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184화 “아직도 다음 시나리오가 힘들 거라고 생각해?” “······.” 73번째 마왕은 강하지만,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고 올라간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껏 수행했던 시나리오들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 중이던 일행들이 하나둘 근처로 모였다. “랭킹작은 모두 끝났습니까?” 대표로 대답한 것은 정희원이었다. “모두 10위권 안에 들어갔어요. 사실 지혜랑 필두 씨가 아슬아슬 했는데, 오늘 아침에 자동으로 승급이 되더라고요.” “자동으로요?” 그런 승급이 발생하는 경우는 한 경우 뿐이다. 윗선의 랭커가 사망했을 때. 한수영이 벌써부터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10위권의 랭커가 죽었다? 뭔가 이상한데······ 야, 역시 난 안 가는 편이······. “왔군, 김독자. 저 여자도 데려갈 건가?” 불쑥 나타난 유중혁의 모습에 한수영이 잽싸게 내 뒤로 숨었다. 이 녀석은 아직도 유중혁이 무서운 모양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영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유중혁이 품속에서 [식스맨 카드]를 꺼냈다. [화신 ‘유중혁’이 식스맨 카드를 사용하였습니다.] [화신 ‘한수영’이 시나리오의 특별 참가자로 기용됩니다.] [화신 ‘한수영’이 화신 ‘유중혁’의 팀에 소속되었습니다.] 떠오른 메시지에 한수영이 경악했다. “뭐, 뭐야 이거! 야! 내가 왜 쟤 팀인데!” “자, 슬슬 출발할 거니까 다들 준비하세요.” 내 말에 일행들이 팀별로 모였다. 먼저 모인 쪽은 유중혁의 팀이었다. 차례로 이설화, 이지혜, 이현성, 공필두. 거기다 불평을 늘어 놓는 한수영까지. 원작과 원작이 아닌 것이 기이하게 뒤섞인 광경은 내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오직 ‘멸살법’의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랄까. 이어서 내 팀도 차례로 열을 맞춰 섰다. 정희원, 유상아, 신유승. 그리고 이길영까지. 군기가 잡힌 유중혁의 팀에 비해 이쪽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는 일행들을 한 명씩 정성껏 바라보았다. “······뭘 느끼하게 봐요?” “그냥요. 감회가 새로워서······.” 정희원의 핀잔에도, 나는 가만히 웃었다. 여기까지 잘 따라와준 이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벅차면서도 왜인지 애달픈 마음이 든다. [제4의 벽]과 이야기하고 나서부터, 특히 그 마음이 더 커지는 느낌이다. 이번 시나리오에 더욱 만반의 대비를 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이들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참, 우리 팀도 식스맨 있는 거 아시죠?” 내 말에, 팀원들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쭈뼛거리며 선 인형이 있었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오세요.” 우리가 구한 [식스맨 카드]는 총 두 장. 유중혁 팀에 한수영이 들어갔듯, 우리 팀에도 식스맨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식스우먼이겠지만. “······수경 씨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했다.” “지금은 당신이 같이 가는 편이 더 도움이 돼요.” 전우치의 화신, 조영란이 복잡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특별히 이번 공략대의 일원으로 끼워 넣었다. 전우치의 성흔들은 위급한 상황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수경 씨랑 이야기는 해 봤니?” “조금은요.” [제4의 벽]에서 빠져나온 후유증 때문인지, 어머니는 도저히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4의 벽]을 통해, 나는 어머니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과거 뿐만 아니라, 그녀가 시나리오에 참가한 후 겪었던 일에 대해서도. 원작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와는 달리, 어머니의 싸움은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무리한 대가를 바쳐가며 성좌들의 도움을 얻었고, 환생자 니르바나에게 일부러 잡혀 녀석의 기억을 훔쳤으며, 심지어는 나를 지키기 위해 <성운>과 계약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서도, 나는 어머니를 향해 꺼낼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시나리오가 무사히 끝나면, 우리 모자도 진짜 ‘이야기’를 나눌 날이 찾아올 것이다. 어머니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이번에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고, 눈을 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네 선택을 믿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제4의 벽]을 통해 어머니를 읽은 것처럼, 어머니 또한 나에게서 뭔가를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출발하죠.” 우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지는 <무저갱 평원>의 중심에 위치한 제단. 암흑성 1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제단을 통해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걷는 내내 지루했는지,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성운들이 영 잠잠한 게 거슬리네요.” 실제로 이틀 전부터 성운들의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도한 개연성을 소모한 탓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유상아 쪽을 보며 물었다. “혹시 <올림포스> 쪽이랑 연락 되십니까?” “······사흘 전부터 안돼요.” 지난 번에 듣기로, 현재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분열 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유상아에게 접근한 쪽은 디오니소스와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아웃사이더들. 