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186화
―그만둬! 멈추라고 개자식아!
그 시각, 관리국의 서울 지부에서도 홀로그램 패널을 통해 메인 시나리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맹렬하게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을 보며, 몇몇 도깨비들이 탄식을 토했다.
그 순간 도깨비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펼쳐질 광경은, 서울 돔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래 역대급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걸.
상징체로 현장 상황을 지켜보던 비형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유중혁! 이 빌어먹을 ■■■ 새끼야······! 제발!
―모두 막아요! 유중혁 씨를 막아!
몇몇 도깨비들이 필터링 섞인 대사들에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비형은 그렇지 않았다. 필터링이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형은 이제 저들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말들은, 온전히 쓰여있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아마 줄곧 채널을 보고 있었던 성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메시지가 뜰 리 없으니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비극적인 상황에 절망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털을 뭉텅이로 쥐어뜯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심란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침묵한 채 상황을 지켜봅니다.]
.
.
[일부 성좌들이 <성운>들의 만행에 크게 분개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에 완전히 몰입합니다.]
비형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왕으로 변해가는 유중혁과, 그것을 막으려는 김독자······.
그 광경을 보며, 비형은 오래 전 자신이 초보 도깨비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사건들에 일희일비하던 시절.
모든 이야기가 사랑스럽고,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자신의 채널에서 싸우는 화신에게 몰입했던, 하염없이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분······.
자신의 안에서 꿈틀대는 감정을 외면하려는 듯, 비형은 생각했다.
‘저건 그냥 이야기야.’
아무리 비극적이고, 아무리 구슬퍼도, 결국 이야기는 이야기다.
김독자와 유중혁의 이야기 또한 <스타 스트림>에서 무수히 반복된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미 본 것들이고, 감동이라는 것은 오래전에 잊었다.
그가 아는 것은 과장되고 만성화된, 통쾌감을 자극하는 연출들뿐이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비형은 품 속의 알을 감싸쥔 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기랄! 김독자. 어떻게든 해봐라. 늘 그랬듯, 예상 밖의 전개로 모두를 엿먹여 보라고!’
늘 그랬듯, 이번에도 김독자에게 새로운 수가 있기를.
바보 같게도 도깨비인 그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정말 비극적인 전개로 가는군. 그렇지 않은가?”
곁에 있던 서울 지부장 바람이 말했다.
비형은 그를 슬며시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반쪽 짜리 성좌에겐 너무 가혹한 비극이군요.”
성운들은 이번 개입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행사하면, 단순히 하위 성좌들을 희생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각 성좌들은 성운을 통해 개연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번 사태로 인해 엄청난 개연성의 손실을 입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성운들간의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김독자로 인한 손실은 그들의 전장에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바람이 말했다.
“김독자의 죽음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말했다시피, ‘모든 것의 마지막’과 관련된 문제에 한해서 그들은 매우 민감해. 그리고 그들은 김독자의 가능성을 매우 높이 사고 있네.”
“······그렇다면 상황이 안타깝게 됐군요.”
“흐음? 왜지?”
“김독자는 죽지 않을 테니까요.”
비형은 자신이 왜 그런 호언을 하고 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마왕이 된다 한들,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비형은 다시 화면을 돌아보았다.
아마 성운들의 계획은, 유중혁을 마왕으로 만들어 김독자를 죽이는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그것은 ‘유중혁’이라는 인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성운들의 오만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화면 속에서 소리치는 유중혁을 보며, 비형은 끓는 비감을 삼켰다.
결국, 유중혁은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는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성좌들의 [운명]은, 이번에도 김독자를 비껴 나갈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고, 또 살아남다 보면 언젠가는······.
바람이 웃었다.
“자네는 아직 [운명]을 잘 모르는군.”
“······예?”
“성운들이 정말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들이 김독자의 미래는 모른다 해도, 김독자의 성격에 대해서도 분석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 건가? 그렇다면 자넨 [운명]의 무게를 얕보고 있는 걸세.”
“그게 무슨······.”
