 시작했다. 파스스슷. 다리가, 몸통이, 팔이······ 가루로 흩어지듯, 서서히 빨려들어 간다. “김독자! 안 된다! 김독자!” 마지막 순간, 녀석이 내 멱살을 꽉 잡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슈우우우우! 시야 전체가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공허 속으로 빨려 나갔다. 나를 보는 성좌들의 시선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채널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멀어지는 밤하늘에서, 하나의 별이 간절하게 나를 향해 깜빡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 이제 됐으니 그만해도 돼.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마워. 하늘의 별들이 하나둘씩 꺼지고, 마침내 화신 김독자의 이야기도 저물어 간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서 ‘악인’ 표식을 철회하였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완전히 소멸하였습니다.] [당신은 시나리오에 실패했습니다.] [당신은 시나리오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수식언을 공표합니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스타 스트림>이 고요히 내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수식언은 ‘구원의 마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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