어쩌면 사흘 전의 사태로 <올림포스> 내부에서도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 표정이 불안했는지, 유상아가 우려섞인 목소리를 냈다. “독자 씨,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유상아 씨는?” “······괜찮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유상아를 바라보았다. 너무 착한 사람이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고 마는 사람. 내 [운명]을 가장 먼저 전해 듣고, 나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유상아라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면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이니까. 첫 번째 시나리오 때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일어선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 지금 내 자리에 다른 누가 있었더라도 유상아는 지금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이겨낼 수 있겠죠? 지금껏 계속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걱정 마세요.” 나는 유상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 안 죽습니다. 아시잖아요.” 제일 먼저 운명을 본 게 유상아였으니, 그녀도 내 운명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을 더 해줘야 안심시킬 수 있을까를 잠시 고민하는데, 앞쪽에 있던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군.” 고대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축물이 눈앞에 있었다. 일행들이 눈에 띄게 경직되는 것이 보여서, 나는 한 사람씩 말을 걸어 주었다. “길영아. 유승아. 아까 연습한 대로 하면 돼. 키메라 드래곤은 내가 신호하기 전엔 절대 부르지 말고. 알겠지?” 마왕 공략전에는 이 아이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아이들이 길들인 키메라 드래곤은, 이번 공략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유상아 씨는 가능한 정희원 씨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세요. 그리고 이번에도 메인 딜러는 정희원 씨입니다. 싸움법은 충분히 숙지하셨겠죠?” “기억하고 있어요.” 준비를 마친 유중혁이 이쪽을 바라보자, 나도 일행들을 끌고 가까이 다가갔다. 곧이어 허리 높이의 제단이 나타났다. 나와 유중혁은 제단 위의 손바닥 마크에 동시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시나리오 도전자를 확인하였습니다.] [시나리오 도전자 : 암흑성 랭킹 1위 유중혁] [시나리오 도전자 : 암흑성 랭킹 2위 김독자] [총 입장 인원 : 12명] [시나리오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우우우우! 눈부신 빛줄기와 함께, 우리의 몸이 다음층으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전송된 곳은, 비좁은 통로였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 진입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10 ― ‘73번째 마왕’이 시작됩니다!] 역시, 원작 그대로의 전개였다. 아마 이 통로를 쭉 따라가면, 우리는 73번째 마왕이 기거하고 있는 전당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들 포메이션 준비해요.” 우리는 자세를 낮춘 채 조심스레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마왕 공략전은 첫 기습으로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그 난이도가 달라진다. 가능한 조용히 접근해 큰 피해를 줄 수만 있다면, 연습한 포메이션을 모두 사용하지 않아도 공략을 무난히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꺼림칙한 감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쯤 오면 마왕의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시나리오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형, 이건······?” 놀란 이길영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자, 나는 입술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일행들도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독자 씨, 이거 이야기랑 뭔가 다른······.” “여, 여기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것은 선두에서 길을 찾던 이현성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 이현성 근처로 모였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시체들이 있었다. 유중혁이 시체에 손을 대는 순간, 강력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개연성 폭풍의 흔적이군.” 뭔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후에도 스파크가 남아 있을 정도라면 이들의 배후성 또한 어지간히 무리를 한 듯했다. 아마 화신 동조를 통해 큰 힘을 끌어다 쓴 것 같은데, 이 정도 흔적이라면 배후성 쪽도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문제는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냐는 것인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베다>와 <파피루스>의 단말 화신들이다.” “뭐?” “[암흑성]을 돌아다니다 만난 적이 있다. 나한테 접촉해왔던 녀석들이 틀림없어.” “······이 녀석들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성운들의 단말이라면 랭킹은 충분했을 테지만, 시나리오 참여권이 없었을 텐데.” “[식스맨 카드]가 또 있었던 모양이군.” 