비형의 말은 다음 순간 화면에서 터져 나온 섬광과 함께 묻혔다.
[<스타 스트림>이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의 ‘격’을 발표하였습니다.]
홀로그램 패널 전체를 물들이는 황홀한 빛에, 상급 도깨비 바람도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보게. 이제 운명이 실현될 걸세.”
*
“독자 씨! 뭐해요! 정신 차려요!”
마기에 물들어 가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멍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혹시, 내가 ‘회귀한 후의 세계’가 걱정되는 건가?
―너는 두려운 것이겠지. 내가 사라지는 순간, 이 세계도 없어질까 봐. 그렇지 않은가?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귓속에 들어간 것처럼 왱왱거리는 소리가 감각을 어지럽혔다.
“꺄아아악!”
일행들의 비명소리.
콰콰콰콰쾅!
주변의 폭음들.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유중혁이 남긴 말들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유중혁이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유중혁의 배후성.
‘멸살법’에서 단 한 번도 뭔가에 반응한 적 없었던 그 존재가······ 대답이라는 것을 했다고?
대체 왜?
그것도,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독자 씨!”
모르겠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활성화됩니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3’를 발동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1(+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줄어든 내 몸이 유중혁을 향해 백청의 궤적을 그렸다.
“김독자!”
으르렁거리는 유중혁의 외침.
백청의 검극이 유중혁의 칼날에 닿으며, 가공할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거신화]와 [파천강기]의 콤보에, [전인화]와 [백청강기]의 힘이 맞부딪친다.
쿠아아아앙!
폭발하는 에테르의 폭풍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만약 유중혁의 말이 맞다면, 나는 더 이상 놈의 회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놈이 회귀한다 해도, 이 세계가 남아있다는 게 보장된다면 나는 그저 이 세계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잘 생각해라 김독자.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아.”
과도한 힘의 충돌에 전신의 근육이 삐걱거렸다.
유중혁도 나도 한계치에 달한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까가가가각!
손 끝에 감겨드는 칼날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깨닫는다.
[제4의 벽]에 의해 경감되는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을, 그 어떤 벽도 없이 온전히 받아내고 있을 유중혁.
“아니, 그건 곤란해.”
회귀해도 이 세계는 그대로니까 괜찮다고?
자신이 희생해서, 이 시나리오를 끝내겠다고?
“내가 바라는 ‘결말’에 이런 전개는 없어.”
“아직도 이해를 못한 거냐? 내가 마왕이 되어야만······!”
“마왕이 되는 건 나야.”
“개소리 마라! 그런 짓을 하면 네놈은 반드시 죽는다. 시나리오에서 추방당하고 나면 부활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단 말이다!”
아마 유중혁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녀석과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간극으로도 메울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벽이 있었기에, 나는 오래도록 이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유중혁의 후회를, 절망을, 꿈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나는 그 모든 것을 읽으며 자랐다.
“생각해 봐.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를 누가 보겠냐고.”
머릿속에 몰아치는 무수한 기억들을 느낀다.
모든 삶의 비극들을, 나는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이겨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나를 만들었고.
나는 마침내 이곳에 있다.
“이건 빚을 갚는 거다.”
“······빚? 무슨 소리냐.”
“네가 한 번 나를 구했으니, 나도 널 구해주는 거라고.”
“무슨 헛소리를······!”
유중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동안 아껴뒀던 기술을 사용했다.
단 한순간이지만, 육체의 내구를 모두 소진하고 쓸 수 있는 기술.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지만, 아마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소형화를 해제한다.”
내 말과 동시에, [전인화]의 광휘로 뒤덮인 몸의 크기가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으로는 ‘전인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스킬 패널티가 당신의 육체를 잠식합니다!]
파츠츠츠츳!
[전인화]는 오직 ‘소인’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하지만 [전인화]를 사용한 채 [소형화]를 해제하면 잠깐이지만 원래의 몸으로도 [전인화]의 힘을 쓸 수 있다. 비록 육체가 사경을 헤매게 되지만, [소형화]가 해제된 만큼 [전인화]의 능력은 찰나간 더욱 증폭된다.
“김독······!”
경악한 유중혁의 눈이 부릅 떠진 순간, 전력으로 발출한 [전인화]의 힘이 장내를 덮었다. 눈부신 백청의 에테르가 전당을 휩쓸었고, 그대로 전당의 벽까지 날아간 유중혁이 커다란 울혈을 토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유중혁이 떨어트린 보옥을 주워든 이길영이 보였다.
“길영아. 그거 이리 줘.”
이길영이, 주춤거리며 내게서 물러났다.
“싫어요. 저 다 들었어요. 이걸 주면 형은······.”
이길영이 머뭇거리는 순간, 한수영이 외쳤다.
“멍청아! 김독자한테서 떨어져!”
이미 늦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내가 이길영의 손에서 보옥을 빼앗았다.
“미안, 길영아.”
동시에 [전인화]의 파동이 발출되며, 주변의 일행들이 동시에 내 근처에서 튕겨져 나갔다.
콰아아아아!
[전용 스킬, ‘책갈피’가 강제로 종료됩니다.]
과부하에 걸린 육체.
칠공에서 동시에 피가 터져 나왔다.
나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채 보옥을 꾹 쥐었다.
그러자 보옥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전신을 감싸안기 시작했다.
꽈드드드득.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 이것이 너희가 원했던 것이겠지.
[당신은 ‘73번째 마왕’의 자격 요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보옥이 당신의 잠재력에 놀라워합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독자 씨!”
희미하게 들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를,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가로막았다.
[마왕의 길을 택할 시, 당신은 암흑성 3층의 모든 존재를 말살해야 합니다.]
[시나리오에 실패할 시 당신은 이 시나리오에서 영구히 추방됩니다.]
시나리오 추방.
그것은 단순히 ‘사망’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저 유구한 <스타 스트림>이 주관하는 흐름에서 영원히 쫓겨난다는 것.
도깨비나 성좌의 눈이 닿지 않는, 그 어떤 이야기도 없는 저 지독한 공허 속에서 죽어간다는 것······.
이 <스타 스트림>에서 그 공허를 견뎌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떤 성좌도 ‘시나리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성운 놈들이 바랐던 게 무엇인지.
이 빌어먹을 [운명]이 가리키는 지표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겠다.
“나는 마왕이 되겠다.”
[보옥이 새로운 마왕 후보자를 선택하였습니다.]
[새로운 ‘73번째 마왕’이 선출되었습니다.]
강대한 마기가 전신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마왕’의 힘을 계승하였습니다.]
걸레짝이 된 육신이 엄청난 마기를 흡수하며 순식간에 그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니, 회복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이제껏 내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막대한 에너지.
나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발표합니다.]
[당신의 격은 ‘설화급’입니다.]
.
.
[당신의 ‘성흔’이 개방되었습니다!]
[강렬한 마기가 당신의 별자리를 오염시킵니다.]
[당신은 타락한 성좌가 되었습니다!]
타락한 성좌.
그것은 <스타 스트림>이 마왕(魔王)을 부르는 이름.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맹렬한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새카만 마기가 천천히 걷혀 나가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보는 일행들이 보였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무릎을 꿇은 일행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멀리서 절망한 유중혁의 얼굴도 보였다.
[메인 시나리오, ‘73번째 마왕’이 시작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대수롭잖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들 일어나세요.”
왜냐하면 이 순간을 위해 지난 사흘이 있었으니까.
“마왕을 상대하는 법, 다들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아마 성운들은, 이 모든 게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마침내 [운명]대로, 김독자는 이곳에서 죽게 되었노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놈들이 운명의 시나리오를 이곳으로 점지했듯.
나 역시, 사흘 간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순간만을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서진 천장의 틈새로 희미한 볕이 새어들고 있었다.
나는 눈부신 듯 그 볕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를 시작해 봅시다.”
오늘은, ‘화신 김독자’가 죽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