그러자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가 해소되었다. 이지혜와 공필두의 랭킹이 갑자기 오른 것은, 이곳에서 이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식스맨 카드]를 사용하면 시나리오 도전 파티가 없어도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도전자가 없이는 설령 마왕을 사냥한다고 해도 시나리오 클리어는 성립되지 않는다. 즉, 이들이 이곳에 올라오는 것은 완전한 개죽음일 뿐이란 얘기다. 예감이, 더욱 불길해진다. 만약 성운들이 조용했던 이유가, 여기다 나머지 개연성을 쏟았기 때문이라면? 서로를 쳐다본 나와 유중혁은, 포메이션도 잊은 채 전당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은 진형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당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거참, 성좌님들. 대체 무슨 짓들을 벌이시는 겁니까?] 거대한 전당의 중심에, 수십의 도깨비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멋대로 이런 짓들을 벌이시면 곤란하죠. <스타 스트림>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닙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런 곳에 쓰시다뇨?]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우리가 들으라고 하는 듯한 발화. 나와 눈이 마주친 비형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이 자식들, 대체 무슨······. [화신들을 아끼시는 건 알겠지만, 여러분들이 개연성에 간섭한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끝나지는 않는다고요. 몇몇 분들은 거의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으신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허, 개연성 좀 보게. 하위 성좌님들이 죄다 갈려나가셨잖아요······?] 대표로 말하는 도깨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웃음. 그보다 잠깐만. 저 자식이 방금 뭐라고 했지? “김독자.” 유중혁의 말에, 나는 녀석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전당의 중심. 본래 ‘73번째 마왕’이 있어야 할 옥좌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우리를 맞이해야 할 마왕은. [현재 ‘73번째 마왕’이 사망한 상태입니다.] 처참하게 가슴이 찢긴 채로, 죽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쟤 죽은 거야?” 뒤늦게 달려온 한수영의 말에, 다른 일행들도 입을 열었다. “마왕이 벌써 죽었다고요?” “그럼 시나리오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혹시, 벌써 끝난 건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진 까닭에, 일행들의 목소리는 잘 들려오지 않았다. 시나리오 도전 자격도 얻지 못한 화신들이, 개연성 폭풍을 감수하고 성운들의 지원을 받아 마왕을 죽여버렸다. 언뜻 보면 시나리오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타 스트림>의 메인 시나리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스타 스트림>이 시나리오의 균형을 바로잡습니다.] 초월적 존재가 과도하게 개입하여 망가진 시나리오는,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에 의해 강제로 수복된다. 머릿속으로 강렬한 기시감이 스쳤다. [73번째 마왕]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멸살법’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성좌들의 난동으로 인해 시나리오가 망가지고, <스타 스트림>이 메인 시나리오를 수복했던 일이. 그때, 대체 어떻게 되었었지? [<스타 스트림>이 망가진 개연성을 바로잡습니다.] 나는 마왕이 죽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을 좋아하는 <스타 스트림>은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서 죽은 존재를 다시 되살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간 역행이나 복선 없는 부활은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가장 크게 훼손시키니까. [메인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73번째 마왕은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73번째 마왕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녀석을 사냥해야만 시나리오가 진행되니까.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스타 스트림>이 할 일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마왕이 죽은 자리에, 까맣게 빛나는 보옥(寶玉)이 놓여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야, 저거······.” 그런데,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할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등줄기에 섬뜩한 느낌이 번졌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돌아 보았을 때, 유중혁은 이미 곁에 없었다. “유중혁!” 내가 움직였을 때, 이미 유중혁은 보옥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나를 돌아보는 녀석의 표정은, 지금껏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멸살법’의 어디에도 없던 눈빛으로,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꼭 약속을 지켜라.”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보옥이 ‘73번째 마왕 후보자’를 선택하였습니다.] [새로운 ‘73번째 마왕’이 선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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